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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나를 삼키려 입을 우악스럽게 벌리고 있었고, 거기에 발버둥 하나 쳐보지도 못한 채 그대로 삼켜졌다. 뱀이 작은 먹이를 탐하듯 단숨에 먹혔으나 그 뒤에 찾아온 것은 억센 고통도 압박도 아니었다. 마치 제자리를 찾은 기분. 내 팔과 다리는 물에 반쯤 잠겼고, 얼굴은 떠다녔다. 잠긴 부분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니 신경 쓰지 말라고 누군가 얘기하는 것 같았다. 그 문장 하나에 부유하는 풍선이 되어 어딘지도 모르는 물 위에 얹혀갔다. 너를 좋아해. 나지막이 속삭이는 그 다섯 음절이 좋아 꼼짝을 못 하고 그 자리를 지켰다. 나를 좋아해 주는 게 또 어디 있겠어. 너라도 나를 좋아하면 됐어. 나는 만족해. 아니, 안 돼. 나는 빠져나가야 해. 헤엄쳐 나갈 거야그렇지만 여기만이 나를 반겨주는데…….

 

눈을 떴을 때는 달가우면서도 반갑지 않은 햇살이 내 눈동자를 만나겠다 열렬히 부르짖고 있던 중이었다. 몇 시지. 딱히 시계를 보지 않아도 알람이 울리기 전 시간이라는 걸 감지한 몸이 좀 더 쉬자고 울었다. 안 되는데. 한 번 더 눈을 감았다간 생각했던 것보다 오랜 시간 잠에 헤맬 것을 모르는 게 아니었다. 그러니까 안 되는데, 하는 생각만 열댓 번은 더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어디 사람 생각대로 흘러가던 게 세상이었나. 오늘 햇살은 좀 따스워서. 지금 하고 있는 자세가 다시는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최고의 자세라서. 왠지 더 자도 괜찮을 것 같은 시간이니까. 어차피 이따 알람이 울릴 테니까 그때 일어나면 되지. 일어나서 다시 생각해보면 미쳐 돌았다면서 욕할 이유들을 지금은 꽤 괜찮은 이유라 여기고 다시 눈을 감았다. 잠시만 자는 거지, 오래 자겠다는 게 아니잖아.

 

. 본래는 약간만 자도 꿈을 꾸곤 했는데, 이번 잠은 아니었다. 당장이라도 산산조각 나버리겠다 협박하며 울려오는 두통을 무시하지 못하고 깨어났다. 그 사이에 빛을 무서워하게 된 눈은 어떻게든 뜨지 않겠노라 제 몸집을 불린 상태였다. 몇 시지. 딱히 시계를 보지 않아도 또 늦잠을 잤을 거란 걸 몸이 감지했다. 세상은 이상한 것투성이야, 보지 않고 감으로 알 수 있는 것들이 존재하다니.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몸을 일으키진 않았다. 이리저리 뒤척이다 누운 채로 기지개도 한 번 켜보고, 마른세수도 해보고, 씻으러 가야 한다는 생각도 해보고. 쓰레기. 만날 헤엄쳐 나오겠다 말뿐이지.

 

구누름을 늘여놓으며 한참을 더 이불 위에서 뭉그적대다가 누군가 줄을 잡아당긴 것처럼 단번에 몸을 일으켰다. 마리오네트가 이런 기분일까. 갑작스러운 몸짓 때문에 중심을 잃은 시선이 핑 돌았다. 그런데도 몸이 휘청이지 않았던 건 누군가 계속 일어나있으라 명령한 탓이었다. 눈앞에서 잠시간의 정전이 일어났다가 서서히 복구된다. 삽시간에 지나간 일이었지만, 한순간이라도 빛을 잃었던 것이 무서웠는지 눈을 연신 느리지만 확실하게 씀벅였다. 빛도 무섭고, 빛이 없는 것도 무서워? 조금이지만 웃기다고 생각했다.

 

날연히 몸을 움직여 화장실로 향했다. 너무 좁은 탓에 세면대와 변기 사이에 쭈그려 앉는 내 모습이 맞지도 않는 유리구두를 신겠다고 난리 치던 계모 같았다. 내 삶은 분수에 맞지 않는 삶이었다. 이것도 너무 과하지. 보드랍게 몸을 감싸고 있던 잠옷을 화장실 밖으로 내던졌다. 샤워기를 쥐고, 물을 틀고, 알맞은 온도를 찾다가 지쳐 결국 질식할 것 같이 따뜻한 물을 머리 위로 쏟아버렸다. 차라리 차가운 물을 쓸까. 아니, 나 여기서만이라도 따뜻함을 찾고 싶어. 그 바람을 비웃듯 온수가 지나간 자리에 찬 바람이 불었다. 몸을 움츠렸지만, 봐줄 생각이 없다는 듯 찬 바람은 계속해서 내 몸을 때렸다. 내가 너무 큰 것을 바란 탓이다. 내가 너무 많은 것을 바란 탓이야. 가볍고 포근한 거품을 종류대로 몸 위에 얹어가면서도 또 웅얼거렸다. 분수에 맞지 않은 삶이라고.

