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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일 죽을망정 허덕이며 사는 것이 인생이제."

  벌써 몇 번째 전화를 해보지만 발신음만 계속 들린다. '밭에 계시겠지' 하면서도 핸드폰도 발신음만 계속 울릴 뿐이니 걱정이 앞선다. 시어머니는 논밭에 다니면서도 늘 핸드폰을 품고 다니는 분이다. 팔순을 넘기면서부터 간다고 미리 전화를 하면 자식들 해먹일 걱정을 태산같이 하시니 도착할 무렵 전화를 하곤 한다. 노을이 온 들판을 감싸고 차장 밖으로 보이는 밭에는 사람이라곤 보이지 않는다. 이 시각까지 밭에 계실까 하는 의구심에 걱정만 쌓여갔다.

  동네 어귀에 들어서니 짙은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들판, 밭의 저 끄트머리에 어머니의 실루엣이 보인다. "어머니!" 하고 소리를 지르니 어깨까지 덮는 모자에 호미를 들고 길가 쪽으로 다가온다. "누구냐?" "세인이 엄마예요." "아이고, 뭔 일이여?" 걱정 반, 반가움 반이 목소리에 묻어난다. 길가 쪽으로 걸어오는 어머니의 걸음걸이가 허정허정하다. 헐렁한 몸뻬 바지로도 다리의 모양이 가려지지 않는다. 팔순 중반을 넘긴 어머니의 무릎과 무릎 사이는 해가 갈수록 벌어지고 있다. 나이 앞에 장사가 없다더니...

  어둠에도 어머니의 황톳빛 밭고랑은 신작로처럼 훤하다. 풀 한자락도 보이지 않는다. 고추, 참깨, 고구마 등은 어머니가 조석으로 흘린 진한 땀방울을 자랑이라도 하듯 가뭄에도 탐스럽다. 하늘에라도 오를 기세다. 모두 떠나버린 빈 둥지에 이들이 어머니의 자식이다. 그들이 힘의 원천이다. 그들이 없었던들 힘을 놓아버리고 몸은 점점 더 빨리 굳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이른 새벽에 나와서 일하고 한낮에는 집안일하고 다시 어둠이 온몸을 감기어 버릴 때까지 손이 다 닳도록 일을 한다. 온 삭신이 말을 안 들어도 엉덩이를 끌고 접어지지 않는 다리를 들어 옮기면서도 일을 멈추지 않는다.

  철이 없을 땐 친정부모님의 아프다고 앓는 소리가 싫었다. 그래서 몇 년 전까지도 이제는 제발 힘들게 일하지 말라고 성화를 부린 적이 적이 있다. 왜 그렇게 아프다며 일을 하냐고 짜증까지 냈었다. 그때 아버지는

"내일 죽을망정 허덕이며 사는 것이 인생이제."

하며 모자를 눌러 쓰고 방을 나갔다.

  나이를 먹어가니 일을 안 하면, 할 수 없으면 그게 더 힘들다는 사실을 이제는 안다. 배움도 짧은 아버지의 말씀이 어느 철학자가 말하는 "내일 비록 지구의 종말이 올지라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라는 말과 닿아 있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아니 그보다 더 훨씬 생활에서 체득한 값진 말씀이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이제는 천천히 일하시라 한다. 땀방울이 녹아든 농산물도 맛있다 맛있다 한다.

  나는 직장 다니며 큰아이를 키우고 둘째 낳을 무렵 직장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50이 넘어 다시 일을 하고 있다. 힘들기도 하지만 힘든 만큼 소중하기도 하다. 일은 나의 존재를 느끼게 해준다. 일이 없으면 안 해도 될 쓸데없는 걱정을 하기 마련이다. 몸도 쓰지 않으면 노화가 더 빨리 진행된다. 어머님은 몇 마지기 밭농사 덕분에 자식 걱정도 조금은 내려놓고 혼자라는 외로움도 털어낸다. 일은 평생의 동반자다.



  남편은 밭가에 세워 둔 리어카를 끌고 나는 어머니를 태운 차를 끌고 집으로 향했다. 흙먼지를 씻어내고는 어머님이 좋아하는 돈가스를 먹으러 가자니 빼지도 않고 우렁찬 목소리로 "가자." 하신다. 동네 신작로 가로등에는 벌써 불이 들어와 있다.


2. 감정의 물꼬

   어린 시절, 장마철 많은 비가 쏟아지는 날이면 아버지는 찢어진 비옷을 걸치고 급히 집을 나섰다. 삽을 들고 빗속에 논으로 향한 것이었다. 제 때에 물꼬를 터주지 않으면 논둑이 무너져 벼가 쓸려 내려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물꼬를 살피고 돌아온 아버지의 모습은 비옷은 입으나 마나 온몸에서는 빗줄기가 그대로 쏟아져 내렸다. 얼굴은 빗물로 반짝거렸고 입술은 파르스름했지만 평온해 보였다. 가족을 위해 긴박하게 할일을 마친 그는 처마 밑에 쪼그리고 앉아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그때의 그 모습이 아스라이 떠오른다.


