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의 무대

by 얼룩무늬뱀 posted Apr 02,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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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의 무대




봄이 왔다. 날씨도 좋고 해서 주말에 등산을 다니고 있다. 등산은 재미있다. 러닝머신 위에서 텔레비전 화면을 보면서 달리는 것보단 시력에 좋을 테지. 강변에서 뛰는 것도 좋지만 역시 산 속에서 걷는 게 호흡기에 더 낫지 않을까? 다만 요즘은 황사가 너무 심해서 오히려 산에 가는 게 꺼려질 때도 있다. 바로 집 앞의 산 정상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황사가 심한 날엔 그냥 집에 있는 게 낫겠단 생각도 든다. 재미있는 건, 일단 산에 발을 들이면 황사가 심하다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는 것이다. 어떻게든 정상에 닿을 때까지 걸음을 돌리지 않는다. 등산을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정상에 닿기 전에 발걸음을 돌리는 사람은 보기 힘들다. 마치 산이 처음 태어났을 때부터 약속이라도 된 것처럼 입구부터 정상까지라는 루트를 충실히 따른다. 어째서 벤치 근처에서 발걸음을 돌리는 사람은 없을까?


 


한때 사이코드라마가 유행을 한 적이 있었다. 이 즉흥극은 관객들이 공연을 보는 것이 아니라 관객들이 무대 위에 올라가 주어진 조건에 맞춰 공연을 만드는 것이다. 놀랍게도 관객들은 공연이 끝날 때까지 충실히 조건에 따라 극을 완성시킨다. 우리 안엔 무언가 시작된 것이 있으면 그것을 망치지 않고 끝까지 이끌고 가려는 본능이 있는 모양이다. 산의 입구를 본 자는 정상이라는 목표에 매혹되고 연극의 시작에 발을 들인 자는 어떻게든 막이 내려가는 걸 봐야 직성이 풀리는 걸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이런 본능이 간혹 괴상한 광경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초등학교 시절의 어느 운동회가 그런 것이었다. 이유는 몰라도 운동회가 있는 날엔 반드시 아이들에게 단체 율동을 가르쳐서 학부모들 앞에서 춤을 추게 만드는 프로그램이 들어가 있었다. 하루는 운동회 막바지에 단체 율동을 하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음악은 끝나지 않고 춤은 계속되는데 우산을 씌워줄 사람도 없다. 그런데도 교사진은 음악을 멈추지 않고 춤추기를 계속하게 종용하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신 나간 짓이었다. 틀림없이 그 직후 학부모들의 항의가 빗발쳤으리라. 그러나 정작 그 당시엔 아무도 거기에 거역하지 않았다. 마치 춤추기를 멈추면 지구가 망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무도 건물 안으로 들어가거나 교사진에게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아마도 교사진과 학부모, 그리고 아이들 모두가 그 기묘한 본능에 이끌린 것이 아닐까.


원래대로라면 그 본능은 유익한 것이었을 터이다. 그 본능 덕에 우리는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조차 휴지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한번 정한 목표를 향한 열정을 잊지 않고 원래 꿈꾸던 것을 완성시키니까. 하지만 만물엔 양면이 있지 않은가. 나는 그 어두운 면을 자주 보았다. 최근엔 텔레비전만 켜도 쉽게 보이는 거 같다.


 


학교들이 예전 같지 않다. 심한 처벌로 보는 이들을 경악하게 하는 교사들도 많지만 대부분의 교사들은 스마트폰이라는 신종 파파라치들에게 시달리고 있다. 이제 더 이상 교육의 장에 존경과 사랑은 없는 듯 하다. 단지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니다. 미국의 교육기관은 아예 학생들을 신뢰하지 않기로 한 듯 하다. 미국의 고등학교는 학생들을 감시하는 CCTV와 그들을 잡아들이는 경찰들로 가득 찼다. 학생들에게 교사는 억압의 대상이고 교사들에게 학생은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된다.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걸까? 현대의 청소년들은 과거의 청소년들보다 저항의식이 강해진걸까? 이제 더 이상 그들은 그들을 억압하는 권력에 굴종하지 않고 잘못된 것, 잘못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을 막기 위해 노력하기를 망설이지 않는 걸까?


