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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15 14:29

<빈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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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나는 외조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안계신다.

외할머니는 내가 어릴적 대략 초등학생이었을 무렵 갑작스러운 뇌출혈로 돌아가셨다.

그 때 당시 엄마는 암 투병 중이었다.

갑작스럽게 외할머니께서 뇌출혈로 쓰러지셨다는 연락을 받고...

암 투병 중이셨던 엄마의 하늘은 무너져 버렸을 터다.

그 때의 난 너무 어렸다.

외할머니의 부고 소식에 어떠한 감정도 느끼지 못했을 정도로...

지금 생각해보면 나로서는 한번씩 외갓집에 갈 때면 외할머니께서는


"아이고~, 우리 강아지 왔어~? 할미가 우리 강아지 좋아하는 청국장 끓여놨어~"


항상 내가 좋아했던 청국장을 우리 가족이 외갓집에 내려갈 때면 늘 끓여두셨다.

그리고 다시 서울로 올라갈 때면 늘 내가 좋아하는 청국장을 챙겨주셨다.

외할머니는 소위 말하는 '부처'셨다.

늘상 화 한번 내신적이 없으셨고, 잔소리 한번 하신적이 없으셨다고 한다.

자식들에게 바라는 것 없이 늘상 그렇게 살아오셨다고 한다.

힘든시절 그렇게 5남매를 건실히 키워내셨다.

그리고 그 5남매는 건실히 자라서 다들 선생님으로 자리 잡았다.

지금도 가끔 외가댁에 놀러가면 어른들이 이런 말씀을 하신다.


"너 외할머니는 부처셨어. 외삼촌들이랑 니 이모랑 엄마한테 잔소리 한번을 안하시고...

외할아버지가 엄하셨어서 상대적으로 외할머니가 서글서글 하시다고 할 수 있겠지만,

니 외할머니는 상대적인게 아니라 그냥 절대적으로 부처님 소리 들으실 정도로 자식들한테 잘하셨으니까."


그렇다. 외할머니는 그런 분이셨다.

내가 기억하는 외할머니도 어릴 땐 잘 몰랐지만 크고나서 다시 생각해보면

내가 알고 있는 외할머니도 그런 분이셨다.

뭐라고 표현해야될지 잘 모르겠을 정도로...


뭐 어떤 조부모님께서 손주들을 안이뻐하시겠냐만은, 적어도 우리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께서는 남다르셨다고 자부할 수 있다.

외할아버지께서도 한국전쟁 당시 참전용사셨고, 그 후 경찰 관련 공무원까지 하셨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자식들에게 늘 엄하셨고, 칼 같으신 분이셨다고 한다.

그런데 그러신 분께서 손주인 나만 보면 무릎에 앉혀놓고 어찌나 밝게 웃으셨는지...

우리 가족들이 외갓집으로 내려갈 때면, 내가 온다는 소식에

꼭두새벽부터 일어나셔서 약수터를 갔다오셨다고 한다.

연세를 많이 드셨음에도 늘 매일 새벽에 동네 뒷산을 오르시며 약수터를 다니셨고, 운동을 게을리 하지 않으셨다.

그래서인지 연세에 비해 너무도 건강하셨다. 풍채도 좋으셨고.

내가 기억하는 외할아버지는 그랬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외할머니가 쓰러지셨다.

당시 암 투병 중이셨던 우리 엄마는 외할머니가 쓰러졌다는 소식에 더 힘들어하실 수 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못하시고 침대에 누워만 계셨던 엄마다.

학교를 다녀오면 안방에서 엄마가 흐느끼는 목소리가 귀에 아직도 선하다...

매일 같이 흐느끼고 계셨다.

엄마의 베게는 눈물로 항상 젖어있었다.


며칠이 지나고 외할머니가 결국 뇌출혈로 돌아가셨다는 연락이 집으로 도착했다.

믿기지 않았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니...

아니나 다를까 엄마는 그 아픈 몸을 이끌고 침상에서 일어나셔서는 당장 외갓집으로 가겠다고 하시더라.