   억제된 감정의 분출은 가족을 힘들게 한다. 그래서 감정이 범람, 폭발하기 전에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물꼬를 터 주어야 한다. 논둑이 무너져 내리기 전 물꼬를 터 주었던 아버지처럼. 쌓인 스트레스를 제때에 풀어 주지 않으면 마음의 둑이 무너지고 무너진 자리에 골이 패일 수 있다. 골이 패인 자리에는 상처와 후회가 남는다. 패인 골은 메우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 막게 될 수도 있다. 쌓인 스트레스는 둑이 무너지기 전에 풀어야 가족에게 불똥이 튀지 않는다.

 

  아이들을 키울 때 나는 잠으로 스트레스를 풀었다. 늦은 결혼에 노산으로 아이들 돌보기가 버거웠다. 아이들을 혼내서 마음이 아프거나 체력이 따라주지 않아 스트레스가 쌓일 때에는 잠을 잤다. 잠깐의 쪽잠을 자고 나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는 듯 평온이 찾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작은 아이가 친구 집에 놀러 갔다 왔다. 내가 물었다.

"친구 엄마는 뭐 하셨어?"

"응, 책을 읽고 계셨어."

"엄마는 뭐 하시냐고 하셔서 잔다고 했어. 엄마는 가끔 잘 자잖아"

아뿔싸, 딸아이의 눈에 엄마는 자주 잠을 자는 사람이었다. 딸아이의 어릴 적 기억에 잠을 자는 엄마로 남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 후론 아이들이 잠들기 전에 절대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스트레스 푸는 방법은 자연스레 달라졌다. 아이들로 인해 쌓인 스트레스는 남편에게 푸념을 하고 남편에게 쌓인 스트레스는 동생과 전화로 수다를 떨며 풀었다. 그러다 우연히 책에서 어느 문장과 마주쳤다. "자꾸 다른 사람에게 푸념하지 말라고. 내 감정의 쓰레기를 다른 사람에게 버리지 말라고." 아차 싶었다. 그 문장이 나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나는 나의 스트레스 푸는 방법이라는 미명하에 다른 사람에게 내 감정의 쓰레기를 버리고 있었다. 내 감정의 쓰레기를 받아 주는 사람이 힘들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비로소 깨달았다. 그 뒤로는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입을 다물기로 했다.

   말로, 수다로, 푸념으로 스트레스를 풀다가 입을 다물자 가슴이 답답하고 우울해졌다. 설상가상으로 남편이 새로운 일을 시작해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귀가 얇아 잘못 디딘 한 발을 뺄 수가 없어 두 발이, 온몸이 점점 깊이를 알 수 없는 수렁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수렁에 빠진 남편에게 던져줄 동아줄도 없고 방법은 같이 수렁에 빠지는 수밖에 없었다. 수렁에서 빠져나올 방법의 차이로 수없이 싸우기도 했다. 수렁에서 허우적거리며 여기저기 걸린 빚 때문에 오랫동안 살았던 집을 팔았다. 좁고 낡은 집으로 이사를 하고서 나의 스트레스는 범람하고 있었다. 언제 마음의 둑이 무너질지 몰랐다.

 

  빨리 비옷을 입고 아버지처럼 논으로 가야만 했다. 범람 직전에는 물꼬만 트는 게 아니라 과감하게 논둑을 잘라내어 물꼬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내 감정의 물꼬를 트는 방법은 넷플릭스의 드라마 <빨간 머리 앤>시즌1을 보는 걸로 시작됐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 속 주인공을 만화도 아니고 책도 아니고 실제 같은 인물로 만났다. 내가 상상해왔던 그대로의 앤의 외모와 에이번리의 자연, 초록 지붕집에 빠졌다. 앤을 보며 낭만을 찾았다. 앤을 좋아했던 학창시절의 나를 만났다. 힘이 났다. 일을 하고 돌아와 몇 편씩 한꺼번에 봤다. 소위 정주행을 했다. 한편만 더 한편만 더 하다가 거의 꼴딱 밤을 새우기도 했다. 집안일도 작파했다. 규칙적으로 자고 일어나는 50대 아줌마의 소소한 일탈이었다.

 

  이런 소소한 일이 범람 직전의 감정의 물꼬를 터 주어 쌓여만 가던 스트레스가 풀렸다. 그때부터 나의 스트레스 푸는 방법은 가끔씩 내가 좋아하는 취향의 드라마 보기가 되었다. <빨간 머리 앤>시즌1, 2, 3는 물론 다 봤다. 드라마는 오직 나에게 맞는 것을 골라야 한다. 그리고 혼자 봐야 한다. 식구들이 모두 잠든 밤이나 아무도 없는 날 혼자서 보는 것이다. 푹 빠져서 몇 시간을 보고 나면 나는 다른 나라에 여행이라도 다녀온 듯 스트레스가 풀린다. 글쓰기를 시작하면서부터는 작가나, 출판사 관련 드라마가 재미있다. <로맨스는 별책부록>, <멜로가 체질>, 최근에는 <식샤를 합시다>를 봤다.

 

  가끔씩 드라마를 몰아보고 나면 낭만이 찾아든다. 김정의 물꼬가 트이고 마음이 촉촉해지는 날이면 처마밑에 쪼그려 앉아 담배연기를 내뿜던 젊은 날의 아버지이 모습이 떠오른다. 그리곤 가슴이 따스해진다.



전난희

kidarisein@hanmail.net

010-8783-9939






  • profile
    korean 2020.09.01 18:50
    수고 많으셨습니다.
    더욱 분발하시면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늘 건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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