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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조금 늦은 42년 전의 약속, 수학여행




차표요.”

, 수고하십니다.”

운전기사의 무심한 눈빛이 금세 웃음을 담아 보낸다.

한낮의 햇볕은 바삭함으로 괜시리 웃음 짓게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은, 아니 며칠 전부터 내 마음은 줄곧 웃고 있었다.

공항버스에 몸을 싣고 나서 운 좋게 창가 자리에 앉아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일상을 흘려보내며 나는 공항까지 한 시간 반 정도 느긋한 여유를 즐기기로 했다. 그러면서도 자꾸 시간을 보게 되는 것은 그만큼 빨리 맞이하고 싶은 설렘 때문이다.

삶의 버거움을 지탱해주던 직장생활에서의 퇴직.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당연히 겪어내야 하는 일이지만 정작 내가 맞닥뜨리고 보니 당황스러웠다. 물론 그 전에는 위로는 상사눈치로 아래로는 치고 올라오는 후배사원으로 긴장된 날을 보내면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었는데 막상 그렇게 되고나니 반가움 보다는 헛헛함이 더 컸다.

 그 헛헛함을 채워주는 게 바로 친구들이었다. 특히 고등학교 동창모임은 40여명이 넘는 친구들로 정기적인 모임은 물론 마음에 맞는 친구들끼리의 모임에 산수 좋은 곳에 터를 잡은 친구들의 초대까지. 그래서 나름대로 소소한 일을 하면서 심심찮은 날을 보낼 수 있다. 더불어 삶의 또 다른 즐거움도.

그렇게 친구들과의 모임이 생활의 중심이 되면서부터 자주 오르내리는 게 있었는데 바로 수학여행이다.

당시 타 학교보다 절반의 숫자인 2학년이었던 우리만 수학여행을 가지 못한 채 보통의 날을 보내야 했다. 그 이유는 다른 학교 수학여행에서 교통사고로 분위기가 뒤숭숭했고, 학업에 전념해야 한다는 교장선생님의 특단의 조치 때문이었다.

까까머리에 교복을 입고 짜여진 틀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던 우리들에게 수학여행의 무산은 허탈함을 남겼고, 훗날에 붕우끼리 수학여행을 가자는 독기어린 약속을 하게 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그 때의 약속을 실행하기 위해 회갑의 나이로 수학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이 또한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보니 그동안 여행지 선정부터 시작해서 코스, 즐길거리. 먹거리까지 의견을 모으고 결정 짓기까지. 서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투닥거리기도 하며 어느새 우리는 열혈소년 18살로 되돌아왔다.

환갑여행인지 수학여행인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좋아요?”

그런데, 정말 좋을 것 같아요. 고등학교 친구끼리.

그것도 40여명 넘는 친구들과 함께 하는 여행이라.

보기 힘든 우정이에요. 그러니 좋아하실 수밖에.

내 친구들한테 말했더니 우리도 그렇게 하자는 거예요. 후후.......“

마치 큰일이라도 치루는 것처럼 밤낮없이 통화는 물론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나를 보고 아내와 아이들의 눈빛 속에는 어이없어 하면서도 은근한 부러움이 담겨 있었다.

집합지인 공항에서 만난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반가움을 더했고, 40여년전의 약속을 실행한다는 사실에 목소리는 한 옥타브쯤 높아져있었다.굉음을 내고 비행기는 활주로를 내달리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하늘로 솟아오르고, 비행기창 밖으로 보이는 앙증맞은 뭉실한 구름에 설렘을 싣는다.

23일의 첫날,

우리는 제주도 북동쪽에 위치한 함덕의 서우봉 해변을 마주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짙고 옅은 에메랄드빛으로 끝없이 펼쳐진 바다, 그 너머로 아스라한 수평선, 그 사이로 휘몰아오는 바람 한 자락, 그 위로 실어오는 하늘빛 한 줌. 그 모든 것들을 온 몸과 온 마음으로 채우며 그동안 에워싸고 있는 것들을 벗어놓았다.

아빠로부터, 남편으로부터, 가장으로부터의 책임감에서 벗어나 아무 걱정 없는 까까머리 18살의 거침없음으로.