나는 멋모르고 철이 없었다.

나도 쫓아가겠다고 했다.

외갓집에 가면 학교를 가지 않아도 되니까 그 생각에 나도 가고 싶다고 했다.

그러자 아빠가 나를 혼내시면서 너는 이곳에서 학교를 다녀와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윽고 나는 포기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덧 나는 중항생이 되었다.

중학생이 되어 오랜만에 내려간 외갓집에서는 뜻밖의 소식을 알게되었다.

외할아버지가 살고 계시던 큰 집을 파셨다고 한다.

그리고 외할아버지께서는 치매로 인해 요양원으로 들어가셨다고 했다.

너무 충격적이었다.

늘상 가던 외갓집...

그리운 외할머니의 냄새, 청국장의 구수함까지도

이젠 더이상 느낄 수 없다고 생각하니 가슴 한켠이 왠지 허전해졌다.

거기에 외할아버지의 치매...


어른들은 외할아버지께서 치매에 걸리신 이유가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적적하셔서라고 추측하셨다.

표현은 서투르시지만 외할머니를 그만큼 그리워하셨고, 사랑하셨기에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그렇게 되신게 아닐까라고 말씀하시더라.

맞는 말 같았다.

그렇게 건강하시고 풍채 좋으셨던 외할아버지께서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 매일같이 하시던 운동도 안하시고, 집에 홀로 계시다보니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요양원에 들러 외할아버지를 뵈었는데 엄마와 이모는 기억도 못하시더라.

그와중에 막내 손자인 나는 초등학생 때의 나로 기억하셨다.

내가 오자마자 환하게 웃으시면서...

가슴이 아려왔다.

엄마는 내 뒤에서 몰래 눈물을 훔치고 계셨다.

그 때 외할아버지의 팔을 잡았을 때 외할아버지의 팔은 뼈만 앙상히 남아있었다.

또 한번 당황스러웠다.

내가 알고 있는, 기억하고 있는 외할아버지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뼈만 앙상히 남으신 치매에 걸린 노인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안타까움을 뒤로하고 다시 서울에 올라왔다.

엄마랑 아빠가 말씀하셨다.


"당분간 외갓집에 못 갈 것 같아서 요번에 외할아버지 계신 요양원까지 들른거야..."


그 말에 나는 머릿 속에 많은 생각들이 스쳐갔다.


'당분간이 아니라 사실은 이대로 쭉 외할아버지를 못 뵙는건가...?'


아니나 다를까, 역시 그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한번씩 외갓집에 가게 되어도 외할아버지를 뵐 기회는 없었다.

어른들께 외할아버지의 안부를 여쭈어봐도 그때마다 돌아온 답은

치매가 많이 심해지셨고, 합병증 또한 생기셔서 요양원에서 나오셔서 요양 병원에서 지내고 계시다 라는 말.

그렇게 또 세월이 흐르고 나는 성인이 되었다.

잊고 살려면 얼마든지 잊고 살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나는 잊지 않았다.

아니, 잊을 수가 없었다.

외할아버지의 그 쓸쓸한 표정을, 옴몸으로 외치고 계시던 외할아버지의 고독함을...

그 빈자리가 의미하는건 막내 손자에게는 큰 상처였다.


그러던 어느날...

2016년 여름이었다.

외할아버지가 위독하시다는 연락이 왔다.

당시 나는 대학교 방학 중이었기에, 온가족이 다 대전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외사촌 큰형이 일하고 있는 병원에 가게 되었다.

외할아버지는 1인 병실에서 여러가지 생명연장 기구들을 달고 가뿐 숨을 몰아쉬고 계셨다.

참혹했다.

이미 온몸에 지방이란 지방은 다 빠지고 글자 그대로 뼈와 가죽만 앙상히 남아버리셨더라.

입에는 호흡기를 쓰고 계셨고, 말씀은 커녕 숨쉬기도 힘들어보이셨다.

