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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의 서정


   초여름의 싱그러운 오후에 금강 상류로 달리는 일행들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다. 숲길을 한참 따라가자 따가운 햇살과 한줄기바람에 굽이치는 산수가 아름다운 그림처럼 펼쳐진다. 강은 고이듯이 흐르고 급히 달리다가 다시 모여서 큰 바위를 휘감아 웅덩이를 만들더니 그 기세는 더욱 당당해진다. 하늘엔 새하얀 뭉게구름이 엉기듯이 피어나는데 대어의 꿈에 부풀어 모두들 들떠있는 분위기이다. 산세는 강을 따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멋들어지게 한 폭의 산수화를 그려놓았다. 이곳 금강 상류는 눈여겨 찾는 곳 중의 하나이다. 아직은 개발이나 오염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오지에 가깝지만 시간의 흐를수록 주변이 바뀌어가는 속도를 보면 그리 머지않았음이 느껴진다.

   금강을 닮은 매운탕민박집의 낯익은 부부가 반갑게 맞아주신다. 뒤질세라 얼른 장비를 차려 모퉁이를 돌아가니 바람이 불어오듯 물소리가 다가선다. 널찍하게 자리를 잡은 일행들은 곧바로 각자 자기위치를 찾아 캐스팅에 들어갔다. 나는 큰 바위를 감싸 안는 수초부근의 웅덩이를 향해 부채꼴로 릴을 세팅하였다. 마지막으로 물살이 세차게 흐르는 여울목엔 여울의 폭만큼 비스듬하게 가로질러 초크 망의 말뚝을 고정시켰다. 강 낚시의 준비가 거의 마무리되자 허벅지까지 차오르는 강의 가운데로 슬슬 움직이며 루어캐스팅을 서둘렀다. 다리를 감싸는 여울물소리가 정겨운 오후의 풍경이다.

   이곳엔 나의 신기록인 대어 상을 받은 곳이다. 한밤중에 잠시 눈을 붙이고 나가보니 낚싯대 하나가 저 멀리 수초까지 떠내려가 있었다. 천천히 끄집어내어보니 커다란 잉어 한 마리가 줄에 칭칭 감겨 있는 게 아닌가. 나의 의지와는 전혀 무관하게 얻은 행운이다. 상을 받기가 떳떳하지 못하다고 극구사양을 했지만 그날따라 별다른 수확도 없어서 그냥 상으로 받은 금반지 값의 두 배나 되는 뒤풀이를 한 추억이 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참으로 신기하게도 뜻하지 않은 이런 일들은 아무도 모르게 닥치는 것이다. 행운과 불운이라는 것도 사실 무미건조한 세상사에서 인간을 기준하여 만든 판단이 아닐까.

   시원한 물소리와 강바람을 타고 여기저기서 잔챙이를 건지는 함성이 들리지만 태양의 위치로 봐선 아직 이른 시간이다. 오후의 햇살은 잘 달구어져서 물결에 뜨겁게 반사된다. 시장 끼를 달래려고 모두들 민박집 마당에 모여서 얼큰한 탕으로 한 잔씩 걸치곤 작전을 짰다. 일몰까진 전원이 루어낚시로 공격하고 밤사이는 두 팀으로 나누어 웅덩이대어사냥을 하기로 하고 나는 새벽에 합류하기로 했다.

   물살이 거센 곳엔 짧은 릴의 루어캐스팅을 하면 주로 은어가 걸려들지만 드물게 강 준치나 쏘가리도 잡힌다. 고이거나 잔잔한 물의 깊은 곳에서는 좀 더 긴 릴낚시로 메기나 잉어와 붕어 등을 낚는다. 그리고 물소리가 구성진 얕은 경사여울목의 초크 망엔 물줄기를 거슬러 오르는 동자개, 피리, 쉬리 등과 같은 작은 종류의 예쁜 물고기들이 걸려든다. 아침 해뜨기 직전이나 저녁의 일몰시간이 가장 많이 잡히지만 곳곳마다 잘 잡히는 시간대가 다르다. 사뭇 기대가 커 오르는 것은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마찬가지 일게다.

