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외 1편

by 데레사 posted Aug 10,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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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 M . F


 

 

나는 진달래꽃을 따먹었다. 세기의 말, 초 단위로 밀레니엄 공허를 기록하는 효시의 중심에서 첫 번째 아홉수를 맞았다. 꽃잎을 쭉쭉 빨면서 참과 거짓을 동시에 뱉을 줄도 알게 되었다.

달아요. 맛나요.

은은히 달 큰 하나 맛이 썩 좋지는 않았다. 그저 고깔과자를 양손가락에 촘촘히 끼우거나 맥주사탕을 빨고 싶을 뿐이었다. 집집마다 금을 토해낸 장롱들이 하나 같이 빈 깡통 소리를 낼 때 아빠의 아사한 지갑을 딱지로 뒤집어엎는 지지부진한 나날들의 연속이었다.

 

더 오래 전 불균형한 것의 안전함을 믿는다. 남루한 길바닥이 우리들의 요새였다는 것을 수긍하려 한다. 내 친구 김의 첨예한 목소리가 나를 구십년 대의 어느 도외로 잡아끌기 때문이다.

저것은 갑각류인가. 아니다. 영치류 특유의 뭉글함이다. 네 입술의 가스라미, 미 노동자 계급의 산물인 리바이스 501, 아디다스 슈퍼스타, 따까리가 앉았던 무릎 팍, 사과처럼 뽕하고 튀어 나왔던 뒤통수도, 무기력한 머리카락과 즉흥적인 어깨선도.

 

공장이 뿜어대는 최첨단의 열심을 등에 지고 우리는 그림자로 달렸다. 우리와 함께 달리는 것에는 도로변의 제설차가 있었고 틀림없는 겨울이 있었다. 김은 키가 작달 만 했고 난, 기억이 가물 하다만 우주적인 말라깽이였다. 갈가지 두 쌍이 흙냄새와 햇빛 비린내를 묻히고 온 동네를 쏘다녔다. 신이 나면 337 박수를 쳤다. 김은 언제나처럼 한 번에 해냈지만 나는 꼭 일전에 연습을 해야 했다. 내가 입과 발로 공갈박수를 그릴 적에 김은 꼭 모른 채를 했다. 착한 김. 좋은 김이 아닐 수 없었다.

 

파상풍 주사를 맞아야 했던 그 때 우리는 다리 너머의 철제 공장이 뿜어내는 구름을 쫒았다. 다른 애들이 소독차를 뒤따라 갈 때 김과 나는 꼭 그 시커먼 것에 달려들었다.

내 혀가 이천사백팔십 키로 미터 라면 저 구름을 먹을 수 있었을까.

나는 김 앞에서 부러 엉뚱한 말을 곧 잘 하곤 했다. 그러면 짐짓 나를 타이르는 김의 꽉 막힘이 아귀가 부르틀 정도로 좋았다. 예쁜 김. 멋진 김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는 그 모든 위험한 것들을 꿋꿋하게 디디며 소꿉놀이를 했다. 김은 아빠고 나도 아빠였다. 김은 아무래도 엄마가 좋겠다며 권유했지만 나는 김과 똑같은 것을 하고 싶었다. 김은 대충 아무거나 골라잡아도 한 결처럼 좋은 냄새가 났다. 아 참, 김의 동생은 개였다. 개라서 개였다. 반려견이 한창 사회 문제로 떠오르는 던 시기였다. 먹는 거 가지고 지랄을 떤다는 우리 아빠와 동물 병원 가기가 일일의 가장 중대한 스케줄이었던 김의 어머니는 충돌했다. 김도 나도 그것에 대해서는 이야기 나누지 않았다. 재미가 없었다.

무튼 난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김의 동생에게 모래를 먹였다가 김에게 정강이를 까였다. 김의 커다란 눈알은 마치 수성을 벼르고 있는 목성 같아 나는 그만 놀이터 흙바닥에 세계지도를 그렸다.

처음에는 김이 무서워서 눈물이 터졌고 그 후에는 축축한 바지가 짜증이 나서, 그 다음에는 김이 내게 쩔쩔 매는 것이 너무나도 짜릿해서 더욱 더 안하무인으로 고함을 쳤다. 동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김은 내게 미안하다고 재차 사과했지만 나는 김의 부리부리한 눈깔이 여전히 아팠다.