 

나를 조작하던 줄이 끊어져 버린 건지, 아니면 내가 싫증이 나 조작하기를 그만둔 것인지, 샤워를 모두 마쳤는데도 몸은 움직일 생각을 안 했다. 머리의 물기를 주욱 짜내다가 팔을 떨구고 그 자리에 앉아 멍하니 물이 흘러가는 걸 지켜보았다. 내 몸은 아직도 잠겨있었다. 얼굴만 동동 뜬 채로, 어딘가 집어 삼켜진 채로. 너는 나를 여전히 사랑하는구나.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은 기쁨일까, 체념일까. 너는 나에게서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을까. 나를 잠식하여 종내에는 모두 먹어 치울 너는. 몸이 다 말라갈 즈음이 되어서야 정신을 차리고 수건을 들어 메마른 물기까지도 모조리 닦아내었다. 밖으로 나와 모든 옷가지를 곳곳에 걸쳐대고 난 뒤에 한참을 문을 보고 서 있었다.

 

내가 나가야 할까. 나가야 하는 걸까. 나는 나가면 무얼 할 수 있지. 해는 왜 뜨고 지는 거지. 왜 날은 밝아오는 걸까. 저 옆을 날아가고 있는 벌레는 어떻게 저 날개를 가질 수 있었지. 나도 날개가 있으면 날 수 있을까. 왜 나한테는 날개가 없을까. 저 벌레는 오늘 하루 무엇을 하며 살까.

 

사람들은 이걸 쓸데없는 생각이라고 했다. 대단히 쓸모없는 생각이라고. 그런 생각을 할 시간이 있으면 움직이라고. 쓸데있고 쓸모있는 생각은 뭘까. 아무도 나한테 일러준 적이 없었다. 아니면 알려줬는데 내가 잊어버린 걸까. 아니, 어쩌면 그런 것들은 자라면 자랄수록 알아가는 것일지도 몰라. 그런데 왜 나는 모르는데. 괜찮아, 몰라도 돼. 너를 바보라고 말하는 것들은 다 멍청이야. 나를 먹어치우는 괴물이 히죽이 입을 벌려 웃으며 다시 말을 건네왔다. 그럼 나는 그 멍청이들보다 아는 게 적으니까 바보 멍텅구리겠다, 그치. 그래, 나는 그래서 너를 사랑해. 웃겨멍청이를 사랑한대. 취향도 참. 나는 나한테 멋대로 휘둘리는 것들이 가장 좋아.

 

그냥 흘려보낼 수 있는 말에 순간적으로 반항심이 들었는지 가방을 챙겨 들고, 양말을 신고, 신발을 신고, 집을 나섰다. 헤엄쳐 나갈 거야. 너한테 나를 내어주지 않을 거야. 침수했던 한쪽 팔을 들어 올려 어떻게든 벗어나려는 몸짓을 보였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마. 네가 그런다고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아? , . 쓸데있는 짓은 또 뭔데. 쓸모없는 새끼. 말과는 다르게 더 조여오는 늪에 힘써 뻗었던 팔로 표면 위를 힘없이 내리쳤다. 무력감. 아무것도 내 힘으론 할 수 없을 것 같다. 나는 어떻게 걷고 있었지. 발끝으로 시선을 던진다. 지저분해진 운동화 끝이 조금 닳은 채였다. 싸구려 운동화. 두 달만 신어도 너덜너덜해져서 걸레짝이 되어버리는. , 나는 너야. 그렇게 안타까운 눈으로 쳐다보지 마. 너는 네가 불쌍해? 운동화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어디에 가고 있었더라. , 일하러……. 지금 가도 3분은 지각이네. 가야지, 얼른 가야 하잖아. 내가 없으면 더 잘 굴러갈 것 같은 곳이라도 지금은 내가 가야 하잖아. 눈이 아프도록 시퍼런 하늘을 쳐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나는 길을 잘 잃었다. 그렇게 복잡한 길이 아니래도 가게도, 건물도, 길도, 나무도, 하늘도 자꾸 낯설어서 몇 번은 들락날락하고 나서야 알음알음 길을 익힐 수 있었다. 그리고 일상이 되어버린 길은, 고개를 숙인 채로도 잘 찾아다녔다. 일상, 일상은 뭐지. 익숙한 것, 아니면 지겨운 것. 아니면 그 언저리. 정의할 수 없는 것들은 왜 세상에 존재하지. 생각 끝에 문득 눈에 닿은 건물이 낯설었다. 저 건물이 여기에 있었던가. 길을 익힌 건 내가 아니라 내 발이었던 걸까. 모든 것이 수수께끼였다. 아니, 나에게만 수수께끼일 테다. 정의할 수 없는 것들은 왜 세상에 존재하지.