   금강 상류의 풍경이 서서히 금빛으로 물들어가더니 순식간에 붉게 달아오른다. 손맛은 점점 긴장을 하고 월척을 놓친 비명소리가 가까운 주변산수와 잘 어우러진다. 허허 그것참, 세상사 쉬운 일이 어디 있나. 땅거미가 내려앉고 어둠에 덮일 무렵 물안개가 피어오른다. 멀리 숙소마당에 모닥불이 타오르자 모아둔 물고기중 예쁜 어린것은 살려 보내고 저녁을 먹으러 모였다. 주인내외의 부지런한 손놀림이 이어지고 구수한 밥 냄새와 칼칼한 매운탕향이 불가를 에워싼다. 가늘고 긴 꼬챙이에 끼운 고기도 익어가고 불에 비치는 빨간 얼굴들이 아까 본 금강의 붉은 수면을 닮았다. 행복한 미각 속에 오감이 교차한다.

   남은 고기는 모두 수족관에 넣어두니 마치 우리에 가두어둔 듯이 지척에서 나를 바라본다. 녀석들은 잡혀온 걸 알고 있을까? 왜 그토록 열광과 희열을 느끼면서 잡았을까? 그 행복해하던 시간들은 잠시 물러가고 녀석들을 마주 바라보기가 힘들어졌다. 강태공이 미끼도 없는 곧은 낚시 바늘을 걸쳐놓고 때를 기다리며 세월만 낚았다는 게 바로 이런 기분 때문이었나? 그래서 그는 주나라의 문왕이 찾아주어 큰 재목이 되지 않았는가. 같은 낚시지만 나와는 전혀 별개의 공상과 기다림이다. 또 한잔을 걸치면서 일행들의 즐거운 소음을 비켜나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속에서 혼자 사색에 잠겼다. 하나 둘 떠난 빈자리에 남아 술기운인지 뭇 생명에 대한 번뇌인지 술잔만 마주하였다.

   새벽 팀의 교대시간이지만 단잠에서 깨어나긴 아직 이른 시간이다. 손에 잡힐 것 같은 자욱한 안개가 지척에 가득하다. 산인지 물인지 구분이 안 되는 풍경을 어림짐작으로 머릿속에서 그려본다. 태고의 어둠과 정적이 지나고 카오스도 가라앉은 후에 자욱하게 피어나는 안개처럼 내 곁에 머물고 있다. 차근차근 릴을 세팅하며 잠에서 빠져나왔다. 웅덩이 건너에서 새벽커피향이 안개를 타고와 내 곁에 머문다. 내가 준비하는 사이 건너서도 뜨거운 모닝커피를 끓이나보다. 향기를 뒤따라온 명상도 머문다.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나는 왜 이토록 아름답고 기적과도 같은 운명을 맞이하는가? 참으로 궁금한 이 그림은 뜨거운 차 한 잔을 대할 때마다 떠오르는 단상이다.

   희미하게 낚싯줄이 움직이더니 보일락 말락 찌가 움직인다. 흔들림으로 보아 어린 녀석이 밤새 고픈 배를 달래려 일찌감치 입질을 하나보았다. 당겨서 놓아주었다. 다시금 내 마음은 차 한 잔의 여유로 고요하게 흐르는 강물위에서 그림처럼 쉬고 있다. 밑밥을 던져주기에 적당한 시간이지만 그냥 찻잔을 쥔 채 공상에만 매달려있다. 손맛을 보려면 새벽이 밝아오기 훨씬 전에 주어야 하는데 내가 좋아하는 이 정적을 깨뜨리기 싫어서 게으름만 피우고 있다. 매사에 거리낌이 없으면서도 이런 감상적인 분위기에선 한번 빠지면 이내 털고 일어나기가 쉽지 않다. 나만 이런 걸까.