 

흙먼지가 가득한 운동장 중앙은 우리들의 영역이었다. 어딘가 촌스럽고 농담과도 같은 반주가 쿵쿵쿵 울렸고 킥킥대며 수술을 흔들었다. 옅은 땀 냄새와 분필냄새가 났다. 5월이었다.

운동장 천막 안에서는 학부모들이 캠코더를 들고 줄줄이 플레이어 버튼을 눌렀다. 햄이 두 줄 깔린 김밥과 방울토마토가 돗자리 위에 전시됐다. 몇몇은 양념치킨을 뜯었다. 나는 곰돌이 음료에 주둥이를 박으며 이로 끙차 올렸다. 파란색 맛은 반쯤 비우면 혀가 꼭 그 색이 되었다.

저 멀리서도 김은 입술이 빨갰다. 항상 운이 좋았으므로 빨간색 맛을 먹었을 것이었다. 나는 홈 비디오 안에 찍히지 못한 소수에 속했지만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빨간 입술로 빨간 닭다리를 물고 있는 김이 나의 속성을 주물렀기 때문이다. 그때면 꼭 내 심장이 트림을 하는 것 같았다.

 

김은 눈이 크고 코가 작았다. 턱이 삐쭉한데 입술은 또 두툼했다. 무언가 정의를 내리기도 전 나는 그 불균형의 존재가 참으로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나는 손톱 사이에 낑겨 있는 풀물을 긁어내며 부러 콧소리를 냈다. 여보, 찌개에서 초록색 맛이 나요. 그러면 김은,

풀이니까 초록 맛이 나는 거지요.

이렇게 답했다. 농담과 진담이 뒤엉켜 경계가 무색해 지는 것은 노을이 우리의 그림자를 좀 먹는 것 보다 뭉클한 감정이었다. 나는 김이 좋아서 삼키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김이 너무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

 

내 히스테리에 쩔쩔매던 김, 울망 해지던 속눈썹, 다급한 슬리퍼까지 나는 당혹스러울 정도로 가슴뼈의 활개를 느꼈다. 김은 내게 강아지풀을 꺾어다 바쳤다. 솜솜한 겉치레 안으로 스물 거리는 해충들과 날벌레들까지 모두 쓰다듬을 수 있었다. 몇 번이고 번복하지만 정말로 김은 내 속성을 만끽했다.

 

imf경제위기, 아메리칸드림, 부녀자들의 간통, 서태지, 명망 높은 연쇄살인마,

스팀다리미처럼 열기를 내뿜는 구십 년대를 건너며 나는 김이 내게 건 내 준 별 사탕을 씹어 먹었다. 물론 견디어야 했다. 부들부들한 지우개 가루, 크리스마스 씰, 반짝이 풀, 핑킹가위, 양면색종이, 바퀴달린 신발 따위의 내겐 허락되지 않는, 나를 처절하게 하는 것들 말이다.

금속품이 없는 장 농은 신장이 고장 난 우리 아빠와 같다는 사실을 알기까지 계속해서 지저분한 것들을 흘려보냈다. 김이 건 낸 것들을 제외하고는 미온이 일절 들어가지 않은 우리 집 된장찌개만큼 씁쓸한 것들 투성이었다.

 

나는 김의 롤러브레이드를 장갑 삼아 손바닥에 끼우며 우스꽝스럽게 노래했다. 간주와 간주 사이의 묵음이 지루해 음을 부러 당기는 나를 김은 단호한 표정으로 교정했다.

피카츄 라이츄 파이리 꼬북이 버터풀 야도란 피전트 또가스 서로 만날 때까진 힘들었어도 우리는 모두 친구

그러면 김이 웃었다. 목소리를 뒤집어 깔수록 그 애는 자지러졌다. 그러는 김이 좋았다. 옴팡 파이는 보조개 안으로 빨려 들어가 간혹 가다 머리를 내미는 키조개로 살고 싶었다.

 

김은 티비에 나오는 온갖 것들을 잘 따라하곤 했다. 그리고 나는 그러는 김을 곧 잘 따라했다. 김이 보라돌이를 하면 나는 뚜비를, 신창원을 하면 담당 형사를, 아빠를 하면 엄마를, 동물병원 원장을 하면 기꺼이 개가 되었다. 우리는 팀이었다.

김은 제 무릎을 베고 몸을 옹송구린 나를 능숙하게 쓸며 수성 크레파스를 꺼내들었다. 풀처럼 누워도 나는 안심할 수 있었다. 김의 도가니는 딴딴했지만 딱딱하지 않았다.