 


그런 줄 알았다. 그러나 얼마 전에 본 뉴스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걸 증명해주었다. 10대를 갓 끝마친 대학생들이, 바로 얼마 전 까지만 해도 교사라는 권력에 저항하던 레지스탕스들이, 놀랍게도 아무런 권력도 가지고 있지 않은 대학교 선배들에게 얼차려를 당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라를 이끌 지식인들이 선배의 명령에 따라 길 한복판에서 군인처럼 서서 웃통을 까고 있는 모습이라니! 그들의 위대한 무기인 스마트폰이 일제히 죽어버리기라도 한 걸까? 그 선배라는 자가 가진 힘은 CCTV나 경찰을 합친 것보다 더 강력했던 걸까?


그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고민하던 내가 내린 답은 이런 것이다. 애초에 현대의 청소년들은 반항심이 커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예전보다 훨씬 순종적으로 변했다. 다만 그들이 고개를 조아릴 대상이 변한 것 뿐이다. 그것은 단순히 교사에서 선배로 옮겨간 것이 아니다. 이 사회에서 권위가 의미하는 그 근본 자체가 변한 것이다.


 


한 때 엑스세대라는 청소년들이 존재하던 시대가 있었다. 늘 사회를 의심하며 불량한 자세로 끊임없이 투덜거리는 젊은이들. 형태만으로 보자면 그때와 지금이나 크게 다르진 않다. 그러나 정보화시대의 우수한 교육 시스템이 그들을 좀 더 현명하게 만들었다. 인간은 역사를 통해 과거를 배운다.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가르친 역사에서 아이들은 어떻게 해야 승리하고 어떻게 하면 패배하게 되는지를 뼛속 깊이 익혔다. 이제 그들은 과거보다 훨씬 교활하고 계산적이다. 누구에게 권위를 주어야 그들이 승리하고 어느 쪽에게 순종해야 더 큰 이익을 볼 수 있는지 빠르게 판단한다. 총과 전차로 무장한 독재 권력조차 두려워하지 않고 민주주의를 위해 분연히 일어나던 청년들은 이제 그들의 인맥을 보장해주고 사회적 입지를 좌우할 수 있는 선배들 앞에서 꼬리를 흔든다. 아무도 거기에 의문을 품지 않는다. 그들의 관심사는 자신들이 선택한 무대 위에서 막이 내려갈 때까지 안전하게 살아남는 것이다. 누군가가 대신 반기를 든다면 그를 배척하고 매도한다. 저항하는 자에게 이끌려 같이 무대 밖으로 내팽개쳐지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기나긴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우행을 반복해온 선조들을 보면서 우리의 아이들은 무서운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과연 저항하는 자는 언제나 선인가? 저것이 선인지 악인지조차 분명하지 않은데 거기에 동조했다가 큰 손해라도 보게 되면 누가 그것을 보상해줄 것인가? 내가 남들만큼의 이익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내가 부양해야 할 사람들은 누가 지켜주지? 후손들의 메달이 지금의 비참함을 막아줄 수 있을까? 이미 우리는 대학이라는 거대한 문턱을 넘기 위해 젊음이라는 시간을 포함해 무수한 것들을 쌓아왔다. 만약 지금 당장의 객기가 그 공든 탑을 산산이 무너뜨리게 된다면, 과연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날아오는 값싼 찬사가 나의 미래에 무엇을 해 줄 수 있을까?


 


단순히 비유 때문이 아니라 산은 정말로 일종의 무대 같은 성질이 있다. 정상에 오르고 나면 등산객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전망대에 올라가 무대 위의 영웅과 같은 포즈를 하고 약속이라도 한 듯이 산 아래 경치를 내려다본다. 황사가 심해서 달리 보이는 것도 없고 딱히 재미있는 광경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등산이라는 노력의 보상이라도 되는 것처럼 전망대 앞에 줄을 서곤 한다. 그래, 결국 산도 무대다. 돌로 만들어진 무대. 누가 오르라고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올라선 어디에 적혀있는 것도 아닌데 정상으로 돌진하는 커다란 사이코드라마. 어느 등산가가 산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오른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글쎄? 산에 발을 들인 건 확실히 그의 의지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를 정상으로 끌어올려준 것은 단순히 자유의지의 발현은 아니었으리라. 나 역시 정상에 올라 경치를 내려다본다. , 저기에 또 하나의 무대가 보인다. 저 무대도 돌로 만들어졌다. 차갑고 생기 없는 돌이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은 채 복지부동의 자세로 보신주의 즉흥극을 연기한다. 한때 저 무대는 상아탑이라고 불렸다. 그러나 이젠 그냥 돌이다. 지식과 자유가 모두 죽고 시체를 연기하는 광대들만이 남은 돌의 무대다.







응모자


성명 오세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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