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어린이집에 다니지 않을 때는 일주일에 한 번씩 문화센터에 갔다. 문화센터를 이용하는 사람은 대개 유모차를 끌고 오는 인근 아파트 주민이었고, 나는 아이를 차에 태워 오는 소수에 속했다. 아는 엄마는 하나도 없었다.
혼자라고 불편한 건 딱히 없었다. 문화센터의 수업은 소리 지르며 왁자지껄하게 놀아도 이상할 것 없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으니까. 하지만 한바탕 수업이 끝난 후 찾아오는 고요는 어색해서 견디기 힘들었다. 엄마들은 자기 아기와 물건을 챙겨 썰물처럼 빠져나갔고, 안겨있는 아기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세상에 혼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종일 혼자 아기를 돌보던 나에게 가끔 단비처럼 찾아오는 외출이었기에 더 외로웠는지 모른다.
어떤 방식으로라도 다가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옆에 있는 아기에게 괜히 장난감을 집어주거나, 그 아이 엄마가 들으라는 듯 대놓고 칭찬을 건넸다. 내 호의적인 제스처를 눈치채 주길 은근히 기대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간단한 눈인사나 감사 표시 이상의 대화는 성사되지 않았다. 이러다간 수업 회기가 다 끝나가도록 제대로 된 '아는 엄마' 하나를 만들지 못할 판이었다. 새 학년이 될 때마다 어떤 친구를 사귀어야 하고, 어떻게 친구를 사귀어야 할지 고민하던 학창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이 나이를 먹고도 이런 고민을 해야 하다니, 헛웃음이 나왔다.
수업이 끝난 뒤, 나는 누구에게라도 말을 건네 보기로 했다. 내 아이와 개월 수가 얼추 비슷해 보이는 한 남자아이의 엄마에게 다가갔다.
"아기가 요즘 낮잠을 잘 자나요?"
생각해보면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한참 아이가 낮잠을 잘 안 자서 고민일 때라, 누구에게라도 하소연도 하고 싶고, 조언도 듣고 싶은 마음에서 한 말이었다. 하지만 대화의 물꼬를 트면, 물 흐르듯 대화가 이어지리라 생각했던 내 예상은 정확히 빗나갔다.
"네. 우리 애는 정해진 시간에 항상 잘 자요."
똑 부러진 답변이 되돌아왔다. "그런데 그건 왜 물어보시죠?"라는 말이 이어져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단단한 말투였다.
"네, 그렇군요..."
뭐라도 계속 말해야 할 것 같았는데,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 애는요..."라고 시나리오대로 말하면 되는데, 거기서 말문이 막혀 버렸다. 착각일지 모르겠지만, 그 엄마의 얼굴 위에 냉담한 표정이 스쳐 지나간 걸 본 것 같았다. 그래서 더 움츠러들었다. 흐지부지 대화를 마무리한 나는 쥐구멍을 찾았다. 모자라도 쓰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머리 손질할 시간조차 아까워 아무렇게나 눌러쓴 모자였는데, 그 순간만큼은 모자 속의 공간이 안온한 은신처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모자는 투명인간 망토가 아니기에 몸 전체를 숨길 수 없었다. 모자는 그저 내 얼굴에 그늘만 드리울 뿐이었다.
관계를 맺는다는 건 항상 조심스러웠다. 한 걸음 다가갔다가 실패하면 도망갈 방법이 필요했다. 내게 도망의 수단은 모자였다. 나는 쇼핑몰에 들러 새 모자를 샀다. 화사한 살구색 모자였다. 전에 쓰던 시커먼 모자보다는 인상이 밝아 보였다. 모자의 색을 바꾼 것은 반쯤은 성공이었다. 모자 색이 바뀌어도, 그늘의 색이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봄은 모자의 살구색과 참 잘 어울렸다.
'계절'이를 처음 만난 건, 봄을 앞둔 계절의 한 지점, 동 주민센터에서 운영하는 작은 동네 도서관에서였다. 할 일이 없이 유모차를 밀며 동네를 돌아다니다 우연히 발견한 곳이었다. 도서관에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작은 사랑방이 있었는데, 유아용 그림책이 책장에 꽂혀 있고, 인형 뽑기 기계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는 싸구려 인형들이 잔뜩 놓여 있었다. 내 아이는 책보다 곰 인형을 안아주거나, 보일러 스위치를 껐다 켰다 하는 것에 관심이 더 많았다. 그렇게 아이와 단둘이 놀다 보면, 4시쯤 어린이집에서 하원한 아이들이 들어오곤 했는데, 계절이도 그중 하나였다.