 

삶은 내가 살아있어도 괜찮을 만큼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걸 끊임없이 증명해야만 하는 전쟁이었다. 살아있어도 괜찮을 만큼의 가치를 가지고 있음을. 끊임없이 증명. 헤어나오지 못하고 침몰되어 있어서 해결되지 않은 것은 전자일까, 후자일까. 어쩌면 모두 다일지도 몰라. 그래도 어떻게든 삶을 이어나가겠다며 끝끝내 도착한 빵집 문을 열었다. 도어벨이 예고도 없이 열린 문에 맞아 애처롭게 흔들리며 비명을 질렀다. 몇십만 번째 비명인지는 몰라도 오랫동안, 지치지도 않고 목소릴 높였을 것이다. 온통 전쟁통이다. 자신의 가치를 끊임없이 증명해야만 하는.

 

아직 가지 못한 전 타임 아르바이트생과 이제 막 도착한 듯한 같은 타임 아르바이트생을 보면서 고개를 꾸벅 숙인 뒤 안으로 들어가 짐을 내려놓고 앞치마를 둘러매고 삐뚤어지지 않게 모자를 바로 썼다. 숨을 천천히 들이마신 뒤에 다시 천천히 뱉어냈다. 중간중간 끊기며 흔들리는 숨이 어디론가 위태로워 보였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먹혀버렸다는 걸 드러내지 마.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걸 사람들이 알게 하지 마. 너 때문에 사람들이 마음 쓰게 하지 마. 언제든 갈아 끼울 수 있다는 거 알지. 대체되고 싶지 않으면 제대로 해.

 

포스기 앞에 서서 심호흡을 한 다음에 들어오는 손님에게 환한 미소를 지었다. 처음이 힘들지, 하다 보면 괜찮을 거란 말. 매일의 웃음이 그랬다. 그래도 조금 웃고 나면 늪이 아니라 구름 속에 묻혀 있는 것 같았다. 어릴 적에는 구름이 정말로 솜사탕인 줄 알았다. 사실은 아직도, 어쩌면 저 구름은 솜사탕일지도 모른다는 행복한 상상을 하곤 했다. 가볍고, 보드랍고, 달콤한 그 속에 내가 누워있는 것만 같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하루 중에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어서 오세요. 지금은 그 제품이 가장 많이 나가요. 카드로 결제하시나요. 적립카드는 있으신가요. 금방 포장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일하기 전 걸었던 주문들이 제 역할을 해냈는지 나쁘지 않게 상황이 흘러가고 있었다.

 

대단하신 것 같아요. 손님들이 없는 틈을 타 갓 구워진 빵을 채워 넣고 정리하는 동안 들려온 말이었다. 어떤 게요. 티를 내지 않으려 조금 톤을 높인 목소리가 자연스레 튀어나왔다. 아니, 그냥, 우리 같이 시작했잖아요. 그런데 항상 앞서가시는 것 같아서요. 멋지다구요. 아까 진상 대하신 것도 그렇고. , 진짜요. 잠시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몰라 어떻게든 괜찮은 단어들을 끌어모으려 애썼다. 그렇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이었다. 대단하지도 않았고, 멋지지도 않았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엔 그랬다. 왠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 같았고, 훨씬 더 좋은 대처를 했을 사람들이 수두룩할 거란 걸 알고 있으니까. 참을 수 있는 걸 참지 못하기도 하고, 명확해야할 것을 흐리멍텅하게 하기도 하고, 현명한 척해보려 하지만 결국은 척에서 그칠 만큼의 것만 갖추고 있는 게 나였다. 그래도 칭찬을 들었으니까 나 조금은 괜찮은 사람이 아닐까. 아니, 너 착각하지 마. 헤어나오지 못하고 묻힌 주제에. 속이 울렁거렸다. 왜 나는 더 좋은 행동을 하지 못하고 늘 이렇게, 멍청하게, 성장하지도 못하고 항상 제자리에서, 어쩌면 더 퇴보한 것 같이.

 

느즈막히 숨을 뱉고선 멋지세요, 라고 말했다. 어떻게든 끝을 보이려지 않으려는 몸부림이었다. 제가요? . 항상, 기분 좋게 웃으시는 것 같아서요. 항상은 아닌데, 그렇게 보였어요? 왠지 부끄럽다. 같이 일하는 사람이 좋아서 그런가 봐요. 이번에도 괜찮은 단어들을 어떻게든 갈취해내려 했지만, 어째서인지 잡히는 단어가 하나도 없었다. 멋쩍은 웃음으로 넘기는 게 다였다. 저런 게 여유구나. 나는 평생토록 가질 수 없을 것. 아무 일이 없어도 쫓기는 사람처럼 해야 한다는 말에 붙잡혀 끌려가는 나는 가질 수 없는. 저 사람이 부러워? 부러워. 저 웃음은 전쟁에서 승리한 사람의 웃음이야. 삶의 가치가 충분한 사람인 거야.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저 사람은 앞으로도 더 많은 가치를 얻은 채로 살아갈 거야.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사람은 감으로 아는 게 있어. 평생 나와 그 궤도를 달리 하겠지. 예언가 납셨네. 당연하게 아는 진리인 거야. 가령,

