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로라>

by 유성 posted May 20,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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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센 냉기가 사방팔방, 시도 때도 가리지 않고 불어온다.
그 거센 냉기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노라면 거대한 백색 악마가 그대를 집어 삼키리니.
한 순간도 방심하지 마라.
이곳은 신의 방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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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 사람들은 감히 넘보지 못할 이 거대한 산맥을 오랜 시간에 걸쳐 ‘신의 방벽’이라고 불렀다.
산맥 너머에서는 형형색색 가득한, 화려하면서도 인간을 홀리는 우아함을 갖춘 신들의 축제가 펼쳐졌으므로, 그 곳을 향한 호기심과 열정은 냉기와 백색 악마에 굴하지 않은 채, 세대에 걸쳐 핏줄에서 핏줄로 이어지고 있었다.
부족 사람들이 그 오랜 시간동안 냉기와 백색 악마에 굴하지 않을 수 있던 까닭은 그들이 두려워해야할 존재가 아닌, 선조들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꿈, 호기심, 그리고 정복하고 싶은 욕구를 방해하는 요소였기 때문이다.
그들의 욕구는 인간이라면 너무나 자연스러운, 태어나면서부터 누군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핏줄로부터 배우는 본능과 같았기 때문에, 떨쳐 내려야 떨쳐낼 수 없는 비단 운명과도 같았다.
물론 죽음이 다가온 순간에는 비단 운명이 무슨 소용일까 싶지만, 야속하게도 그 감정은 핏줄에서 핏줄로 이어지지 않는 감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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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권능에 도전할 준비를 마친 소년은 부족 사람들에게 작별을 고하며, 그들에게서 축복의 인사를 건네받는 것을 마지막으로 마을을 떠났다.
그의 어머니와 어린 형제, 누이들은 눈물을 참으며 그의 뒷모습에 신의 가호를 아니 신의 패배를 빌고 있었다.
그는 부족을 대표하여 이번 세대를 대표하는 신의 도전자가 된 것이다.
그의 선조와 그의 선조, 또한 그의 선조가 모두 실패한 도전을 꼭 성사시키겠다는 일념하나만으로 흔들리지 않는 결심을 가지고 한발, 한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의 뒷모습에서는 비장어린 각오뿐만이 아닌 깊은 한이 서린 핏줄의 맥동까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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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가 얼마 안 남았기에 방심한 것이 사고의 원인이었다.
또한 소년은 그간 훨씬 거칠고 더욱 잔인하기 짝이 없는 신의 공격들을 견뎌왔었기에 별거 아닌듯해 보이던 이번 공격에 방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 방심은 자만심에서 나온 것이 아닌,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기에 분하지만 자신을 탓할 수도 없는, 목표가 없는 분노를 자아냈다.
백색 악마의 균열이 소년의 하체를 끈질기게 잡아 당겼고, 결국 소년은 백색 악마에 굴복해 냉기의 공격을 직격으로 받을 수밖에 없었다.
소년의 시야가 점점 백색 기운으로 감돌기 시작한다.
그의 열정 넘치던 심장이, 뜨거운 핏줄이 몇 세대에 걸친, 이 한이 서린 도전의 실패를 예감하고는 꺼지기 전의 촛불처럼 모든 것을 불사르려는 듯, 그 어느 때보다 빠르고 거칠게 날뛰고 있다.
마치 자신의 흔적을 남기려는 듯이.
그러나 이 냉기와 백색 귀신,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주인인 신은 자신에게 도전을 내민 소시민을 가만두지 않고, 그의 흔적을 세상에서 지워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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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의 껍데기가 신의 축제 가운데 타오른다.
화형 속 연기가 꾸물꾸물 올라가 신의 방벽이라 불리는 그 어떠한 장애물보다 더 높게 떠오른다.
꼭대기에 다다른 연기는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그 형형색색 가득한 불꽃은, 영롱한 이 빛은 소년이 그의 선조들과 마찬가지로 이루지 못한 꿈을, 도전을, 본능을 표출하는 것이었다.
신의 축제는 있었으나, 이 불꽃은 신의 소유가 아니었다.
그의 어머니, 어린 형제 누이들은 이유를 모르는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부족 사람들은 이 불꽃을 보며, 다시금 그들 품에, 핏줄 속에 들끓는 본능을 자각한다.
자, 다음 세대의 도전자는 누가 될 것인가?
누가 끊지 못할 굴레의 제물이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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