계절이는 내 아이보다 한 살 위인 네 살 배기였다. 그녀는 수줍음이 많았고, 내 아이도 계절이만 만나면 덩달아 수줍어했다. 하나가 사랑방 안에 있으면, 다른 하나는 아예 안 들어오려고 했고, 겨우 하나가 사랑방 안에 들어오면, 하나는 엄마 품에 안겨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다. 서로 경계하는 건, 엄마들도 마찬가지였다. 같은 공간을 쓰게 된 건 서로 의도하지 않았던 일이기에 최대한 방해가 되지 않아야 했다. 무슨 책을 읽는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애써 못 들은 척했다. 공교롭게도 두 엄마는 모두 모자를 쓰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계속 힐긋거리며 봤다. 계절이가 토라져서 고집을 부릴 때, 아이의 몸을 자기 쪽으로 향하게 하고 눈을 맞추며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타이르던 계절이 엄마의 모습을. 그녀는 소리를 지르지 않고, 화를 내지도 않은 채 아이의 마음을 읽어주고 있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나만 훔쳐보고 있었던 게 아니라는 거였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당시 계절이 엄마도 내가 책 읽어주는 소리를 엿들으며 '저 엄마는 어쩜 저렇게 재밌게 책을 읽어줄까?'라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계속 의식하고 관찰하고 있었던 거였다.
그 후 도서관을 찾을 때마다 우리는 자주 마주쳤다. 서로가 구면인 것을 확인하는 눈빛이 오간 뒤, 가벼운 목례를 나눴다. 내심 반가웠지만, 대놓고 티를 내진 않았다. 하지만 곁눈질은 전보다 상당히 과감해졌다. 나는 얼른 계절이 가방에 큼지막하게 적힌 어린이집 이름을 읽었다. 문화센터에서의 실패가 떠올랐지만, 나는 또다시 용기를 내기로 했다. 그때보다 조금 더 용의주도하고, 그때보다 조금 더 깊숙한 질문으로 시작했다.
"아이가 000 어린이집 다니다 봐요? 저도 그 어린이집 원장님과 상담을 하고, 원장님이 좋으셔서 거기 보내려고 했었는데. 저희 아이도 올해 3월에 어린이집 들어가게 됐거든요."
"아, 그래요. 어디 들어가는데요?"
질문이 되돌아오는 건 좋은 징조였다. 덕분에 나는 대화를 이어나갈 용기를 얻었다.
"00 어린이집에요. 사립을 알아보고 마음의 결정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대기하고 있던 공립 어린이집이 됐다고 연락이 와서요."
"공립이 좋지요. 잘하셨어요."
"아직 우리 아이가 어려서 잘 적응할지 모르겠어요."
"몇 개월이지요?"
"어린이집 갈 때는 17개월이 되어요."
"우리 계절이도 그때쯤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했어요. 금방 적응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관계를 열 때 걱정을 털어놓고 시작하는 건 무의식적인 습관이었다. 이번에도 여지없이 그 레퍼토리를 풀었는데도, 계절이 엄마는 잘 받아주었다. 남의 하소연 듣는 것에 알레르기가 없는 상대를 만난다는 건, 일생의 행운이었다. 누군가의 사적 영역으로 훅 들어가는 위험과 누군가에게 날 것의 모습을 내보이는 모험을 끝낸 나에게, 그녀의 위로는 달콤한 보상처럼 느껴졌다.