 

내가 없으면 저 사람 같은, 더 좋은 사람이 여기 있었을지도 몰라. 손님들도 좋아하고, 같은 알바생도 좋아하고, 사장님도 좋아할 만한. 더 친절하고, 더 잘 웃고, 좀 더 사교성 있고, 좀 더 요령 있는. 내가 있어서. 내가 있기 때문에. 내가 없으면 좀 더 잘 돌아갈 것만 같은데 내가 욕심이 많아서. 어떻게든 내 삶을 증명하고 싶어서. 울컥 치밀어 오른 눈물을 애써 잘 다독였다. 네가 나올 곳이 아니야. 네 무대는 여기가 아니잖아. 눈물이 나오더라도 금방 흘려보낼 요량으로 고개를 숙였더니 다시 운동화와 눈이 마주쳤다. 단단히 묶었던 끈이, 벌써 풀어질 듯 흐물거리고 있었다. 나는 너라니까. 왜 그러고 있는 거야. 왜 그런 눈으로 보고 있는 거야. 답을 하지 않고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운동화 끈을 질끈 묶었다. 무릎을 꿇었어.

 

생각해보면 살면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과거는 모두 내 후회이며, 내 그릇된 행동, 잘못들인데도 정작 단 한 번도 무릎을 꿇은 적이 없었다. 미안하다는 얕은 말 따위로도 다할 수 없을 것 같은데 무릎을 꿇은 적도 없고, 심지어는 미안하단 말도 하지 않은 때가 많았다. 내가 있어서 세상 속 불행의 총량이 얼마나 늘었을까. 아프게 던졌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떠오를 때면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너 그 정도면 자의식 과잉이야. 너를 사람들이 기억할까. 그냥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 너는 아무것도, 아무것도 안 해도 돼. 생각을 많이 하니까 같잖은 눈물이 나오는 거야. 힘을 놓고, 그냥 빠져. 나는 너를 사랑해. 너를 모두 감싸줄 거야. 나는 헤엄쳐 나갈 거야나는 나를 찾을 거야나는 더 이상…….

 

일을 어떻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했든 간에 엉망이었을 것이다. 그냥 좀 봐줄 만할 정도의 것은 되어도, 사람들이 원할 만큼의 일은 아닐 것이다. 사람들은 거짓말쟁이다. 괜찮다고 웃어 보이는 게 진짜 괜찮아서 웃는 게 아니다. 웃지 않으면 안 되니까 웃는 것뿐이다. 쓸데없는 적군을 하나 더 만들기 싫어서 웃는 것뿐이다. 그들의 표시가 무엇도 없으므로 나는 누가 내 아군인지, 적군인지 분간할 수 없지만, 그 사람들은 이미 나를 쓸모없는 존재로 낙인 찍어놓았을 것이다. 늘 이렇게 생각하며 나를 때려부숴서라도 고쳐야겠다고 하지만, 고쳐지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여전히 헤엄쳐 나가겠다 말뿐이었다. 잠식된 채로 비슷한 언행을 지속해나간다. 나를 스쳐 지나갔던 모든 사람에게 미안하지만, 정작 바뀌지 않는 것은 미안하지 않다는 것의 방증일까.

 

세상이 깜빡였다. 아니, 형광등이 깜빡인 것인가. 내가 눈을 깜빡인 것일까. 마감하느냐고 숙였던 허리를 들어 천장을 쳐다보았다. 어지러움은 오래도록 머물 것 같더니 삽시간에 떠나갔다. 떠나간 자리가 공허했다. 공허한 곳을 채우기 위해 묶을 수 없는 빛을 눈에 담는다. 하얀빛을 가진 형광등. 햇빛을 대체하려 든 수명이 정해져 있는 인공물. 네가 깜빡인 거니. 아니면 나도 모르게 이 세상이 빛을 잃었던 걸까. 그것도 아니면 내 몸이 전원을 껐다 켠 걸까. 어떤 게 정답이야. 쓸데없는 짓 좀 하지 마. 쓸데없는 게 뭐냐고. 지금 너 같은 거. 쓸데있는 건 뭐야.