제주도의 삼다 중 바람을 실감하게 해주는 구좌해변의 가슴 시릿한 바다의 푸르름을 채우고 난 뒤. 비어있는 자리에 초록빛 싱그러움을 꾹꾹 채워 나갔다. 눈앞을 아른거리는 빗살로 촉촉이 젖어있는, 잘망한 부드러움으로 마음을 열어 놓은 절물휴양림’. 기생화산으로 등산로를 따라 정상에 오르면 말발굽형 분화구가 있어 그 곳에서는 제주시와 한라산을 마주할 수 있는 곳이다.

입구에서부터 마음을 열어주는 울창한 숲의 대부분이 수령 30년 이상의 삼나무로 그 외에도 소나무, 산뽕나무가 어우러지는 고즈넉한 푸르름을, 향긋한 비자나무의 향이 좋은 기분으로 와 닿는 비자림’. 가늠하기조차 어려운 때부터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나무들의 모습은 마음을 넉넉하게 해주는, 휘어지고 이어지는 숲길은 만만치 않은 세상살이로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주었다.

제주도 특유의 밭담, 산담, 그리고 비자나무의 열매까지. 수많은 이들의 발걸음으로 다져진 길을 앞서거니 뒷서거니 거닐며 이야기를 더할 때면 늘어진 가지 끝 이파리들도 귀를 기울이고, 누군가의 너스레떨며 왁자한 웃음소리에 초록빛 바람이 일렁이고, 그렇게 우리는 가슴 속에 묻어두었던 빛바랜 18살에 색을 입혀나갔다.

여행의 설렘을 마음껏 누린 후, 우리는 숙소에 각자의 방을 찾아 짐을 부리고. 자리를 옮겨 대망의 공식행사를 즐겼다.

제주도 추억만들기플랜카드를 배경으로 나름의 식순에 따라 이번 여행에 대한 의미를 함께 했다. 특히 매년 5월이면 열리는 사은회 때 뵙는 선생님들의 추억의 축하메세지와, 더벅머리 18살의 흑백과 지금까지의 모습을 담은 영상을 마주할 때는 가슴 저 밑으로부터 무언가 꿈틀거리는 가 싶더니 이내 뜨거움이 눈가로 전해져왔다.

40여년이라는 세월의 흐름으로, 만만치 않은 세상살이를 겪어내느라 겉모습은 많이 달라졌지만 세상을 항한 눈빛만큼은 그 모습 그대로였다. 지금도 무엇이든 해 낼 수 있는 반짝임으로. 그 눈빛으로 목청껏 교가를 부를 때의 가슴벅차오름이란.......

한 잔 술에 순수한가슴 18살의 거침없음을 함께 하고, 노래 한 자락에 회갑을 맞이한 세월의 덧없음을 풀어내고,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변함없는 우정을 과시하고, 각자의 잔을 부딪치며 있는 힘껏 건배를 외치며 42년 전의 약속을 지켜낸 자신들을 대견해하고, 그렇게 우리는 오롯이 그들만의 리그를 마음껏 즐겼다.

제주도에서의 첫날을.....

 

“ A League of Their own”

악공과 가무를 함께 곁들여

수연을 하였습니다.

모여서 노닌 장인들이

갖춰진 둥근 평상에서

두 번절, 네 번절은 받지 않았지만

서로가 헌수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회갑이라고 흔들리면 안됩니까!

마음조차 세월은 아닐진대

벌거벗은 바람에

흔들리는 마음을 어찌합니까?

 

그리움 반, 아쉬움 반,

미련 반, 희망 반,

안아줄 사랑도 반은 남았습니다.

회갑이라고 꽃이 피면 안 됩니까!

 

세월조차 마음은 아닐진대

뜨거운 가슴에

때깔고운 꽃바람이 일렁입니다.

 

그리운 꽃에 머물다

가장 예쁜 빛깔을 보고,

가장 고운 향기를 맡고,

스스로 황홀하여 돌아서지 못합니다.

 

바람도 부는 걸 잊은 채

단잠 든 세월 숲에 노닐다 가는데

 

뭉클한 가슴 볼을 부비며

오늘 밤 어느 누구와 나,

별로 뜨는 꿈을 꾸면 안 됩니까?

 

추억안주에 취한

노 소년들에게

이제,

노년이라고 이러면 안 됩니까!“


둘째날, 여행지에서의 아침은 늘 이르다.