주변이 조금씩 밝아오고 풍경은 안개에 가려있지만 실루엣처럼 윤곽은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새들의 울음소리가 서서히 합창을 한다. 벌써 벌레들이 일어났을까? 어디쯤인가 하고 둘러보니 강가로 길게 늘어선 미루나무만 열병하듯이 얼굴을 드러낸다. 어둠이 조금씩 벗겨지면서 산마루가 선명해진다. 서서히 걷히어가는 안개덩어리가 여기저기 무리지어 수면위에서 어슬렁거린다. 이에 맞추어 멀리서 큰물고기 몇 마리가 주둥이를 뻐끔거린다. 홀로 공상에 빠진 사이 밑밥시간이 늦어버렸다. 나의 게으름이 불러온 절반의 실패다.

   아침은 향기가 나는 깻묵과 옥수수가루를 반죽한 아기주먹밥이다. 강이 오염되므로 욕심을 자제하고 감질날 만큼만 주어야 한다. 아직은 물속지도가 그리 밝지 않아서 군데군데 수초의 모양과 분포를 가늠하여 릴과 부표위치를 고쳐주었다. 아침바람이 잔잔히 불어온다. 곧이어 여러 대의 장비가 교대로 움직이며 즐거운 소란을 부리기 시작하자 손아귀의 전율이 간간이 이어졌다. 아침 해가 고개를 내밀자 안개도 엷어지고 입질이 잠잠해 지더니 두레박도 제법 차올랐다. 주변이 투명하게 맑아지자 땀이며 비릿한 비늘의 잔향을 말끔히 씻어 내렸다.

   싱그러운 강가에 모인 모두의 얼굴들이 마치 물고기를 닮아있다. 뒤돌아보니 안개가 말끔히 사라진 아침의 금강이 더욱 힘차고 싱싱하게 흘러내린다. 전설을 간직한 채 그 옛날의 이야기를 그대로 담고 흐르면서 정다운 사연들을 들려준다. 한동안은 잘 지내겠지만 우리의 삶이 그러하듯이 또 지쳐오면 찾을 올게 뻔하다. 그러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삶의 새로운 생기가 일어날 것이다.

   장비를 모두 거두고 나니 무언가 남겨둔 듯이 아쉬움이 몰려온다. 강가의 아침은 우리 모두를 배웅하고 새로운 하루를 시작할 게다. 그러고 보면 매일 반복되는 삶의 한 부분으로 후회와 기대로 두근두근 설렌다. 마치 그리운 연인을 찾아가는 것 같은 마음의 서정처럼 언제나 가슴속에서 무언가 안개처럼 피어오르고 무심코 돌아서면 곧바로 그리워진다. 그래서인지 조용히 발길을 돌리는 모두의 가슴속에 또 한 장의 수채화를 그려놓았다.



성명 : 안 창식

E-mail : ahnacsdaum.net

전화 : 010-5558-5517





대나무친구


   나의 오랜 친구 중에 담양에 사는 학교동기가 있다. 그 먼 곳에서 어떻게 나하고 인연이 닿았는지는 무척 궁금하다. 하지만 반쯤 가려진 그의 인생을 일일이 캐낼 수도 없으려니와 얘기해 주지도 않는다. 다만 잊어버릴만하면 가끔 찾아보던 그의 집 울타리에 가득한 크고 작은 대광주리다발이 하늘을 찌르듯이 서있는 진풍경이 떠오른다. 게다가 마을과 뒷산전부가 울창한 대나무로 둘러싸인 풍경은 실로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저녁바람이 쏴아 하고 지나가면 마을전체에서 울려 퍼지는 댓잎 비비는 소리가 마치 천상의 빗소리인가 하는 환상에 젖게 하였다.

   그에게서 한 번 들려보라는 얘기를 나눈 것은 학창시절을 벗어나 가맣게 잊고 지내던 사회생활 중에서였다. 호들갑을 안 떠는 걸로 봐서 큰일은 아닐 성 싶은데 막상 물어봐도 곧바로 답이 안 나오는 성격이다. 그렇지만 그의 호의와 지나간 날들이 궁금하기도 해서 모처럼 회포나 풀 생각에 약속한날 호남 행에 몸을 실었다. 읍내에서 좀 떨어진 고즈넉한 시골마을이었다. 마중을 나온 그와 시골장터에 들르니 온통 대나무로 만든 생활 도구들로 뒤덮여있었다. 의아해하던 마음은 그의 마을 어귀에 도착하자 이내 밝혀졌다. 순간 ‘아! 이거로구나. 이럴 수가 있나.’ 그제야 지난날 그가 들려주던 대나무의 숨은 풍경들이 고스란히 모습을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대나무가 있어야할 곳곳마다 온천지가 누렇다.