 

쓸데있는 게 대체 뭔데. 이 세상을 구하는 것, 아니면 돈이 되는 것, 그것도 아니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것, 그것도 아니면 내가 성장하는 것. 이 세계가 발전하는 것. 뭐가 답이야. 나는 아무것도 몰라. 왜 내가 쓸모없는 짓을 하는 지도, 그럼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 지도, 무엇이 쓸모있는 행동인지도, 정의할 수 없는 것은 왜 존재하는지도, 정의는 어떻게 내릴 수 있는지도, 어떻게 형광등은 햇빛을 대신할 수 있었는지도, 나는 왜 미안해하는지, 나는 왜 미안해하지 않는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데. 모르는 게 이렇게나 많은데. 그래도 헤엄쳐 가고 싶어. 이곳을 빠져나갈 거야. 그런데 왜 나는 못 빠져나가고 있어. 나는 왜 헤엄치고 싶었지. 알지 못하는 게 왜 이렇게나 많은 거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 초등학교 때 너나 할 것 없이 손을 들던 아이들. 상식 문제라는 데 나는 하나도 몰랐다. 평소 시험 점수가 낮은 것도 아니었다. 그때는 어딜 가서 모자란 놈 소리도 들어본 적 없었다. 그런데 상식을 나는 몰랐다. 다들 맞추겠다고 서로 소리를 질러대는데 나는 몰라서 하나도 맞추질 못했다. 다들 제 삶을 증명하려 소리를 지르는 데 나는 아무것도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그때는 내가 내 삶을 증명해야 한다는 것도 몰랐다. 괜찮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래도 우리는 특별한 존재니까, 조금 달라도 괜찮아. 아니야, 아니라고. 다르면 안 돼. 다 똑같아야 한다고. 엇나가면 안 된다고. 근데 그거 알지. 다 똑같으면, 대체하기 정말 좋다는 거. 저 형광등이나 새로 사 올 형광등이나 다를 게 뭐가 있겠어.

 

……. 뭐 하세요. ……. 저기. 목이 아파서, 잠시. 저희 이제 나가야 해요. 죄송해요, 금방 마무리할게요. 황급히 하던 일을 마치고 짐을 챙겨 나왔다. 짙게 물들여진 밤하늘이 눈에 보였고, 이제는 제법 쌀쌀해진 날씨에 입에서는 김이 새어 나왔다. 안녕히 가세요, 들려오는 그 한 마디에 왠지 그 앞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황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몸이 바쁘게 흔들리는 새에도 시선은 하늘이었다. 별을 찾으려 다 담기지 않을 하늘을 담았다. 보이지 않던 별들이 하나둘씩 떠오르고, 그사이에 조금 이지러진 달이 제 존재감을 과시했다. 수 없는 시간의 차이를 극복하고서 흔들림 없이 밝게 빛나는 별과 이지러졌어도 그저 당당한 달. 그 위엄 앞에 팔과 다리가 힘을 잃는 것만 같았다. 금세 꺼질 듯한 촛불, 이제는 죽어가는 별, 이지러지다 못해 사라진 달, 봄이 지나 모든 꽃을 뱉어버린 나무, 아무것도 남지 않은 음료수 캔, 반쯤 쓰다 잃어버린 지우개, 너무 짧아져 버린 몽당연필. 그런 것들에 비유하는 것마저도 미안할 정도로 쓸모없고 볼품없이 초라한 나.

.

.

.

.

, 헤엄쳐 나갈 거야? 아니이젠 잘 모르겠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생각이 너무 많았어. 가지 마. 잘 모르겠다니까. 나는 너랑 같이 있고 싶어. 따스운 햇살 아래서 우리 그냥 같이 있자. 생각해보니까 쓸모없는 생각을 하면서 지내는 것도 괜찮은 거 같아. 아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니까. 그래, 뭔가 하지 말고. 생각만 하는 거야. 그것도 하는 거잖아. 까다로워. 미안해. 미안하지 않으면서 미안하단 소리하지 마. 가식적이야. 그렇지만 세상은 미안하다, 고맙다, 말을 안 하는 사람을 싫어해. 사람들은 거짓말쟁이야. 그렇지만. 그냥 내 말 들어. 네 말은 듣기 싫어. 네가 내 말을 안 들으면 뭘 어쩔 건데?

 

문을 열고 들어가면 나만을 위한 무대가 있었다. 폐장된 나만의 놀이공원. 아무도 들일 수 없고, 또 아무도 들어오고 싶어하지 않는. 불은 일부러 켜지 않았다. 이곳은 어두워야만 한다. 과분한 곳을 더 과분히 만들고 싶지 않았다. 신발을 벗고 들어선다. 갑자기 바깥 공기를 만난 발이 움츠러들었다. 버려진 운동화가 외쳤다. 이제는 내가 필요없어? 그리고 웃었다. 완벽히 너잖아, . 묶은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흘러내리고 있는 운동화 끈이 보였다. 외면하고 싶었다. 돌아서서 짐을 내려놓고 겉옷을 벗었다. 다시 화장실로 몸을 욱여넣는다. 어두움과 습함이 공존하는 곳. 내게는 과분한 비좁은 그 틈새. 그 누구도 들이지 않을, 들어오고 싶어하지 않는 휴게소. 제 무대를 알아차린 눈물이 처진 눈꺼풀 사이를 비집고 튀어나온다. 이 무대는 내가 놀아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아. 마음껏 날뛰면 날뛰는 대로, 얌전히 있으면 있는 대로. 여긴 내가 전부야. 눈물로 수를 놓은 축제장. 버려진 운동화가 생각났다. 하루종일 만지고 있었던 포스기가 떠올랐다. 아까 보았던 밤하늘이 기억에 남는다. 끝으로 언제 생겼는지도 모를 왼손 약지의 긴 상처를 보았다.

