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기념관안 쪽에 자리잡은 어른걸음걸이로 족히 5,000보 가까이 늘어져 있는 단풍나무숲 구간과 일대를 두어 시간 동안 천천히 걷다 왔다. 막바지단풍들이 내려앉은 곳에는 짙은 낙엽향기와 포근함이 양탄자처럼 발끝에 닿는다. 그저 전시관에 역사책처럼 기록된 기록물들만 보다가 휴관일에 많은 곳을 둘러 볼 기회가 있었다.
전체부지 119만평 중 일부가 기념관으로 조성되어 있고 1982~87년 전 국민의 참여로 대한민국 모금사상 최고액인 약 600여억 원이 모아졌고 한 번의 화재로 동기와가 모두 소실되어 약 900억 원으로 초기의 기념관이 건립되었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과 안내는 교육팀장 김 박사가 설명은 해 줬어도 기억의 한계로 일부소실되고 머리에서 잠시 머물다 삭제되었다. 서울에서 온 친구들에게 서민음식이라고 하지만 내가 천안에서 첫 번째로 꼽는 최고의 맛집이다. 가끔 생각나고 먹고 싶은 칼국수 집은 천안중앙시장안에 있는 그 집뿐이다.
아픈 흑역사 - 조선총독부가 철거되면서 꼭대기의 구조물과 일부 부속石들만 독립기념관으로 옮겨와서 역사의 기록으로 자리하고 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동안 억압과 핍박으로 부터의 끊임없는 독립의 염원과 투쟁으로 상처투성이였던 민족의 한을 조금이나마 위로하고자 총독부의 맨 꼭대기구조물을 모든 사람들이 내려다 볼 수 있게 지면 아래로 움푹패인 구조로 옮겨 왔다고 했다.
<밀레니엄 숲을 가로 지른 통일염원의 백두대간 철길>
3량의 기관차와 객차는 철도청에서 기증한 것인데, 큰 덩치를 옮기느라 야밤에 경부고속도로를 이용하여 전투적으로 옮기면서 인력과 경비가 많이 소요됐다고 합니다.
<일송 김동삼선생의 옥중어록>
김동삼선생의 부인께서는 남편이 만주로 망명하자 두 아들을 데리고 그 길을 따랐지만. 20여 년 동안 남편을 만난 것은 단 두 번뿐이었는데, 선생께서 옥중에 계실 동안에도 면회를 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것이 남편과 조국을 위한 길이라 여겼기 때문이랍니다.
<기념관 외곽 곳곳에 놓인 독립투사어록비>
투사들의 어록을 새겨 놓은 어록비는 독립기념관에서는 장소만 제공하고 가족이나 자손들이 사비로 조성이 되었다고 합니다.
설명과 안내를 해준 김 박사는 아직도 많은 분들의 어록비가 자손들의 무관심 또는 재정적인 문제로 세워지지 못한 것에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쓸쓸한 단풍나무 한그루.
홀로 남아 있기에 지나는 이의 눈길을 독차지하고 있습니다.
이화학당 재학 중 태극기를 만들고 서울에서 3.1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이화학당은 임시휴교령이 내려지고 유관순은 고향으로 돌아와 3천여 명의 군중을 설득하고 모아서 아우내만세운동을 주도하셨답니다.
현장에서 두 부모님께서 돌아가셨으나 당시 169cm의 키였던 유관순은 부모님의 시신을 업고 저항하다 모진 고문을 받으며, 공주교도소에서 서대문형무소로 이관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옥사하였다고 전해지나, 기록에서는 타살로 되어 있다고 한다.
가족을 모두 잃고 옥중에서 오빠와 단 한번 만남이 가족과의 마지막이별이 되었고 18세의 일기로 순직하셨다.
<유관순열사의 생가방문>
‘처칠, 장제스, 루즈벨트‘ 3국 대표들은 카이로회담합의문중 마지막 조항에 일본으로부터 노예보다 못한 삶을 살면서 끊임없는 저항과 투쟁의 독립의지를 이어오는 대한민국을 일본으로부터 반드시 독립시킨다는 특별조항에 합의하였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민족의 자주성을 지키며 희생하신 분들의 큰 나라사랑, 민족 사랑을 잊지 말아야 할 것 같다.
민족의 자존을 지키고 끝까지 투쟁으로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들어 내신 독립투사 분들과 통일염원을 담은 단풍나무길 초입 통일 대종의 울림처럼 은은하게 민족의 온화함과 따뜻함이 퍼져 나가 민족이 하나 되는
서원이 이루어지는 그날을 기다려 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