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대가 무성하게 자리 잡은 이 장소는 예전의 웅장했던 위용을 떠나보내기 두려운 듯, 일렬로 늘어져있는 거대한 파이프를 내세워 세월의 흐름을 역행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파이프는 지난날 근방 생명체들의 중요한 서식지였던 호수의 물을 텅텅 비워냄으로서 호수의 웅장했던 위용을 갉아먹은 장본물(物)이었지요.
근처에 위치한 거대한 경작지에 물을 대기 위해 설치된 파이프로 인해서 어머니의 은혜처럼 무한한 기운을 발산해주던 호수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생명의 근원인 이 장소는 언제나 약삭빠르게 눈치를 보고 있던 갈색 도적들에게 정복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용서받지 못할 악행을 저지르고도 파이프가 무사히 이 장소에 남아있을 수 있는 까닭은 진심으로 지난날 자신의 과오를 뉘우쳤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죄를 호소했는지, 스스로 흘린 참회의 눈물에 의해 온몸에 녹이 슬어 문드러질 정도였습니다.
또한 호수도 파이프가 자신처럼 피해를 입은 존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호수의 물이 없어짐과 동시에 파이프 또한 존재의 이유와 역할이 사라진, 비운의 존재였으니까요.
그렇게 문명의 이기심으로 인해서 상처만 남은 둘은 힘없이 자연스러운 소멸만을 기다렸습니다.
그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을, 자유로운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이 자유로운 방랑자는 아무 예고 없이 이곳을 찾아왔습니다.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자유로운 분위기는 아마 그의 호리호리한 체격에서 나오는 듯 했습니다.
마르지는 않으면서도 필요한 근육으로만 다져진 그의 건장한 신체는 그가 언제든 떠나고 싶다는 마음만 먹으면 그를 재빠르게 이동시켜줄 수단이었습니다.
또한 그의 손에는 매우 투박한 굳은살들이 박혀 있어서 얼핏 보아도 그의 쉽지 않았던 인생을 얘기해주었고, 그로 인해서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더욱 신중해보였습니다.
그는 등장하자마자 파이프 위에 올라서더니 주변을 살펴보기 시작했는데, 그 시선이, 그 눈빛이 너무나 예리해서 ‘날카롭다’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해 보였습니다.
역시나 훗날 파이프의 고백에 의하면 그의 눈빛에 자신의 모든 것이 벗겨지는 듯한, 자신의 존재와 지난날의 과오를 모조리 꿰뚫어 보는 눈초리였다고 고했습니다.
그는 이 장소에 홀연히 떨어진 지배자처럼 모든 것을 분위기만으로(순전히 자유로운 분위기만으로!) 압제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사물들은 일제히 그의 시선을 두려워했고, 그에게 지배당하기를 원했습니다.
심지어 저 약삭빠른 갈대들까지 말입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을 이끈 것은 단 두 존재였고, 모두가 예상했다시피 호수와 파이프였습니다.
그는 파이프 위를 천천히 걸어 나가며 무심한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내뱉었습니다.
“온 바닥이 습기로 인해서 진흙투성이던데 네 덕분에 이동하기가 편하구나.”
또한 그는 호수가 있던 터를 향해 엎드리고는 마찬가지로 속삭였습니다.
“안타깝다, 넌 이곳에 꼭 필요한 존재임에도 널 해한 자들은 그것을 몰랐구나.”
그가 이곳에 와서 내뱉은 말이라고는 이 두 문장이 전부였습니다.
그리고는 그는 그가 풍기는 분위기에 걸맞게 어디론가 홀연히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가 거쳐 간 시간은 매우 짧았음에도 불구하고 호수와 파이프, 파이프와 호수에게 끼친 영향은 너무나 거대해서 그들의 삶을 대하는 태도를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이제 그들은 힘없이 소멸당할 날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그들은 어렵지만 다시 한 번 예전의 영광을 발현하기 위해 살아갑니다.
파이프는 자신의 눈물을 더 이상 참회의 용도가 아닌 만물의 근원이 되기 위해 힘쓰며, 호수 또한 파이프의 눈물을, 하늘의 빗물을, 대지의 이슬을 끌어 모으고 있습니다.
또한 오만하게 자신들의 힘으로만 해결하려 하지 않고, 근처 만물들에게도 도움을 청하기 시작했습니다.
온갖 동식물은 물론이거니와 자신들의 적인 갈대에게까지 말입니다.
그 곳은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호수와 파이프의 눈물겨운 이야기는 이쯤 그만해도 될 것 같습니다.
그들은 다시 아름답던, 생명체들의 서식지가 되었냐고요?
글쎄요, 결과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살아갈 목적이 생겼다는 점이, 생명의 근원이 다시금 맥동치기 시작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