   대나무는 사람의 수명을 닮았다고 한다. 평생에 한번 꽃을 피우는데 종류에 따라 다소 다르지만 삼십년, 육십년, 백년 또는 그 이상을 주기로 일대의 대숲이 동시에 개화하고 한꺼번에 죽는다. 오늘이 대나무의 혼령을 위로하는 기일로 마을가운데에 있는 커다란 당산나무 아래에서 혼령 제를 올린다. 새로 자라나서 가공품으로 쓰일 때까진 상당한 기간이 소요되므로 실로 마을의 우환이 아닐 수가 없다.

   왜 이런 자연의 섭리가 주어졌을까? 일부 과학적인 유추를 살펴보면 기생박테리아의 소멸주기설및 왕성한 생육으로 인해 소모된 지력회복 등을 유력시하고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증명이 안 된 학설에 불과하며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태초의 탄생 무렵에는 씨앗으로 번식했는지 모르겠지만 현재는 땅속줄기에서 죽순이 자라 세대를 이어간다. 따라서 번식에 무용지물이 된 수수하고 보잘것없이 하얀 대나무꽃들을 보면 이들의 반란이 아닐까하는 게 나의 외람된 소견이다. 분명 진화의 면에서 보면 우리가 모르는 또 다른 큰 뜻이 있겠지만 나름대로 환경에 적응한 유전인자로 말미암은 대나무의 숙명이라 할 수 있겠다.

   나는 대나무에 완전히 심취되어갔다. 이를 느낀 그는 제안을 하더니 다음날은 푸른 대나무 숲을 보기위해 주변의 나들이를 나섰다. 어딜 가나 대나무이며 대나무와 얽힌 사연도 많았다.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은 입구부터 푸른 댓잎이 반기는 계곡을 따라 오르니 양산보가 후년에 자연을 벗 삼아 제자들을 가르친 소쇄원이었다. 정자에 앉으니 소담한 풍경이 한눈에 가득 들어온다. 이것이 소위 차경효과를 노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다보이는 바깥풍경전체가 마치 자신의 마당처럼 느껴졌다. 가사문학의 고장답게 한 줄의 시라도 터져 나올 듯이 마음이 설레 온다. 담장안의 자연뿐만 아니라 바깥세상의 풍경까지도 일상으로 관망하기 위해 집터를 높은 곳에 하고 담장을 낮게 하였다. 바깥의 경관을 내부와 연결하여 마치 자신의 정원인양 바라보며 감상하면서 자연을 벗 삼았다. 물론 그 중심은 대나무였다. 조상들의 지혜로운 발상 앞에 저절로 차분하게 가라앉는 마음을 느낄 수가 있다.

   나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도 나를 보더니 싱긋이 웃는다. 내가 찾던 자연스러움과 소박한 모습이 바로 이 표정이다. 서로가 사회생활을 시작한지는 오래되지 않았지만 늘 마음 한구석엔 각박하게 쫓기면서 뭔가 순수한 것이라도 만날 것 같은 바람이 얼마나 많았던가. 오늘 그에게서 그를 둘러싼 대나무와 자연 등이 그동안의 피로를 말끔히 데려가는 느낌을 받았다. 그의 이토록 해맑은 것을 재확인하는 자리에서 맘속으로 조용히 ‘대나무친구’라고 불러보았다.

   내성적인 성격으로 매사에 소심한 그를 보노라면 대나무의 숙명 같은 미스터리한 장면이나 상황들을 자주 접한다. 다른 친구들이 생소한 행동을 하는 그에게 냉정하게 대해도 나는 거의 받아주는 편인데 그런 나를 잘 따랐다. 그를 항상 억누르고 있는 무언의 무언가가 작용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그와의 인연을 돌이켜보면 그를 찾아간 것은 운명과도 같은 어떤 힘이 아닐까 한다.