새벽까지의 여흥으로 고단한 몸과 달리 마음은 반짝임으로 채근한다.

우르르 몰려 배를 타고 도착한 비양도’. 날아온 섬이라는 뜻을 품고 있고 머물기보다는 지나가는 섬이라할 만큼 소박하고 아담한 모습이 눈길을 잡는다.

섬이 주는 단절감, 그 속에서 맛보는 독특한 신선함에 크게 심호흡을 해본다.

방파재 포장마차에 걸터 앉아 바다 바람을 맞으며, 그동안 해보고 싶었던 낮술에 취하기 시작했고, 고교시절 가끔하던 뻐끔담배도 나누며 일탈을 하였다.

협재해변을 마주하고 먹는 점심은 먹는 즐거움에 보는 즐거움이 더해져 몸과 마음이 든든해진다. 그리고 또 다른 설렘으로 제주도 서쪽으로 발걸음을 내딛는다. 특이한 모습으로 우뚝 솟은 산방산’. 그 안의 석굴에는 불상을 모시고 있어 찾는 이들의 간절함을 안아주는 너그러움으로 반긴다. 그 남쪽으로 이어지는 해안에서 만나는 용머리 해변’. 하멜이 표류해 도착한 곳으로 추정되는 이곳 바위가 용의 머리를 닮았다 해서 붙여진 만큼 얼마만큼 닮았는지 자꾸 확인해보고 싶어진다.

제주도와는 남다른 인연으로 이제는 낯익음과 반가움이 앞서는 곳으로 자리 잡았지만 아직도 정상에 오르지 못한 한라산그래도, 보는 것만으로도 좋다. 변함없이 그 자리에 서서 오는 이들을 품어주는, 설문대할망의 숨결로 삶의 가치를 깨닫게 해주는 넉넉함과 든든함을 품어본다.

둘째 날, 역시 같은 수순으로 단도리를 하고 저녁은 제주도에 오면 꼭 먹어야 한다는 흑돼지로, 거기에 판을 벌려 나름의 파티를 열어 우리는 무장해제를 하고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먹고 마시는데 전념했다.

정말이지 이렇게 잘 놀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버스를 타고 오르내릴 때마다 행여나 하는 마음으로 인원체크를 하고, 잠자리에 들 때도 멋모르는 일탈의 염려로 일일이 눈을 맞추고. 이런 게 바로 수학여행의 진득한 맛이리라. 그렇게. 그렇게 제주도 푸른밤에 취해 둘째 날을 보내고.

셋째 날, 마지막이라는 말이 주는 어감처럼 아쉬움이 발목을 잡는다. 그래서 이 날은 팀별여행으로 아쉬움을 달래기로 했다, 바다낚시, 골프, 뚜벅이 둘레길. 한라산으로 나누어 각자 원하는 즐거움을 얻는 시간으로. 그 후에는 제주 시내에 모여 이호테우해변에서 근사한 회 정식으로 제주의 풍미를 마음껏 즐기며 대미를 장식했다.

눈앞으로 펼쳐진 해변에는 검은색을 품은 모래와 자갈이 드러나 있고, 길목에는 아카시아 숲이, 모래사장 뒤에는 소나무 숲이 병풍처럼 늘어서 있는 모습에 마음이 반짝인다. 입안에서 살살 녹는 회와 이호테우해변의 멋들어진 풍광을 담은 한라산 잔술을 나누며 42년 전에도, 그 후에도, 지금에도 뻐근하게 깨닫는 순간의 소중함을 가슴에 품었다.


어쩌면 우리의 지난날은 미련의 연속이었는지도 모른다. 최선을 다함으로써 삶을 관통할 수 있다고 믿으며 내가 세상의 주인인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나는 세상의 아주 작은 한 부분이고 연약한 한 사람일 뿐이었다. 이제야 깨닫는다.

세상으로부터 부림을 당하고 강함에 휘둘러도 지금을 보내고 내일을 기다리는, 이렇게 사는 게 보통의 일상이라는 것을. 그 보통의 일상이 소중하다는 것도. 그 일상에 우리만의 특별함을 담아본다.

그렇게 23일의 푸근했던 여정을 끝내고 한라산을 뒤로하고 돌아갈 비행기에 오르며 우리는 풍운아 18살의 거침없음에서 회갑을 맞이한 61세의 진중함으로 돌아와 있었다.

