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차 창작콘테스트 수필부문 응모 - 수영을 배우다 외 1편

by 무위자연 posted Feb 10,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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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을 배우다

 

  느닷없는 생각이었다. 수영을 잘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그야말로 느닷없이 솟구쳐 올랐다. 직장을 그만두고 아무 계획 없이 방구석에 처박혀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던 어느 날이었다.

  수영장에 가야겠다는 결심을 했고, 마침 멀지 않은 곳에 수영장이 있다는 생각이 뒤미처 떠올랐다. 망설이지 않았다. 수영복과 수모, 물안경 등속을 가방에 챙겨 넣었다. 가슴이 하는 말에 귀 기울이고, 가슴이 이끄는 대로 살아보자고 다짐했던 터였다. 수영장으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수영장에서는 한 무리의 수강생들이 수영강사의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한 몸짓으로 물속을 휘젓고 다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강사가 “접영으로 두 바퀴!” 고함치듯 말하고 호각을 불었다. 강습생들은 그 신호를 왜 이제야 주느냐는 듯이 수면 위로 수박처럼 동동 띄우고 있던 머리통들을 물속으로 집어넣었고, 집단적으로 수면에 큰 파문을 일으키며 물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돌고래를 닮은 그들의 몸짓은 역동적이었다. 그들은 날고 싶어 하는 것 같았고, 땅의 속박을 기어코 벗어나고야 말겠다는 간절한 소망을 가진 존재처럼 보였다. 땅에 두발을 붙이고 살아야 하는 인간의 숙명을 거부하려는 몸부림을 그 순간 그들에게서 나는 보았다. 그들의 소망은 이내 물에 잠길 수밖에 없는 것이었으나, 그들은 그 숙명에 좌절하지 않았다. 다음번의 비상을 예비했으며, 기어코 실행했다. 이륙하려는 시도가 번번이 실패할 때마다 그들은 또다시 물속을 파고들었고, 또 다른 이륙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비상하는 것의 불가능함을 개의치 않는 존재처럼 보였다. 불가능함을 누구보다 잘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불가능을 향해 단호한 걸음을 성큼 내딛는 존재 같았다.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수영을 잘하고 싶다는 막연했던 욕구는 내 몸속에서 구체적이고 의미 있는 것으로 형상화되었다.

 

  수영장 물속으로 무작정 뛰어들었다. 수영 초보인 나의 몸은 경직되어 있었고 힘이 바짝 들어가 있어서 좀처럼 물에 뜰 수 없었다. 물에 뜨려면 처음부터 굉장히 잘하려는 욕심과 물에 가라앉을 것 같다는 공포심을 버려야 했다. 인간은 몸속에 고무 튜브 역할을 하는 폐라는 기관이 있어서 물에 분명히 뜨게 되어 있다고,‘수영교본’이라는 제목의 책은 말했다. 그 과학적 진리를 나는 믿었고, 물에 몸을 맡겼다.

  물에 가라앉아 죽더라도 할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을 그때의 나는 한 것 같다. 그러자 물이 나를 부드럽게 띄워주는 것이었다. 지금 이순간 내가 물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물이 느끼는 것 같았다. 물과 내가 처음으로 교감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그 순간 지구의 중력과는 상관없는 존재가 되었다. 짜릿한 쾌감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드디어 내가 뜬 것이다.

이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순간, 빠른 속도로 전진하려는 조급함이 나를 급습했고, 나는 허둥거렸다. 팔다리를 볼썽사납게 휘저었고 금방 지쳐버렸다. 레인 중간에서 멈춰 숨을 고르고 있으니 같은 레인에서 수영하던 사람들이 나에게 신경질적인 몸짓으로 물을 튀기며 앞질러나갔다.

  나를 귀찮다는 듯 안쓰럽게 쳐다보는 수영장 내의 모든 시선들을 나는 무시해야 했다. 오늘 나는 기껏해야 그들의 수영을 약간 방해할 뿐이지만, 그들이 무심코 나에게 던지는 경멸의 시선에 조금이라도 내가 상처받는다면 내 삶은 크게 훼손될 것 같았다. ‘미움 받을 용기’를 가지라는 내용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사실이 새삼 떠올랐다. 나는 그들에게 기꺼이 미움 받으리라는 용기를 냈다.

  나 자신만의 속도를 생각하기로 했다. 누구에게 뒤처지면 안 된다는 생각, 옆 레인의 누군가보다 빠르다거나 느리다는 비교는 수영장 물속에서 나를 경직되게 했다. 앞으로 천천히 아주 조금씩 나아가기로 했다. 규칙적으로 호흡을 하며 부드럽게 팔과 다리를 저었다. 물의 저항을 최소한으로 맞이할 수 있는 자세를 머릿속에 떠올리며 물의 빈틈을 파고들었다. 여러 날을 반복해서 연습했다. 그때의 나는 수영마저도 실패하면 더 이상 살아갈 이유도, 희망도 없다는 과장된 감정에 휩싸여있었던 것 같다. 나는 수영에 몰입했다.

  몇 달의 시간이 지난 어느 날, 난 수영을 제법 잘 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수영장 레인을 쉬지 않고 왕복으로 휘젓고 다니는 나를 자각한 것이다. 나는 분명 수영장 한 레인을 지배하고 있었다. 내가 몰두한 것은 수영이었지만, 수영을 잘 하게 되자 왠지 남은 내 인생을 제법 잘 살아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과 충만함으로 내 가슴은 벅차올랐다.