   그 운명적인 일은 학창시절로 거슬러간다. 지리시간이다. 그는 숙제를 못해 여기저기 기웃거렸으나 모두 외면을 당했다. ‘왜 지리시간은 다른 수업처럼 즐겁게 못하는 걸까? 모두 두려움에 전전긍긍하고만 있으니 언제까지 이럴 수는 없잖아. 오늘은 내가 나서보자.’하고 겨우 내가 베껴준 지도위에 나랑 똑같이 그림을 옮겨 그려 제출을 했는데 매의 눈을 가진 지리 선생에게 그만 들켜버렸다. 범인 물색에 들어가고 나는 파랗게 질린 채 자진해서 교단으로 나갔다. 빤한 질책을 당하고 그날 새로 산 푸른빛이 감도는 대나무 자의 세운 날로 정신없이 손바닥을 두들겨 맞았다. 끝내 고통을 참고 버티자 맞는 나도 선생도 지쳤다. 온몸이 푹 젖어왔다. 공포에 눌린 반 아이들 사이로 고개를 숙인 그가 보였다. 전대미문의 일이 벌어졌다. 감각을 잃어버린 손바닥이 검붉은 자주색으로 부어올라 손두께가 두 배나 되었다. 당연한 결과지만 그는 울상이 되었고 내 책가방을 챙겨서 우르르 빵집에 모였다.

   옆 반의 담임인 지리 선생은 우리들 사이에서 사나운 매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었다. 공부나 운동 등에서 한 번도 우리 반을 이겨보지 못하자 공공연히 우리에겐 더 심하게 으름장을 놓았다. 나는 숙제를 눈앞에 둔 그의 애절한 눈빛을 보았다. 아주 짧은 시간에 무수한 생각들이 폭풍처럼 지나갔다. 순간 다가올 결과가 보였지만 그를 대신해서 앞가림에 들어간 것이다. 늘 우리 반을 무시하는 협박에 지기가 너무 싫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공포의 체벌이 없는 화목한 수업을 간절히 바라는 무언의 항의 같은 마음이 앞섰던 것이다.

   갈피를 못 잡는 수업이 끝나고 교실을 나가시던 선생은 내게 후회하는 시선을 보냈었다. 그러고 나서 지리 선생의 체벌방식은 교정에서 사라졌다. 그날 이후 교내에서의 나의 위상과 우리 반 아이들의 우정 그리고 담임선생님의 인자하신 보살핌은 붕대 속에서 새까맣게 변색된 손바닥상처를 훈장으로 만들어주었다.

   바쁜 사회생활 속에서 어느 날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를 만나러 나가면서 가만히 회고해보니 즐겁고 힘겨운 날들의 희로애락이 마구 스쳐갔다.

   “반장, 너는 그때 왜 그랬니? 지금도 생각하면 너무 끔찍해.”

   “너랑 같은 마음이야 누군가는 해야지. 우리의 자존심이 아닐까?”

   “네가 꾹 참고 맞는 것을 보고 소극적인 내 인생이 죄다 바뀌었어.”

   “나도 네가 바뀌어 가는 걸 보고 무척 반가웠어. 그 말 하려고?”

   그가 고개를 끄덕인다. 가맣게 잊고 있었던 추억이 되살아났다. 그 말을 이제라도 하는 게 그에겐 미뤄온 숙제를 마저 끝내는 심정인가 보았다. 그의 얼굴이 마치 꿈을 꾸듯 편안하게 바뀌더니 다정하게 말을 꺼냈다.

   “내가 살던 고향에 같이 한 번 안 가볼래? 꽤 멀긴 하지만......”

   이번엔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의 회상이 교차하고 그의 얼굴이 밝아온다. 그게 대나무마을 친구와의 인연이었다. 내면을 처음으로 체험해본 사건이 지나간 후 나는 거듭 태어났다. 따라서 운명처럼 매사에 무슨 일에나 거리낌 없이 다가섰다. 무신론자인 내가 신의 존재를 받아들이듯이 자연이나 사람들을 보노라면 어떤 숙명과도 같은 기운이 내재되어 있음을 느낀다. 이것은 그가 마치 대나무의 숙명이라도 된 것처럼 내게로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성명 : 안 창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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