이후 우리는 아파트 입구에서 마주쳤고, 우리가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드라마나 영화의 로맨스 플롯처럼 우리의 우연은 계속됐다. 어린이집 앞을 지날 때나, 횡단보도를 건널 때 우리는 또 마주쳤다. '아는 엄마'를 만나는 일이 이렇게 설레어도 되나 싶을 정도로, 나는 그녀와의 우연한 만남을 은근히 기대하게 되었다. 날씨는 금방 따뜻해지지 않았지만, 계절이를 만날 때마다 봄이 한층 가까워졌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3월이 되자, 아이는 어린이집을 다니기 시작했다. 아이가 새로운 환경에 소속되니, 엄마인 나도 덩달아 몸 담은 세상이 넓어졌다. 같은 반 아이의 엄마와 인사도 나누고, 자연스럽게 어울리기도 했다. 조금 순조로워진 느낌이었다. 계절이 엄마와 도서관에서 만나 어린이집 생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녀는 내 아이가 잘 적응할 줄 알았다고 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참 '안정적'으로 보였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녀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공기 위에 꾹꾹 눌러 적어놓은 듯한 '안정적'이라는 단어가 참 듣기 좋았다. 아이를 맡아 온종일 키울 때 내 상태는 별로 '안정적'이지 않았던 것 같은데, 아이는 '안정적'으로 보였다니 얼마나 다행인가.
"제가 요즘에 계절이 여름 옷을 정리하고 있는데, 불편하지 않으시면 계절이가 작아서 입지 못하는 옷들을 줘도 될까요?"
생각지 못한 제안에 나는 깜짝 놀랐다. 매사에 조심스러워 보이던 그녀가 내 앞에 한발 성큼 다가온 것을 느꼈다.
"네. 주시면 좋죠!"
"남의 옷 받는 거 좀 그렇게 생각하는 분도 계셔서요. 부담스러우시면 안 받아도 괜찮아요."
"아니에요. 저 옷 물려받는 거 불편하게 생각 안 해요!"
심사숙고해서 꺼낸 제안 같아서, 나는 최대한 밝은 대답으로 상대를 안심시켰다. 사실, 입던 옷을 물려주는 건 서로 거리낄 것 없는 사이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아무리 비싸게 구입했던 옷일지라도 세월의 흔적이 있을 수 있고, 아무리 깨끗하게 입었다 할지라도 아기 옷엔 얼룩이 남으니까. "이런 옷을 줘도 될까?"라는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는 가까운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네. 그럼 제가 연락처라도 알려 드릴까요?"
"아뇨.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되고요."
그녀는 머뭇거리고 있었다. 어떻게 옷을 전달하는 것이 가장 폐가 되지 않는 방식인지에 대해 고민하는 것 같았다.
"아, 죄송해요. 그럼 또 도서관에서 뵈면 다시 얘기하도록 해요. 저 주신다고 급하게 옷 정리하시지 마시고요. 천천히 주셔도 되고, 못 주게 되셔도 괜찮고요."
나는 그녀의 속도를 존중하고 싶었다. 다시 만날 기약 없이 헤어진 후에 나는 그녀가 준다던 그 옷에 대해 완전히 잊어버렸다. 그리고 며칠 뒤, 나는 택배 보관실에서 산타할아버지의 선물 꾸러미 같은 것을 발견했다. 거기에는 우리 집 호수와 간단한 메시지가 적힌 메모가 붙어있었고, 안쪽에는 계절이 엄마가 보낸 옷과 신발이 가득 들어 있었다. 당분간 옷과 신발을 사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한 양이었다. 이런 깜짝 선물을 받은 게 얼마 만인지. 나는 연애를 시작할 때처럼 가슴이 콩닥거렸다. 메모에 연락처가 적혀 있지 않다는 사실,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 해도 당장 할 방법이 없다는 사실은 상황을 더 드라마틱하게 만들었다.
얼마 안 있어 나는 태국 여행에 다녀왔다. 그리고 태국에 가면 누구나 사 온다는 향기 나는 과일 비누를 나도 역시 사 왔다. 나는 선물용으로 두 개씩 포장된 핸드크림과 과일 비누를 작은 봉투에 넣어, 도서관을 향했다. 우연히 마주치면 주고, 마주치지 않으면 다음에 주어야지. 그리고 그렇게 가볍게 마음먹고 도서관 문을 열었는데, 여지없이 그곳엔 운명처럼 그녀가 있었다. 나는 준비한 선물을 내밀었고,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때 내 아이는 계절이가 물려준 빨간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날 서로의 전화번호를 교환했다. 이젠 우연에 기대지 않고도 서로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누군가 한쪽이라도 휘어지지 않으면 도무지 가까워지지 않는 사람 사이의 평행선에서 기꺼이 휘어지기로 결심한 건 참 잘한 일이었다. 아마 계절이 엄마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후에 나는 선뜻 그녀를 집에 초대해서 저녁을 대접했다. 모두를 차에 태우고 어린이대공원에 다녀오기도 했다. 늘 혼자 가던 동네 커피숍에도 같이 가고, 유모차를 밀며 둑길도 산책했다. 도서관도 가고, 마트도 가고, 놀이터도 갔다.