 

왜 다쳤지. 알 수 없었다. 이미 상처는 정의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정의할 수 없는 것이 왜 존재하는지 아직도 알아내지 못했으므로, 정의할 수 없더래도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이제 이해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지만, 궤변이래도 좋았다. 이곳은 뒤틀린 것 하나도 화려한 등불이 되는 곳.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길게 반지처럼 남은 상처를 들여다본다. 저 너머엔 뭐가 있지. 아무것도 없어. 정말로 아무것도 없나. 없다니까. 사람들은 여기에 사랑의 증표를 남기는데. 사람들은, 이지, 너는 아니잖아. 나는 사람이 아닌가. 네가 다른 사람들이랑 같아? 그럼 나는 달라? 아무것도 없는 손을 쥐었다 폈다. 실체도 없는 허상의 것이라도 움켜쥐고 싶었는지. 만진 것도 없는데 이상한 걸 만진 마냥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왜 내가 달라. 같아야 하는데. 그래야 하는데. 궤변이라도 좋다며. 이곳은 뭐든 괜찮다며. 그렇지만,

 

가져왔던 휴대폰이 순간 빛을 냈다. 겁을 먹은 어둠이 저 멀리 몰려간다. 느리게 손을 들어 휴대폰 액정을 확인했다. 전화였다. 두어 번 숨을 내뱉은 뒤에야 전화를 받았다. 눈물이 흘렀던 자국 위로 휴대폰을 붙였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저 같은 타임에 아르바이트하는. , 어쩐 일로 전화하셨어요. 시간 괜찮으시면. . 내일 같이 점심이라도 하실래요. 내일이요. . 왜 갑자기, 라는 질문이 튀어나올 뻔했지만, 간신히 참아냈다. 그냥 말해버리지, 그러면 재밌었을 텐데. 난 꼭 네게서 헤엄쳐 나갈 거야. 네 그 헛소리도 지긋지긋해. 널 사랑해서 하는 소리라니까. 전 좋아요. 진짜 좋아? 제발 좀. 그러면 근처 맛있는 데가 있는데 위치 보내드릴게요. . 보시고 안 좋아하는 메뉴면 연락 다시 주세요. . 내일 봬요. 내일 뵐게요. 좋은 밤 보내세요. 그 말을 끝으로 다시 빛을 잃는다. 당당해진 어둠이 삼켰다.

 

방금 뭐가 지나갔지. 또 빛을 얻은 휴대폰이 반짝였다. 손가락을 간신히 움직여 온 메시지를 확인한다. 혼자서는 굳이 찾지 않았을 완벽한 메뉴다. 내가 내일 이걸 먹는 건가. 아직도 실감이 가지 않았다. 누군가와 식사를 같이 하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내일 하루는 어떤 이야기를 하면 좋을지에 대해 온 에너지를 다 쏟을 것이다. 그러고 나면 안 그래도 형편없던 일이 더 형편없게 추락하겠지. 힘없이 묶여 금세 풀려버리는 운동화 끈을 묶기 위해서 몇 번이고 무릎을 꿇어 사과할 것이다. 내일은 하늘을 볼 힘도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오늘 봤던 하늘이 어땠더라. 그새 그 형태를 잊은 걸까. 사람은 왜 잊고 잃을까. 그것은 축복일까, 저주일까. 내일은 자주 세상이 빛을 잃을 것 같다. 형광등이 빛을 잃을 수도 있다. 내 몸이 잠시 꺼지는 걸지도 모른다. 예측되는 미래는 확실함 속에 불확실함이 가득했다. 괜찮아, 이곳은 여전히 궤변도 아름다운 불꽃이 되어 화려하게 타오를 수 있는 곳. 질식할 것 같은 따스함을 선물해줄 것이다.

 

졸린 것 같았다. 지금쯤 운동화 끈이 완전히 풀어져서 나동그라져 있을 것이다. 정의할 수는 없지만, 인간은 감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있었다. 내일은 사과를 해야겠어. 뭘 사과하게. 그냥 아무거나 말이야. 이유도 없이 사과하겠단 말이야? 그냥 내 존재가 잘못이니까, 아무거나 사과해도 맞는 말 아니겠어. 그리고 옆의 건물들을 좀 보면서 갈까 봐. 쓸데없는 짓. 쓸데없는 거라도 해보고 싶어. 내일 되면 하기 싫을 걸. 그러면 안 하면 돼, 쓸데없는 일이었으니까. 쓸모없는 새끼, 이래서 난 네가 좋아. 진짜 네 취향은…… 모르겠다. 상식이 없는 사람이라 어차피 당연한 것도 이해할 수 없어. 잠이 쫓아왔다. 도망치는 길은 없었다. 이건 좋은 밤일까. 잔잔한 수면 위에 다시 몸이 오른다. 남은 눈물이 마지막 피날레를 장식하기 위해 가볍게 몸을 던졌다. 왼손 약지에 길게 난 상처가 욱신거렸다.