근육마저 다 빠져버린 외할아버지의 몸...

하체는 딱딱하게 굳어서 다리가 펴지질 않았고, 엉덩이와 등에는 욕창이 가득했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엄마는 병실 문을 나서실 수밖에 없었다.

내 마음도 이런데 우리 엄마 마음은 오죽했을까.

바로 쫓아나가서 엄마의 손을 붙잡았다.


"엄마...혼자 어디 가지마...답답하면 나랑 산책가자."


그렇게 나는 엄마의 손을 꼭 붙잡고 엄마가 혼절할까 염려되어 찬공기를 쐬러 나갔다.


"엄마, 엄마, 엄마..."


나는 무언가 엄마에게 위로라도 해드리고 싶었지만, 감히 내가 엄마한테 위로할 수 없었다.

뭐라고 위로해야할지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그저 엄마가 혼절하지 않게 손을 팔을 꼭 붙잡고 같이 걷는 것 말고는 내가 해드릴 수 있는게 없었다.

엄마와 산책을 끝내고 병실로 돌아왔다.

이제 막 도착한, 조카들과 외사촌 형제들이 와있었다.


이제 막 초등학교에 들어간 꼬맹이들은 외할아버지가 그저 편찮으신줄로만 알고

철 없이 외할아버지의 손을 잡으며 재롱을 피웠다.

그 모습을 보고 한편으로는


'그래...얘들아, 너네가 있어서 외할아버지가 지금까지 버티시는게 아닐까 싶다...

그렇게 건강하게만 자라라...'


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모습이 너무 언짢아서


"얘들아, 외할아버지 옆에서 떨어져. 외할아버지 지금 굉장히 힘드셔 아프시고. 삼촌이랑 나가서 놀자."


라는 말을 하며 조카들을 데리고 나왔다.

내가 데리고 나온 조카가 넷이었다.

한놈은 정말 말도 안듣고 철도 없는 남자아이

다른 한명은 태어나자마자 애기 때 교통사고로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외사촌 누나와 둘이 단촐하게 살고 있는 여자아이

나머지 두녀석은 외할아버지가  입원해 있는 병원에 의사로 근무하고 있는

외사촌 큰형의 아들 두놈.

형수님에게 눈인사를 하고 녀석들을 데리고 나왔다.


"얘들아 삼촌이랑 여기 한바퀴 돌면서 산책하자~ 삼촌이 맛있는거 사줄게!"


라고 애써 웃으며 멋모르고 신난 조카들을 달래보았다.

산책을 하다가 편의점에 들러 조카들에게 아이스크림 하나씩을 사주었다.


"맛있어 얘들아?"


"웅! 삼춘, 나 이거 좋아해!"


"흘리지 말고 천천히 먹어~ 누가 안뺏어 먹는다~!"


그 아이스크림이 의미하는 것은

일종의 뇌물이었다.

조카들에겐 증조할아버지, 나에겐 외할아버지...

나의 외할아버지가, 너네들의 증조할아버지가 건강하시길 기도해달라는

그런 의미의 뇌물...


그렇게 아이들을 겨우 달랜 후 시간은 어느덧 밤이 되었다.

우리 가족은 일단 큰외삼촌 집으로 향하여 큰외삼촌 집에서 하룻밤 자게 되었다.


"OO아 오늘은 여기서 하루 자고 내일 다시 서울 올라갈거야. OO형이 그러는데 금방 안돌아가실거 같데..다행이야."


라고 엄마가 말씀하셨다.

희망이 보였다. 그런데 그 희망 이면에는...

외할아버지의 그림자가 짙게 깔리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마음에, 외할아버지가 생각나는 밤...

나는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아침이 되었고, 가족들이 모두 모여 아침 식사를 하는데 밥맛이 없더라.


"엄마, 저 그만 먹을래요. 밥 생각이 없어."


"왜...더 먹지.."


평소였다면 타박을 하시며 다 먹으라고 하셨을 엄마가

애써 내 마음을 알겠다는 듯 크게 뭐라고 안하시더라.