무엇이든 해 낼 수 있는 반짝이는 눈빛도.

조금 늦은 42년 전의 약속,

추억 만들기 수학여행의 모든 것을 가슴에 품고........

떠나라 낯선곳으로

그대 하루하루의

낡은 반복으로부터...“




                                                                          

                                                         2.  복사꽃 바람이 분다.

 

다녀오리다.“

더운데 조심히 다녀요. 그리고.......”

알았어요, 술 적당히 마시리라.”

아내의 말이 길어질 것 같아 나는 미리 대답을 하고는 현관을 나섰다. 그런 나를 바라보는 아내의 어이없어하는 표정은 이내 웃음으로 답을 한다.

밖으로 나오니 한 여름의 강렬한 햇빛이 바람도 잠재운 듯 후끈한 열기로 몇 걸음 걷지 않았는데도 등줄기로 땀이 흐른다. 그래도 좋다. 나는 큰 걸음으로 아파트를 벗어나 터미널로 향했다.

걸을 때마다 어깨에 멘 백팩의 무게감은 오롯이 땀으로 전해져왔지만 그래도 좋았다. 반면 휴대폰 밴드에서는 친구들 목소리가 툭툭 튀어 오른다. 자신을 알리고 서로를 확인하느라 바빴다. 다른 때 같았으면 나도 한 자리 했을 것이다. 다만 오늘은 친구들의 이야기를 그저 듣기만 할 뿐, 끼어들지 않는다. 행여 지금 이순간의 설렘을 흩어질까 하는 염려로.

버스에 오른 나는 창가 쪽 의자에 몸을 맡기고는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것들을 눈길로 따랐다. 어디론가 향하는 이들, 질서정연한 도로위의 차들, 초록빛으로 한껏 몸을 부풀린 나무들, 횡단보도에 서 있는 한 무리의 학생들....... 그리고 떠오른다. 열여덟 까까머리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복사꽃 김 선생님의 웃음이.

 

김 선생님은 고등학교 재학 당시 담임선생님이자 국어선생님이셨다. 스승으로서 가르침에 대한 열정이 넘치는 서른 살 미혼으로, 앳된 웃음은 선생님이라기 보다는 형님 같은 친근함으로 다가왔다. 거기에 우리와는 띠 동갑으로 같은 돼지띠라는 공통점은 무엇이든 이해해주리라는 동질감으로, 그러니까 선생님은 한창 무서울 것 없는 까까머리 무법자들에게 든든함으로 함께 했다. 특히 대학이 마치 인생의 최대 목표인 것처럼 여기고 영어, 수학에 매달리던 우리들에게 틈만 나면 국어의 중요함을 일깨워주기도 하고 마음의 여유를 선물한다며 중저음의 목소리로 시를 읊어주기도 하고, 어쩌다 한 번은 수업 중에 풀이를 하다가 시험에 나온다며 별을 서너 개씩 달아 줄때면 점수에 목마른 우리들의 눈빛을 반짝이게 하고.......

복사꽃선생님의 별명이다.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고 한창 이름보다는 별명을 부르는 게 일상이었고 선생님 고향이 충주로 과수원을 하는데 복숭아를 키운다는 말씀에. 그리고 봄이면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복사꽃에 대한 장황한 설명에 누군가 붙인 별명이다. 꽃이라는 말 때문에 정작 당신은 마땅치 않아하셨지만 그 모습이 좋아 우리는 더 큰소리로 대신했다.

선생님께서는 여름 방학 동안에는 충주로 내려가셨다가 끝날 때쯤이면 올라오셨는데 항상 복숭아를 갖고 오셔서 우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아기 얼굴만한크기가 주는 놀라움, 속에서 베어난 듯한 연하디 연한 분홍빛의 감탄스러움, 씹을 때마다 아삭거리는 즐거움은 신선함 그 자체였다.

복숭아는 말이다. 내가 너희들한테 주는 보양식이다. 이게 피부에도 좋지만 활성산소가 있어서 피로회복에는 갑이다. . 참고로 내 피부가 이렇게 좋은 건 바로 이 복숭아 덕분이다. , 보양식 먹고 기운내서 공부하는 거

그러면 우리는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알레르기는 신경도 쓰지 않고 수돗가로 달려가 대충 닦은 후 단숨에 먹어치우곤 했다. 뽑기하듯 떨어져 나온 성근 씨는 혹시 자랄지도 모른다는 핑계로 운동장 바닥에 묻는 것으로.