 

퍼피, 예쁘게 염색할 시간이야.

. 퍼피가 뭐야?

강아지라는 뜻이야.

강아지가 왜 퍼피야?

미국말이야.

여기는 한국인데.

미국이 더 잘 사니까 미국을 따라가야 해.

아아.

따라해 봐. 아 엠 어 보이 유얼 어 걸 위얼 해피.

아 엠 어 보이 유 얼 어 걸 위얼

 

김의 손이 빨간색이면 내 귀도 빨간색이었다. 우리는 꺄르르 웃었다. 대게의 어린애들이 그러하듯 멍청하게 사대다가 이마빡에 혹이라도 부푸는 날이면 그곳이 어디든지 간에 병원놀이가 시작됐다. 빨간 귀와 빨간 손이 빨간약으로 둔갑하기도 했다.

김은 조금 울었고 나는 울지 않았다. 시무룩한 더운 숨이 훅 끼쳐오면 그제 서야 조금 앓는 소리를 냈다. 그 애가 그걸 원했다.

 

후에 김은 전국구 사이언스 올림피아드에서 동상을 수상해 약 7개월가량 교문 상단의 현수막 안을 유영 했다. 펄쩍 거리는 글자의 김을 보기 위해서 나는 고개를 최대한 젖혀야 했다. 김은 우리 학교에서 제일 먼저 전자사전 소지했고 빽빽 갈라지는 컬러링을 연달아 들을 때 나는 김이 만들어 내는 잡음을 구경했다. 살짝 맛이 간 늦가을의 고추잠자리들이 창틀에 대가리를 박고 무덤으로 갔다. 자멸이었을까. 조금, 지루했다.

 

 

미미인형의 속눈썹에서 옅은 방부제 냄새가 날 무렵 쉽사리 장난감을 바꾸는 것이 티슈를 뽑듯 통과의례적인 어른의 법칙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것에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먼지처럼 폴폴 나리고 분개하던 나날, 나는 언제 어디서 누구와 어떻게 왜 자랐을까. 그것이 참 불가사의했다. 불균형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던 나는 가장 이상적인 동그라미 안에서 관을 짜고 조석을 해결하는 내 모습을 상상한다. 기쁜 일이다. 좋은 일이다. 박수 칠 일이다. 타임라인과 즐겨찾기에 더 이상 의 항목은 없다. 더러 김은 졸업앨범 한 귀퉁이에 하나의 색상으로 묻어나는 기타의 존재일 뿐이다. 그 애는 그걸 원했나.

 

이상했다. 생각해보면 김의 주위엔 공기가 아니라 별의 체취가 흘렀다. 숨이 정체하면 정체한 대로 풀잎을 빻고 잠자리의 날개를 더욱 꽉 움켜쥐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종종 이불에 코끼리를 지리던 여섯살 박이 어린아이의 꿈, 밤새 동물원을 잉태하던 무른 배꼽, 그것은 우주로 은하로 궤도 너머로 달리던 발자국의 비행이라는 것을. 퐁퐁하고 터지는 전자파의 기포에 하늘 높이 솟구치던 머리카락만큼. 아니 보다 더. 더 높이.

김의 손아귀에서 더욱 영롱하던 야광팔찌처럼 나는 20세기 말, 물이 다 빠져 헐거워져버린 그 싱거운 소년소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소독차 냄새를 뒤따라가던 꽃씨 하나, 봉다리 속 달큰한 별들을 한 손에 몰아주던 꽃씨 둘, 폭죽처럼 사방팔방 쏟아지는 그 미성의 줄기를 잡고 김의 등에 돋아난 촘촘한 꽃씨를 후 하고, 비로소 불 수 있게 되었다.

 

 

무의미한 이슈거리를 뒤적이며 나는 문득 imf라는 옛 된 단어와 엣 된 김의 앞니를 떠올린다.

I . M . F

(ill defined 정의할 수 없는, my 나의, friend 친구)

어쩌면, 내가 그걸 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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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





엄마를 보내고 썰물 밀리 듯 파고드는 시적 영감 속에서도 펜 한번을 못 잡았다, .