"엄마 저 잠깐 요 앞에 바람 좀 쐬고 올게요."


"어디가..?"


"잠깐요.."


그렇게 잠깐 바람을 쐬러 간다는 핑계를 대고 근처 공원을 한바퀴 돌며

주머니에 숨겨두었던 담배을 꺼내어 불을 붙였다.


'하아...'


깊은 한숨을 쉬며 나이에 안맞게 하늘이 꺼질세라 축 쳐진 채로 쓰디쓴 담배를 빨아 삼켰다.

그전부터 피고 있었던 담배였지만, 외갓집 식구들은 내가 담배를 피운다는걸 모르고 계셨기에

더욱 조심스러웠다.

몰래몰래 피지 않으면 피울 수 없었다.


'여기까지와서... 무슨 담배냐.. 이것만 피우고 들어가야겠다.'


그렇게 독한 담배를 한대 다 피우고 다시 돌아왔다.

부모님은 서울로 다시 올라갈 채비를 하고 계셨다.


"아 엄마, 내짐은 내가 챙길게요."


"그럴래? 그래라."


그렇게 짐을 챙겨서 서울로 다시 올라왔다.

며칠간 비워둔 집은 고요함과 적막만이 남아있었다.


"일단은 다들 일찌감찌 씻고 자도록 해요. 당장 내일이라도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가족들은 모두 말은 안하지만 이의는 없었다.

일찌감찌 순서대로 씻고 일찌감찌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

피곤한 몸을 겨우 이끌고 나와 가족들이 모여 아침밥을 먹고 있었다.

그런데, 엄마에게로 전화가 왔다.

발신자는 큰외삼촌.


"어 OO아, 나야. 너네 다시 내려와야되겠다..."


"오빠? 그게 무슨말이야? 아버지 다시 안좋아지신거야?"


"그게...돌아...가신거 같아.."


".....뭐...?"


그 순간 가족들 모두가 얼어붙었다.

당분간 돌아가시지 않을 것 같다던 외할아버지께서...

우리가 서울로 돌아온 다음날 바로 돌아가셨다니..

이게 무슨 청천벽력인가.


"알겠어 일단...언니랑 연락해서 다시 내려갈게..."


엄마는 애써 침착하려고 노력하셨다.


"엄마...외할아버지 안좋아지셨데..? 정말 돌아가신거야..?"


"......그런..거 같아.. 작은 외삼촌이 확인 하셨는데, 숨을 안쉬신데..."


'아아...올 것이 왔구나...외할아버지....'


그렇게 우리 가족은 대전에 다시 부랴부랴 내려갔다.

병원에 도착해서 갔을 때는 이미...

병상이 아닌 병원 옆 장례식장에 가족들이 모여있었다.

도착하자마자 보인 광경은 어른들의 옷이 모두 상복이었고,

우리 가족 또한 상복으로 갈아입어야 했다.

상복으로 갈아입고 나오니 외할아버지의 영정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실감이 안나더라.

3일장을 치루는 내내 나는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았다.


3일장이 끝난 다음 날 아침

영결식장에 온 가족이 모였다.

외할아버지의 관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영결식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어른들의 눈에서는 굵은 눈물과

흐느낌만이 영결식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상조회사에서 나온 직원이 영결식을 거행하였다.

영결식이 거행되자 나 또한 3일간 흘리지 않았던 눈물이,

실감나지 않았던 슬픔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아...아..!...하..할아버지...!!!"


엄마와 나는 서로를 부둥켜 안고 오열하였다.

영결식이 진행되는 30분간 쉬지도 않고 나는 오열하였다.

영결식을 끝내고 관을 들어 운구차량에 안치해야 하는데...

이 오열감을 어찌 참으리까...


한쪽 구석에서 외할아버지의 관을 받쳤다.

그런데 어찌나 관이 가볍던지...

그 가벼움에 마음이 무거워져서...