그런 선생님은 나에게 또 다른 부분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대부분의 학교처럼 우리 학교도 학기 때마다 교지를 발간했는데 선생님 담당으로 우리들에게 교지에 실을 글을 과제로 내주시곤 했다. 우리 반 반장으로, 문학 부장으로 나름 글 쓰는 것도 좋아한 나는 심혈을 기울여 글을 써서 냈고 인정을 받아 교지를 발간 할 때마다 내 글은 앞자리에 실리곤 했다.

민아, 너는 필력이 참 좋다. 네 또래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나는 네 글을 볼 때마다 성큼해진다.“

진지한 선생님의 칭찬에 나 또한 자신감을 갖게 되었고 방학 때면 문학전집을 통째로 읽어 내려가는 무지막지한 충전으로 흡족해하곤 했다. 아마 그 때쯤이었던 것 같다. 그동안 품고 있던 소설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현실로 이루기 위해 대학교 때 국문학과를 선택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던 때가.

하지만 막상 원서를 쓸 때쯤 나는 국문학과 대신 경영학과를 선택해야했다. 물론 처음에는 나도 내 뜻을 고집했지만 당시만 해도 작가보다는 글쟁이라는 말이 익숙할 만큼 현실에서는 환영받지 못할 꿈으로 식구들의 반대는 생각보다 심했다. 그럴수록 나 또한 막무가내였지만 어머니가 나 때문에 쓰러져 병원에 입원하면서 한 풀 꺾이게 되고, 혼자 힘으로 자식들을 보며 살아온 강인함이 무너지는 모습에 숨을 고르게 되고, 어머니가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오셨을 때는 대학교의 경영학과에서 수업을 듣고 있었다.

그 후로 나는 선생님의 기대를 저버렸다는 죄송스러움과 믿음에 대한 배신감으로 뒤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나아갔다. 간간히 들리는 선생님의 소식도 애써 외면한 채.

나는 원래 손에 들고 다니는 것이 귀찮아 비가 온다는 예보에도 우산을 챙겨가는 것조차 무시한다. 하지만 길거리나 시장에서 복숭아를 볼 때마다 나는 주저 없이 사먹음으로써 선생님의 그리움을 대신하곤 했다.

어느새 도착한 청주, 낯선 곳이 주는 쑥스러움도 잠깐 나는 주머니에서 메모지를 꺼내 주소를 확인하고는 택시 승강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내려앉았던 마음이 살짝 동한다. 도심을 벗어난 택시는 어느새 한가한 시골풍경을 보여주며 내달리고.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생각이 많아진다. 첫 인사는 어떻게 해야 할 지. 표정은 어떻게 지어야 할지. 혹시 외출이라도 하신 건 아닌지. 이렇게 무작정 찾아뵙는 게 무례한 것은 아닌지.......

지금도 기억난다. 작년 겨울 사은회 때 선생님을 뵈었을 때의 가슴 먹먹함을, 동창회 모임에서는 매년 12월 중 하루를 정해 해마다 사은회를 열어 선생님들을 모시고 송년회 겸 만남을 이어오고 있다. 처음에는 스무 분 정도 모이셨다고 하는데 지금은 열 분도 채 되지 않는다. 그리고 나도 퇴직한 후에야 동창회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어서 사은회도 몇 번 밖에 참석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복사꽃 선생님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내 가슴 속에 자리 잡고 있던 형님 같은 모습은 세월의 흐름으로 많이 변해 선뜻 알아보지 못했다. 반면 선생님은 단번에 나를 알아보는 게 아닌가?

민아. 녀석, 여전하구나.”

“.......”

하얗게 센 머리. 느릿한 걸음으로 다가와 나를 품으며 어깨를 다독이는, 익숙한 중저음의 목소리는 가슴을 타고 넘나들며 사정없이 두드렸다. 코끝이 싸아해지는 가 싶더니 눈앞이 어른거렸다.

선생님께서는 정년퇴직을 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부모님께서 하셨던 과수원에서 복숭아를 키운다고 하셨다.