그 영감이라는 것은 지레 짐작 했던 카타르시스, 즉 상흔을 비집는 역한 쾌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난생 처음으로 내가 활자에 중독이 되어 닥치는 대로 읽고 곱씹었던 지난날에 악다구니를 질렀다. 그것은 내게 지구 종말 급의 뒤통수 가격을 선사했다. 내 혀는 늘어져 심장부근에서 달랑달랑 거렸다. 괴기스러운 시계추, , 이 쯤 하자.

 

불행과 낭만을 다발 엮어 넝마주이처럼 늘어뜨린 책과 예술영화, ! 나는 낮선 것에 매료된 이단아, 그것이 전부였던 것이다.

책장을 넘기지도 타자를 두드려 보지도 못하고 육지에 떨어진 새우처럼 구부정히 잠만 잤다.

눈을 뜨면 두둥실 떠오르는 우울의 초상들에게 가차 없이 구타를 당하곤 했는데 때 마침 각성이 찾아 온 것이다.

아니, 그쯤이면 바수어질 때도 되었다. 나의 부도난 자존심과 회한, 자책으로 말미암아 나는 오롯이 나를 마주 할 수 있게 되었음이다. 아픔을 원동력으로 세상을 관망하고 창작에 열을 올리라는 단언. 글쎄. 나는 말보단 무감하게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올린다.

 

도피처를 건설하기 위해 어그러진 인간의 감성으로 짙은 안개를 뿜어낸다 한들 그렇게 갈구하던 사람과 사랑과 사회가 건 내는 소독의 치유를 얻어 낼 수 있을까나. 고작 환상 따위에 목을 매 욕망의 당위성을 멸시하고 염세를 떨던 나, 인간의 기저는 외로움이라고 껍데기 씹는 소리를 잘도 지껄이던 나.

그리고 엄마를 잃은, 그러니까 폭풍우 몰아치는 밤에 지붕이 날아가 버린 스무 살의 나.

모두 짓눌려진다. 한 덩어리로 검게 독이 올라 나는 내내 숨만 쉬었다. 엄마가 있었더라면 밤새 등 언저리를 토닥여 줬을 것이다. 깊은 수렁에 빠졌다고 갖은 궁상을 다 떨었는데 고작 해서 밤새 가실 걱정이었다면 그래, 나는 응석을 부렸던 거고 위선에 들썩였던 거다. 엄마를 가진 자들만의 특권. 솔직해지자. 그것은 정당하게 뇌까리는 이기심이다. 뭐가 그렇게 숨이 막혔고 절망스러웠을까. 무려 내겐 팔딱이는 신의 조각, 당신이 있었는데.

 

이 모든 사태에 대해 몰두하기 시작했다. 방랑하던 마귀들이 몸을 갈기갈기 찢어 내 커다란 주머니 안으로 한 움큼씩 들어간 것일까. 불행은 어디에서 오는가. 사람은 왜 그리도 쉽게 죽으며 고칠 수 있는 것들은 이미 돌이킬 수 없다고 자학에 눈이 머는가. 고여 있어도 좀처럼 요동 칠 기미가 없는 청춘에는 이유가 있다. 스무 살의 볼이 유독 붉은 이유다.

 

엄마의 호흡에 더 이상 신의 자비가 닿지 않게 되던 수상한 밤, 정리를 하라는 의사의 통보를 뒤로 하고 나는 장문의 일기를 썼다. 망설임 없이 빽빽해지는 문장과 단어의 배열에도 일말의 환희가 없었음은 정말이지 웃기는 일이다.

그리고 2년이 조금 더 지났다. 정확히는 24개월 하고도 이십사일. 그러니 나의 회고 역시 이십사에 이십사를 제곱 더한 묵힌 군내 나는 고백이다.

짧은 시간일까.

글쎄읽지도 보지도 쓰지도 않으며 보낸 시간 중에 내가 잘한 짓이라곤 그것을 까먹는 일 뿐이었다. 나 스스로에게 도취되어 괴짜를 위장한 가짜의 행위를 서슴없이 휘두르던 나와 분리되는 과정, 점차 그 간격이 멀어졌던 일. 완벽하진 않지만 엄마를 세상의 것에서 놓아주고 나의 공간은 지나치게 가난해 졌다. 있으나 없으나 말씀으로 남아 나를, 혹은 내가 지나치는 인류의 구간을 지탱하는 좌표의 방류. 그러니까 내가 좀 살만해 졌다는 이야기를 꼭 하고 싶었다. 유일한 유품인 엄마의 오래된 일기장. 그것만 아니면 결코 울음을 울 일도 없으니.