 

  언제였던가, 나는 하늘 날아다니는 이름 모를 새들을 멍하니 바라본 적이 있다. 그리고 땅을 딛고 서 있는 내 두 발을 내려다보자 뜬금없이 눈물이 났었다. 그날 나는 날개 없이 날 수 있는 세상은 없을까, 라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포유류인 고래가 땅을 버리고 바다로 간 까닭은 그들이 날고 싶어 했기 때문이지 않을까, 라는 꿈같은 생각도 했었다.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며, 나는 상상한다. 나는 지금 날고 있다고.

  이언 매큐언의 소설 <토요일>에서 주인공인 ‘헨리’에게 엄마가 말한다.

  “또하나의 세계다. 수영을 하면 말이다, 헨리, 하루가 달라진단다. 그리고 그날은 여느 날과 완전히 다른 날이 된단다.”

  오래 전에 읽었던 이 소설을 가끔 책장에서 꺼내 이 구절을 반복해서 읽어보곤 한다. 그리고 주섬주섬 수영가방을 챙겨들고 수영장으로 간다. 그날은 완전히 새로운 하루를 살 수 있다. 




                              

고백합니다



  수필집 한 권을 읽었다. 반려동물과 함께한 추억과 사색이 가득한 수필집이었다. 저자는 집에서 기르는 동물들은 애완동물이 아니라 반려동물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집에서 같이 생활하는 동물들을 더 이상 장난감과 같은 존재로가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동반자로 인식해야 한다는 성숙한 가치를 전달해주는 수필집이었다. 저자는 반려동물을 말 그대로 그의 가족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읽기에 이 책의 저자는 독자에게 인간은 지구의 중심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이 책을 읽고 나는 내 어릴 적 우리 가족이 키웠던 개 와 닭의 대한 추억을 자연스럽게 떠올렸다. 그리고 그 생각을 쉽게 떨쳐낼 수 없었다.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였다. 개 한 마리와 닭 한 마리를 마당에 키웠었다. 낯선 이를 보고도 전혀 짖지 않을 정도로 내성적이던 작은 개의 이름은 ‘쫑크였다. 그 옆에서 닭털을 유난히도 많이 흩날리게 퍼덕이고, 이른 새벽마다 어김없이 째진 목소리로 울어대던, 활달한 성격의 닭의 이름은 ‘삐순이였다. 전혀 다른 성격의 쫑크와 삐순이는 희한하게도 서로 싸우지 않았다. 서로 성격이 너무나 달라서였을까. 개와 닭이라는 다른 종이 느낄법한 서로간의 경계심이 그들에게는 없었다. 쫑크와 삐순이와 우리 가족은 화목했고, 우리는 행복한 한 시절을 같이 보냈다.

  그래서일까. 나는 그들을 성심성의껏 잘 보살펴 주었다고 기억하며 지금까지 살아왔다. 당시의 상황에서는 그랬다고 생각했다. 그들을 배고프게 하지 않았고, 추위에 떨게 하지 않았으며, 내 즐거움을 위해 그들을 심하게 괴롭힌 일도 없었다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의 반려동물을 한가족처럼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의 수필집을 읽고, 나는 나와 쫑크와 삐순이의 이별과정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우리는 작은 마당이 있던 그 오래된 개인주택에서 부모님이 어렵게 장만한 아파트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맞이하게 될 새로운 삶에 들떠 있던 우리 가족은 쫑크와 삐순이를 그 아파트로 데려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부모님은 그들을 누군가에게 팔아버렸다. 쫑크와 삐순이를 데려갔던 사람은 내가 기억하기로 무슨 식당을 운영하는 사람이었다. 그들을 넘겨주고 식당 주인에게 현금을 받아 챙기던 아버지의 등 뒤에 나는 우두커니 서 있었고, 그 장면을 하나도 빠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내 무의식 밑바닥에 침전해 있던 그 장면이 갑자기 내 의식의 수면위로 선명하게 솟아올랐고, 나는 잠시 진저리쳤다.

  그때 나는 아마도 슬퍼했던 것 같다. 어쩌면 눈물을 조금 흘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건 나와 부모님은 쫑크와 삐순이를 우리의 가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 가족의 여가활동에 필요한 애완동물에 불과했다. 반려동물이 아니었던 것이다. 우리는 그들과의 여가활동이 허용되지 않는 인간만의 보금자리라고, 당시의 우리 가족이 판단했던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그들을 식당에 팔아버리고 말이다. 쫑크와 삐순이가 식당에서 맞닥뜨렸을 상황을 상상하면 지금의 나는 무참해진다. 고백하건대 우리 가족은 분명히 그렇게 했다.

 

  그때의 나는 쫑크와 삐순이가 단지 나와 우리 가족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필요치 않으면 내팽개쳐도 되는 우리 주변의 흔하디흔한 자연물 중의 하나로 여겼던 것이다.

  서점가를 점령하고 있는 수많은 자기계발서를 읽어보면, 그 책들은 자신이 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고 충고한다. 하지만 정말 그런 것일까. 너무 경제 논리에만 함몰되어 있는 생각은 아닐까. 우리 인간들은 이 지구별의 중심이 아니다. 단지 각자의 삶의 중심일 뿐이다. 우리는 자연이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고 착각한다. 인간이 아닌 모든 존재를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취급하는 것이다. 태양은 아침마다 우리 하루의 시작을 위해 떠오르는 것이며, 닭들은 우리에게 새벽을 알리기 위해 울어왔다. 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열매들은 우리 따먹으라고 열리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런 것처럼 살아왔지만, 이 자연, 이 우주는 분명 우리의 것이 아니다. 

  인간만이 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오만함이 여태껏 나의 의식과 무의식의 심연에 단단히 들어붙어 있었다는 자각은 섬뜩하다. 바라건대 이 가당치 않은 오만이 나에게서 뿌리 채 뽑혀 나가기를. 그리하여 내가 이 세상에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들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조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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