그러는 동안 봄이 지나갔다. 그 계절에 내가 만난 건 계절이 엄마뿐만이 아니었다. 고등학생 때 친구였던 엄마, 대학생 때 친구였던 엄마, 직장 동료였던 엄마, 조리원 동기였던 엄마, 해님이의 어린이집 친구 엄마를 만났다. 모두 각자의 고민을 안고 가족이란 섬이 되어 떠다니고 있었다. 모두 같은 종류의 섬이라는 걸 알기에, 이젠 먼저 연락하는 게 어색하지 않았다. 마음 먹기에 따라 혼자보다 함께가 더 편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사교적인 계절이었다.
지난번에는 특별히 살 것도 없는데 계절이 엄마와 동네 시장 골목을 함께 걸었다. 계절이는 늘 그랬었다는 듯, 화분 가게 앞에 쪼그려 앉았다. 거기엔 작은 미모사 화분이 있었는데, 계절이가 살짝 건드리니 작은 잎들이 주먹을 쥐는 손가락처럼 살며시 오므라들었다. 얘기만 들었지, 나는 처음 보는 식물이었다.
"계절아, 다 만져보지 마. 다 오므라들면 동생이 만질 게 없잖아. 여기까지 딱 절반만 만져봐."
손사래를 치며 내 아이는 안 해봐도 괜찮다고 했지만, 계절이는 엄마 말을 참 잘 들었다. 계절이가 자리를 털고 일어난 그곳엔 절반은 잎을 움츠리고, 절반은 잎을 펼친 미모사가 남았다.
손으로 건드리면 자극을 느껴 잎을 움츠리는 미모사의 모습은 예전의 내 모습 같았다. 그때 나는 상처 받는 것이 두려워 상처 받기도 전에 미모사처럼 잎을 떨구곤 했다. 한 걸음 다가갔다가 열 걸음 후퇴할 때도 많았다. 다른 사람들도 이미 눈치챘을 거였다. 모자 속에 누군가가 접근하는 것을 경계하는, 조금 예민한 사람이 들어있다는 걸. 금방이라도 숨거나 달아날 태세를 하고 있는 사람에게 먼저 다가올 사람은 없었다. 나는 아무에게도 활짝 열지 않았고, 그 문을 열 어떤 힌트도 주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섣불리 다가가서 그를 움츠러들게 하거나, 성급하게 다가온 누군가 때문에 우리가 움츠러드는 이유는, 우리의 마음이 미모사처럼 섬세하기 때문일 거라고. 그리고 서로의 마음이 미모사와 같음을 잊지만 않는다면, 누구에게도 쉽게 상처 주지 않을 거라고. 만져도 모든 것을 조심스럽고 정성스럽게 만질 것이기 때문이다. 계절이 엄마를 만나면서 알게 됐다. 더뎌서 답답할지라도, 용기 내어 천천히 다가온 마음은 사람을 얼마나 깊게 물들게 하는지를. 서로의 마음을 소중히 여기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서투름이라면 얼마든지 많이 서툴러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봄이 찾아와야 피어나는 꽃처럼, 모든 만남에도 때가 있는 것 같다. 똑같은 바람이 꽃잎의 속살을 건드려도, 그것이 겨울에 부는 것인지, 봄에 부는 것인지에 따라 더 단단히 여밀 것인지 활짝 벌어져 피어날 것인지가 결정될 것이다. 바람과 꽃잎이 만나지 못하는 건, 바람의 탓도 꽃잎의 탓도 아니다. 그저 아직 때가 되지 않았을 뿐이다. 나는 여전히 모자를 쓰고 있지만, 이제는 느껴진다. 햇빛이 내 얼굴 전체를 훤히 비추고 있다는 걸. 이젠 누가 와서 얼굴을 들여다보더라도 더는 움츠러들지 않을 것이다. 이젠 나에게 여름이 올 차례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