정말이다. 정말 그렇다.

 

 

#1 어느 날에는,

 

- 사랑이 있는 한 이 세상은 아직 살만한 곳 이란다.

 

그러니 사람은 사랑을 웃게 할 의무가 있는 거야.

 

자유보다 근접한 인륜의 가치는 굳이 손 뻗지 않아도 옷깃에 채인다.

 

끌어안기를, 사정없이 섬기기를.

 

내 삶의 증표야, 씩씩하게 그저 나아가거라.

 

우리 딸 괜찮다. 다 괜찮다. -

 

 

#2. 이렇게 답신을 쓰고.

 

- 나의 스무 살은 우 풍 드는 방에 손 떼 앉은 키보드, 더덕더덕 비늘처럼 붙어있는 포스트잇이 전부지만 영예모르고 호사스럽지 않아 참 아늑하다, 라는 생각을 한답니다.

아직은 꿈을 품을 수 있어 정말이지 다행인 나날들인 걸요.

이 늦은 시간에 용기를 내어 일기를 꺼내어보고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망망한 소음들을 듣습니다. 녹음하고 지우기를 반복합니다.

그러니 당신은 그저 나를 들어요.

 

저는 지금 탄산 기포처럼 공격적으로 솟구치는 꿈에 당황스러울 정도로 바쁘게 하루를 소진하곤 한답니다.

잘 된 일이지요, 곁에 계셨다면 분명히 머리카락을 매만져 주셨을 거예요.

나는 다 알아요. 이제는 어린아이가 아닌걸요.

그럼으로 외로움에 길이 막혀 버리는 건 나중에, 아주 나중의 일이 되게 해주세요.

철 이른 검버섯에선 미열을 뿜어내고 고단한 날 공기의 겨울 냄새를 몰고 다닌 던 당신. 이제는,

 

메리크리스마스.

 

1월의 크리스마스면 뭐 어떤가요.

당신을 보고 싶어 하는 마음 하나면 그만인 거죠. -

 

 

#3. 소녀,

 

이런 편지. 이런 기록. 이런 그리움.

너덜한 반창고는 더 이상 인간의 살갗에 기능하지 못하지만 눈물에 숙성하여 당신 사진 한 켠 에 고이 붙여본다. 냄새나는 반창고. 그래도 당신이 더 이상 고통 받지 않는다면 나는 군말 없이 돌아선다. 푸르른 오월에도 입김을 품던 방구석 오마주여, 감히 나, 내가 가득히도 사랑한다고.

 

 

#4. 자랍니까?

 

엄마가 죽었다. 2012년의 달력을 한 장 앞둔 권태로운 어느 날, 불쑥.

나는 생각했다. 신약의 수난기를 몇 페이지로 압축한 그의 제자들은 복된 여인이라는 마리아의 눈물을 닦아 주었을까. 적요한 새벽시간, 나는 또 돈 안 되는 공상과 다음 날의 활기를 교환하고 있다. 고물 노트북이 고통에 신음한다. 이타의 아무개들은 갑갑해했다.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고 어떤 위로가 베스트 전당에 오를지 본인들의 문학적 감수성을 채근했다. 누구도 나의 궁상과 자기비하를 비난할 순 없다. 비교적 어린 나이에 편부모 슬하 자녀가 된 나와 고전 속 물레의 바늘 중 무엇이 더 뾰족한지 연구학회라도 열 기세였다. 그 민망스러움을 내려다보는 것이 우스웠다. 한 때는 나보다 더 불행한 치는 없는 거라고 기가 막히게 억장이 무너지는 자부심도 부려 보았다. 얼마 못가 싫증이 나버렸지만. 생소했을 나의 존재, 위치, 환경, 표정, 말투, 이젠 모두 사죄한다. 내 곁을 스친 구석구석의 모든 당신들께. 생소했을 것이다. 아주 작게나마 이해해한다.

 

꼬질꼬질한 필통 속 종이쪼가리, 그런 사소한 기억 하나라도 매달리고 싶다만 애석하게도 겨울은 목숨을 잃어 간다. 스무 살의 성체를 거울로 비춰보며 보며 엄마를 회상한다. 그리고 기록한다. 하늘 한번 쳐다보기 힘든 각박한 일상이지만 아, 누가 알까. 그건 엄마의 유일한 유품인 나의 의무라는 걸.







신현정

deresa0207@hanmail.net

010441152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