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회생

by 몽구 posted Nov 06,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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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회생]


어제 사당동에서 집으로 가는 전철..

때는 11시경..

 

북적거리는 객실에서 손잡이를 잡고 겨우 취기를 진정하고 있는데

15도 각도 바로 앞, 지척에 아리따운 여인이

스맛폰도 아니고 노트도 아닌 대형 모니터로 오락을 즐기고 있다.

 

멀거니 보니 카톡으로 연결하여 즐기는 게임인 모양으로

가로세로 단어 퍼즐 게임이다.

 

예를 들어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

□ □ □ 토

 

이렇게 문제가 나오면 빈칸에 감.탄.고.. 를 채워야 한다.

한자를 제대로 공부했는지 간간이 출몰하는 사자성어를 곧잘 채워넣는다.

 

돋보기를 꺼내쓰고 하는 양을 구경하다보니

그야말로 지척의 거리로 다가섰는데

尺은 자척으로 한 자는 대략 30센티 아닌가..

 

내 뜨거운 숨결이 목덜미에 닿을 정도로

거북이처럼 목을 빼고 구경하는데

일사불란한 키워드 조작에 여인의 손가락이 안 보일 정도다.

 

드디어 한 문제 남겨놓고 사자성어가 나왔는데

문제 내용을 얼핏 보고 아래 칸을 보니

□ □ □ 생

 

정답은 너무도 쉬운 [기사회생]인데 

여인은 골몰하고 있는 상황에서 초읽기에 들어간다.

하나만 맞추면 퍼펙트인데 그걸 모르고 있다니..

오히려 내가 더 초조해져서 나도 모르게 작은 소리로

- 기사회생

 

그랬더니 이 여인이 귀를 내 쪽으로 살짝 들이밀고

- 예?

- 기.사.회.생

- 아..

 

후다닥 입력하더니 퍼펙트로 완성하고는 고개도 안 돌리고 수줍게 웃는다.

내 나이 25세만 되었어도 이 아름답고 싱싱하고 지적이고

물찬 제비 같은 여인은 나와 작은 인연이 되었을 것이다.

 

여의도가 다가온다.

까진 속알머리가 들통 날까봐 황급히 다른 칸으로 옮겨서 내린다.

마음은 이렇게 젊은데 피부는 늘어지고

주름과 함께 머리는 한주먹씩 빠지고

오줌 줄기는 슬리퍼를 자꾸 적시니.. 

슬픈 耳順이다..

오늘 모임에 가서 같이 늙어버린 친구들과 울적한 마음을 삭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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