 

*

 

눈을 떠보니 왼손 약지에 반지가 하나 걸려있었다. 헐렁거리는 모양새가 익숙했다. 손가락을 아래로 향하게 만드니 반지가 쏟아져 내린다. 완전히 추락하기 전에 손을 말아쥐었다. 나한테 맞지 않는 과분한 것. 투명하게 들려오는 메시지에 웃음이 샜다. 작게 박힌 가짜 보석이 반짝였다. 눈은 제 몸집을 불리지 않은 채였다. 멀끔하게 뜨인 눈이 생경했다. 온전히 내 의지로 몸을 일으켰다. 여러 차례에 걸쳐 세워진 몸이 도리어 더 가뿐했다. 새소리가 경쾌하게 들렸다. 이불 위에 앉은 따스함이 선명했다. 바닥이 딱딱했다. 울렁거리는 수면이 아니었다. 낯선 듯 낯설지 않은 세상에 앉아있었다. 눈을 깜빡이고 있자니 휴대폰이 울려왔다. 빛에 빛을 더하면 아름다움이 나왔다. 손을 뻗어 형태를 가진 아름다움을 가져와 액정을 확인한다. 누군가 전화를 걸고 있는데, 전화번호도, 발신자 이름도 뜨지 않았다. 의아해하면서도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이제는 내가 필요없어?

 

*

 

온몸이 굳어 움직이질 않고 있었다. 겨우 손가락을 움직여본다. 잘 움직이는 걸 보니 가위눌린 건 아닌 듯했다. 하기야, 가위에 눌린 적은 한 번도 없었지. 겨우 손을 올려 마른세수를 했다. 잠시 스쳐간 손 위에 물기가 흥건했다. 출처는 이마, 식은땀이었다. 무슨 꿈을 꿨더라. 분명 방금 전까지 꿈을 꿨던 것 같은데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빛에 대한 혐오감이 가득 찬 눈이 제 몸뚱아리를 잔뜩 부풀리고 있었다. 겨우 눈을 깜빡이며 기지개를 한 번 켜고 나니 몸이 다시 제자리를 찾은 것 같았다. 부유하는 풍선, 내 정체성이었다. 바닥이 울렁거리는 것 같다. 화장실 조그만 창 너머로 하얀 그림자가 보였다. 몇 시지. 정확한 시간은 몰랐지만, 지각하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턱 위에 올려두었던 휴대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면, 역시나 약속 2시간 전이다. 몸을 일으켜 샤워기를 잡은 다음 왼손 위로 물을 쏟는다. 왼손 약지 위 상처가 따가웠다.

 

약속장소에 나가는 데에 출발은 나쁘지 않았다. 어제보다 잠잠한 상태로 출발할 수 있었고,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발이 기억하고 있는 길을 지나쳐오는 데에는 어려움도 없었다. 문제는 약속장소의 정확한 위치를 모르겠다는 데 있었다. 길을 잘 잃곤 했다,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그래, 넌 항상 똑같았지. 그래, 모두가 그렇게 말했지. 숙였던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핀다. 익숙한 길로부터 파생된 길은 늘 머리가 아팠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제가 길을 몰라서요. 지금 어디신데요. 엄청 큰 전봇대 앞에 서 있어요. 건물 이름을 말해주셔야 알 것 같아요. 휴대폰 액세서리샵이 있어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죄송해요. 넌 진짜 죄송해? 죄송해요. 아니에요, 뭐가 죄송해요. 길을 못 찾아서요. 네가 늘 그렇지. 제가 항상 이래요. 그럴 수도 있죠. ……. 쓸모없는 새끼.

 

폐기된 까끌거리는 바게트가 목을 메웠다. 모든 물기를 앗아갔다. 커팅되어 드러난 공기층 사이로 바싹마른 숨이 오르내렸다. 휴대폰 너머로 목소리가 울렸지만, 그 형태를 잡을 힘을 다 잃은 것 같았다. 물에 누우면서 귀가 잠겼다. 모든 소리가 웅웅대기 시작했다.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린다. 고개를 숙이니 바닥에 개미가 기어가는 것이 보였다. 허우적대며 어떻게든 빠져나가려 애를 쓴다. 저 개미는 누군가의 발에 밟혀 죽을 것이다. 헤엄쳐 나가기도 전에 죽음이 집어삼킬 것이다. 너도 똑같을걸. 나는 개미야? 아니. 사람들하고는 다르고 개미랑은 같은 나는 뭐야. 쓸모없는 새끼.