그날 이후 나는 가끔 선생님과 통화를 하기도 하고 문자를 통해 소식을 주고 받는다. 그러다가 8월 초, 선생님으로부터 복숭아밭의 사진과 함께 주소를 보내주시고는 한 번 찾아오라는 문자를 남기셨고, 몇 번을 벼르다가 오늘 이렇게 찾게 된 것이다.

택시에서 내려 걷는 길은 부드러움으로 긴장된 마음을 풀어주었다. 얼마쯤 걸었을까? 눈앞으로 펼쳐진 복숭아나무들, 가지마다 노란 모자를 쓰고 있는 복숭아나무는 정겨운 웃음으로 걸음을 붙잡았다.

? 누군가 했더니 민이구나, , 연락도 없이 왔네. 허허. 그래 잘 왔다.”

부러 그냥 왔습니다. 좋은데요?”

그냥 말이 나왔다. 첫 안사에 대해 걱정했던 것조차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반가움으로 부여잡은 선생님의 손은 붉어진 힘줄에 햇볕에 그을려 투박했지만 건강함이 넘쳤다. 마치 복사꽃을 피워내고 그 자리에 탐스러운 복숭아를 맺은 것처럼.

늦은 점심을 먹고 우리는 복숭아밭이 보이는 자리에 앉아 만만치 않은 세상을 안주 삼아 술잔을 주고받았다.

나는 너 만큼은 정해진 길을 가리라 했어. 교지에 네 글이 실릴 때마다 깜 짝 놀라곤 했었지. , 아무튼 너는 좀 특별했어. 나이에 맞지 않는 사고를 바탕으로 써내려간 글은 지금 읽어봐도 와 닿거든, 그래서 언젠가는 짜잔하 고 작가로 나타내라 믿었지 왜 글을 쓰지 않았던 거야? 그 능력이 아깝게.”

허허허. 능력은요. 제가 무슨.”

하긴. 그 때만 해도 먹고 사는 게 우선인 시대였지. 지금이라도 써 보는 게 어떠냐? 이제는 시간도 많은데. 오히려 그동안 경험이 쌓여 더 좋은 글 을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허허허허. 선생님,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이제는 첫 글을 쓰는 것부터 겁 이 나는 걸요, 자 한 잔 받으세요.”

선생님의 말씀에 머쓱해진 나는 술로 분위기를 바꿨다.

 

시골의 아침은 늘 이르다. 깨워주는 이도 없고, 굳이 일찍 일어나야 할 이유도 없는데 저절로 몸이 깨어난다. 휘적휘적 걸음을 옮겨 근처에 있는 호수에 나가 어스름한 새벽을 맞이한다. 잔잔한 수면 위로 너울지는 상념들. 책 상 한쪽에 자리 잡고 있는 빛바랜 교지를 지금껏 간직하고 있는 것은 그 때의 자신을 언젠가는 마주하고 싶은 바람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바람 한 겹이 심연으로 스며들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애둘러 돌아와 보니 선생님은 일꾼들과 함께 복숭아를 따느라 여념이 없으셨다. 나도 그 자리에 들어가 한 몫 한다. 아기 얼굴만한 복숭아를 조심스러운 손길로. 멀리서 봤던 것과는 달리 실한 복숭아는 금방 수북하게 쌓였고 어느새 등줄기로 땀이 흘러내렸다. 한 숨 쉬어가는 시간에 선생님은 그 중 튼실한 복숭아를 칼로 깎아 나에게 권했다. 보양식이라는 말씀도 잊지 않고.

모든 게 놀라웠다.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것들, 오래전에 했었던 것들을 지금 다시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신이 났고, 머릿속에 기억하고 있던 맛을 직접 맛볼 수 있어 자꾸 웃음이 나왔다. 이게 사람 사는 거라는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늦은 아침이었다. 또 한 겹 바람이 자잘한 웃음으로 가슴을 일렁인다.

 

그렇게 두 번째 날을 보내며. 나는 선생님께서 싸준 복숭아 그득한 봉지를 손에 들고 집으로 향했다. 다음의 만남을 약속하며,

바람이 분다. 그동안 품고 있었던 펜을 꺼내어본다. 그리고 첫 단어를 써본다. 복사꽃 바람으로.

 

 


이름: 정낙민
이메일: rmjung6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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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orean 2020.05.03 16:59
    수고 많으셨습니다.
    더욱 분발하시면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늘 건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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