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

by 강사슬 posted Feb 09,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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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일이 가까워진 가을 하늘 아래 펼쳐진 서울 도심의 야경은 내가 지난 30년간 봐왔던 것과는 판이하였다. 불과 3개월 전만 하더라도 음울하고 물기 없는 이 도시를 얼마나 비판하며 벗어나려 했는지를 떠올려보면 몽테뉴가 <수상록>에서 말한 ‘인간이란 가지각색이며 변하기 쉬운 존재’라는 말이 얼마나 통찰력이 있는 말이었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


3개월 전 일요일 저녁, 아침부터 시작되었던 복통 때문에 나는 응급실에서 배를 움켜쥐고 검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복통을 유발하는 범인이 누구인지 생각해봤다. 당시 나는 회사에서 주도적으로 맡았던 프로젝트들의 성과가 숫자로 나타나기 시작하던 상태였고, 회사에서 빠른 승진을 거듭하며 밝은 미래를 그리고 있었다. 하루 전 승진을 기념하기 위해 가졌던 회식 자리에서 맛있게 먹었던 참치가 뱃속에서 시샘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게 애꿎은 (마음속으로) 참치를 범인으로 지목하며 나는 검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의료진들에 의해 참치의 혐의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고, 그 대신 나는 상상도 못 했던 소식을 접해야만 했다.


*


“입원 준비하세요.” 

마지막으로 감기에 걸린 것은 8년 전이었고, 마지막으로 병원에 간 것은 그보다 더 오래되었다. 친구들 사이에서 ‘건강’을 상징하던 내가 입원을 해야 했고, 그 후 내가 지닌 모든 병에 대한 진단이 끝난 것은 1주일이 지나서였다. 그동안 수십 명의 의료진들이 이해하기 힘든 용어를 나열했지만 비교적 답은 명확했다.

심장과 뇌 수술이 필요하고, 수술을 받지 않으면 죽는다. 수술을 받으면 살 확률도 죽을 확률도 존재하는데, 살 게 되더라도 언어 능력을 상실하거나 두 다리를 쓰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간단하게 정리했지만, 내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다른 무엇보다 나를 혼란스럽게 한 것은 수술하더라도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말을 하지 못하거나 다리를 못 쓰게 되면 여생을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 가며 살아야 할 수도 있는데, 내 삶이 그 정도의 가치가 있는지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이미 원인을 알 수 없는 뇌출혈이 세 군데나 발생한 상태였고, 추가적인 뇌출혈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제거하기 위해서 머리를 밀고 두개골을 열어야 했고, 그 힘든 과정을 거친 후에도 말을 하지 못하거나 두 다리를 쓰지 못하거나 최악의 경우 둘 다 못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을 감수해 가면서까지 나는 수술을 받아야 할까? 차라리 깔끔하게 죽는 것이 낫지 않을까? 수술을 포기하고 의연한 죽음을 맞는 것도 삶을 훌륭하게 마무리하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


3개월이 지난 후 나는 (몇 가지 장애를 얻게 되었지만) 나를 치료해준 의료진들에게 입으로 소리 내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두 발로 걸어서 퇴원했다. 퇴원 후 바라본 서울의 야경은 이전의 경치와는 달랐다. 불과 3개월 전 내 목을 조르던 도시의 모습이 이제는 일종의 경이로움으로 다가왔다.

내 뺨과 콧등을 슬그머니 간지럽히는 가을바람부터 시작해서 그 바람에 하늘하늘 춤을 추며 나를 반기는 이름 모를 나무들과 꽃들이 반가웠고, 온몸을 따스하게 데워주는 아침 햇살과 칠흑의 하늘에서 밝게 미소를 지어 보이는 별과 달의 모습까지 영롱하게 다가왔다. 

서울 한복판에서도 대자연이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은 새삼스럽지만 참으로 놀라운 일이며, 이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바라보며 두 발로 서 있을 수 있는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다른 무엇보다 고맙고 놀라운 사실이다.

.먼지가 켜켜이 쌓인 도덕책에서나 볼 법한 진부한 표현이지만 스스로 느낀 것과 느끼지 못한 데서 오는 삶에 대한 태도가 반딧불과 번갯불의 차이만큼이나 크다는 사실을 나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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