 

저기. , 제 오셨어요. 너무 놀라신다. 죄송해요. 뭐가 그렇게 죄송하세요. 그냥 다요. 괜찮으니까 마음 쓰지 마세요. ……. 여기에서 조금만 가면 돼요. . 일단 이쪽으로. 가는 길은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개미의 죽음에 주목하고 싶지 않았다. 대신 한 번도 눈여겨본 적 없던 건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수많은 건물 중에 가본 곳이 얼마 없었다. 내일은 여기에 무엇이 있었는지 또 잊을 것이다. 일상이 아닌 곳이기 때문에. 여기에요. 진짜 가까웠네요. 거의 다 찾아오셨는데 마지막이 아쉬웠다, 그렇죠. 그러게요, 마무리만 잘했으면 좋았을 텐데. 제대로 된 결과가 없는 과정은 쓸모가 없었다. 쓸모없는 새끼.

 

그다지 밝지 않은 조명을 쓰는 식당이었다. 나른한 분위기의 목조 인테리어가 눈에 띄는 곳. 손님이라곤 우리뿐이었다. 조명이 너무 밝았다면, 너무 활기찬 분위기였다면, 사람들이 가득 메워진 식당이라면 어땠을까.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과분함에 깔려 개미처럼 죽었을 것이다. 뚜렷한 빛이 더 큰 어둠을 불러오는 것과 같은 원리로. 주머니에 넣지 않았던 손이 발갛게 변한 것을 보았다. 쥐고 펼 때마다 내 손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편안한 공간에서 나에게 이질감을 느꼈다. 분위기 괜찮죠. , 편안하고 좋네요. 그런데 왜 저랑 같이 식사하고 싶으셨어요. 어제 미처 뱉지 못한 질문이 입속을 맴돌았다. 그저 맴돌기만 할 뿐 튀어나갈 힘은 어디에도 없었다. 감사해서 밥 한 끼 사고 싶었어요. 전 그럴 만한 일 한 적이 없는데. 그냥 제가 고마운 거라서, 아마 생각도 안 나실 거에요. 왼손 약지의 상처가 근지러웠다. 상처를 덮었다. 쓰라림만이 남는다.

 

더 무슨 말을 했는지, 배가 부른 건지 체한 건지. 아무것도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빵집이었다. 진짜 배부른 거 같아요. , 맛있었어요. 거짓말이다. 사람들은 거짓말쟁이다. 나는 개미고 사람이었다. 개미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었다. 정신차리고 보니 나는 정의내릴 수 없는 존재였다. 정의내릴 수 없는 것이 존재할 수 없다는 법칙이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었다. 상식이 없으니 상식 밖의 궤변이 탄생했다. 무대가 아닌 곳에서의 궤변은 드라이아이스처럼 옅은 숨과 함께 죽어간다. , 이제 물에 몸을 담가. 부글거리는 비명과 함께 죽어버려. 도어벨의 비명보다 작고 초라하다. 내 삶의 가치를 위해 낼 소리가 없었다. 포스기를 만지다가 고개를 숙였다. 운동화 끈이 풀려있었다. 세상이 빛을 잃는다. 죄송해요. 가식적인 새끼. 형광등이 깜박였다. 그러려던 건 아니었어요. 쓸데없는 소리를 해. 몸의 전원이 껐다 켜진다. 나도 그러고 싶진 않았는데. 쓸모없는 새끼. 이제는 내가 필요없어? 어디선가 들렸던 음성이 물을 타고 귀를 메웠다. 내 무대가 필요했다. 폐장된 놀이공원, 시멘트 바닥만 있는 휴게소, 추한 것들이 가득한 축제장.

 

사람은 감으로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어제의 내 예언은 오늘 모두 맞아들었다. 하늘을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집으로 들어왔다. 버려진 운동화가 다시 울었다. 짐을 내려놓고 겉옷을 벗었다. 화장실로 들어갈 힘도 없이 바닥에 엎드려 누웠다. 제자리를 찾은 기분. 내 팔과 다리는 물에 반쯤 잠겼고, 얼굴은 떠다녔다. 잠긴 부분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니 신경 쓰지 말라고 누군가 얘기하는 것 같았다. 그 문장 하나에 부유하는 풍선이 되어 어딘지도 모르는 물 위에 얹혀갔다. 너를 좋아해. 나지막이 속삭이는 그 다섯 음절이 좋아 꼼짝을 못 하고 그 자리를 지켰다.

.

.

.

.

, 헤엄쳐 나갈 거야? 휴대폰이 반짝였다. 전화였다. 번호도, 발신자도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받을 힘이 하나도 없었다. 졸린 것 같았다. 내일은내일은…….





성명 : 김은지

이메일 : love2mamlove@naver.com

  • profile
    korean 2020.03.01 19:11
    수고 많으셨습니다.
    더욱 분발하시면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늘 건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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