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담

by 춘성 posted Feb 18,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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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덕담

 

 

새해에는 건강하고 공부 잘해야 한다.”

설날 때마다 세배를 드리게 되면, 어머니가 해주신 덕담이다. 그 때에는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조금도 알 수가 없었다. 아니 그런 덕담에 관심을 가질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당시에는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설날이 기다려지는 이유는 딱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이밥에 고깃국을 마음껏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평소에는 늘 배가 고팠다. 50년대 중반은 전쟁이 막 끝난 때이다. 모든 것이 망가져버린 상태였다. 그러니 60년대에 들어섰어도 모두가 가난하였다. 하루 세끼를 빼지 않고 먹을 수 있는 집은 부잣집이었다. 그러나 부잣집이라 하여 가난한 집과 크게 차이는 나지 않았다. 서로 도와가면 살아가던 시절이었다. 한 끼 굶는 것은 일상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설날은 달랐다. 설날이 되면 음식이 넘쳐났다. 우리 집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집들도 마찬가지였다. 떡이며 환과 그리고 부침개에 이르기까지 맛있는 음식이 넘쳐났다. 거기에다 인심은 어찌 그리도 후했는지, 지금도 그 때가 그리워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늘 배가 고파 있다가 설날이 되면 음식이 넘쳐나니, 얼마나 신이 나는 일이란 말인가? 다름으로는 새 옷을 얻어 입을 수 있었다. 설빔이라고 한다. 새 옷으로 정갈하게 가라 입는 이유는 조상님들에게 예의를 갖추기 위함이다. 그러나 그런 것에는 관심을 가지지 못하였다. 일 년 중 새 옷을 입을 수 있을 때는 명정 때뿐이다. 설과 추석이 바로 그 때이다. 그러니 어찌 설날을 기다리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정신이 온통 이 두 가지에 집중되어 있었으니, 다른 것에는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었다. 그러니 어머니가 들려주시는 덕담에 대해서는 더욱 그랬다. 마음이 음식에 가 있는데, 엄마의 덕담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그냥 한쪽 귀로 듣고 곧바로 다른 쪽 귀로 나가버렸다. 그러니 어찌 관심을 가질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런데 이제는 달라졌다.

이제 내가 어머니의 나이가 되었다. 세월이란 참으로 무상하다. 내가 그렇게 빨리 보내지 않았다. 아니 가지 못하도록 잡을 수만 있다면, 잡으려고 몸부림을 쳤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란 말인가? 가는 세월을 잡을 수 있는 능력이 나에게는 없었다. 세월이란 놈은 모든 것이 제 마음대로다. 가는 세월이 아쉬워 발을 동동거리고 있는 모습을 보고도 못 본 척 외면해버린다. 그리고 약이라도 올리려는지, 더욱 더 속도를 낸다. 그럴 때마다 절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열정이 넘치던 시절에는 더디 간다고 아우성을 쳤지만, 세월은 그런 소리에는 아예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제 마음대로 한눈을 팔면서 느릿느릿 갔다. 참으로 얄밉기만 하였다. 그래도 달리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러다니 세월은 또 다시 돌변하였다. 속도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참으로 불편한 존재인 것은 분명하다. 아무리 원망스러워도 감수할 수밖에 없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현실이니, 어쩌란 말인가? 이런 세월의 횡포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세월의 짓궂은 장난에 몸은 삭아졌고 머리는 백발로 변해버렸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다. 그렇게 어머니의 나이가 되고 말았다. 오랜 세월이 흐름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졌다. 동내의 어른들에게는 힘이 들어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도 세배를 드리려 다녔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라졌다. 이웃집 어른을 찾아 세배를 드리는 일은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세배를 하는 목적도 달라졌다. 세배를 하는 목적이 애매모호해졌다. 나 어렸을 때에는 어른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세배를 드렸다. 세뱃돈을 받기 위해서 세배를 하지 않았다. 세배를 하고 나서 세뱃돈을 받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러니 아예 세뱃돈 받는 것을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달라졌다. 세배를 하는 목적이 세뱃돈을 받는 것으로 변질되었다. 참으로 만감이 교차한다. 어찌 이리도 많이 변해버렸는지, 곤혹스럽기만 하다. 우리 민족의 정체성이 오천년 동안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 정신 때문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 물질만능주의에 젖어버렸는지, 안타깝기만 하다.

 

나의 관심사는 이제 덕담이 되었다.

내 자식들에게만은 세태에 물들지 않기를 바란다. 바른 정신으로 바른 길을 걸어가게 하고 싶다. 물론 덕담 한 마디로 그 것은 원하는 것이 무리인지도 모른다. 아니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도 안다. 그렇지만 덕담 한 마디가 옹달샘이 되기를 절실하게 원해본다. 옹달샘이 무엇인가? 옹달샘에 샘솟는 물의 양은 참으로 미미하다. 그러나 옹달샘이 주변의 물을 정화하는 능력은 참으로 놀랍기만 하다. 그 시작은 작지만 그 결과는 창대하다고 하지 않았는가? 덕담을 통해 사랑하는 아이들의 정신세계를 정화시킬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아이들의 정신세계가 밝아진다면 더 무엇을 원한단 말인가? 사랑하는 아이들의 영혼이 맑아진다면 그 것으로 충분하다. 그렇다면 덕담은 어떻게 해야 할까? 덕담은 길어서는 안 된다. 장황하게 늘어놓게 되면, 잔소리가 되고 만다. 덕담이 길어지게 되면, 이미 덕담이라고 말할 수 없게 되고 만다. 짧지만 의미가 응축되어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듣는 이의 가슴에 배어 들 수가 있다. 덕담에 감동을 받게 되면, 잊히지 않는다. 살아가면서 떠올릴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살아가는데 기준이 될 수도 있다. 이런 경지에 이르게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그렇게만 되어준다면 덕담은 옹달샘이 된 것이다. 덕담을 듣고 그 것을 명심하고서 살아가면서 실천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에게 전해지게 된다. 의도하지 않아도 시나브로 그리 영향을 받게 된다. 그렇게 그 주변이 밝아지게 되면, 우리 사회도 언제인가는 맑아질 수 있게 된다. 지금부터 고민하게 된다. 아이들이 세배를 할 때 무슨 덕담을 해야 할지 걱정이 된다. 열심히 강구하여 아이들의 앞날에 빛이 될 수 있는 덕담을 해주어야겠다.(春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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