나는 더 오열할 수 밖에 없더라.


시신 관을 운구차량에 안치시키고 유족 버스에 탑승하고서도

가족들은 다 진정되었는데

나홀로 오열하고 있었다.

그걸 옆에서 지켜보던 엄마는


"OO아, 니 앞에 휴지좀 줘"


엄마는 내 등을 쓰다듬으며 말 없이 내게 휴지를 건내주셨다.

휴지를 받고 나는 묘소에 도착할 때까지 한참을 더 오열했다.


묘소에 도착해보니 이미 시신 매장 전문 인부들이 도착해있었다.

나이는 대략 60~70대 노인들이었다.

어찌나 거친 사람들이던지... 외할아버지의 바로 옆자리에 외할머니가 묻혀계시건만,

그들은 외할머니의 묫자리 위에 중장비(포크레인)을 버젓이 세워두었더라.

그걸 보자마자 나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니 저기요!!! 아저씨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하시는데요?

유족들 다보는데 묫자리 위에 포크레인 올려두고 그앞에서 욕지꺼리 하시면서 담배 피고 계시고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빨리 안치워요?!"


내가 분노를 쏟아내자 어른들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였다.

왜냐하면 인부들이 모두 외할아버지가 살아생전 친하게 지내셨던 어른들이셨기 때문이다.

감히 그런분들께 외갓집 어른들은 뭐라고 한마디 할 용기가 나지 않으셨던게지.

그걸 멋모르는 막내 손자가 했으니... 놀라실만도 했다.

그렇다고 나를 말리지는 않으시더라.

내가 역정을 내고 나서야 인부아저씨들이 눈치를 보며 주변정리를 하더라.

7월의 삼복더위 속에서 가족을은 모두 검은색 상복을 입고 뙤약볕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그들은 그런 유족들 앞에서 고인을 능멸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외할아버지의 시신을 묻고...

그 위에 흙이 덮여질 때 나는 또 한번 오열하였다...

더이상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를 볼 수 없다는 생각에...

마지막 오열을 하였다.


그렇게 시신을 묻고 가족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와 장례식에서 받은 부조금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계산적으로 그 돈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외할아버지께서 남기고 가신 유산이라고 생각하고

가족들은 모두 겸허히 그 돈을 세어나갔다.

정산이 마무리 되고, 큰외삼촌께서 나를 부르셨다.


"OO아, 이건 니몫이다. 요 며칠간 너도 고생 많이 했다.

어른들도 힘든데 너도 여기까지 쫓아와서 조카들 잘 보살펴주고 참 대견하다."


"아...이거..저 못받겠어요. 큰외삼촌 이 돈은 제가 받으면 안되는 돈이예요."


"괜찮아, 받어 인마..!"


"아...아...외할아버지 감사합니다."


내 손에는 흰 봉투가 쥐어져 있었다.

나에게는 돈을 받는 순간 정말로 외할아버지를 더는 볼 수 없다는 의미였다.


나는 지금도, 앞으로도 계속 외할아버지를, 외할머니를 기억하며 기릴 것이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마치면서~


두서 없이 생각나는대로 기억나는대로 써내려간 글이라 조금 지저분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진중한 마음으로 써내려간 글이오니 부디 겸허히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뜬금 없지만, 글이라는게 쓰면 쓸수록 나만의 필력이 늘어가는 것 같습니다.

아직은 표현력도 미숙하고, 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많지만

그게 제 필력인게지요.

솔직하고 담백하고, 담담하게 써내려가는 매력

이것이 제 필력인 것 같습니다.


긴글 읽어주신 분들께는 참 감사하단 말씀 드립니다.

  • profile
    뻘건눈의토끼 2018.01.15 17:06
    쾌락님! 너무나도 진심으로 쓴점이 맘에 들었습니다. 저희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는 2013년 2015년에 돌아가시고 제 아버지는 2016년 폐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사람의 인생은 유한 합니다. 하지만 다음세상에서 만나게 되시길 빌겠습니다. 토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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