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차 창작 콘테스트] 어느 날 밤의 소회(所懷) 외 1편

by 오크밀 posted Mar 25,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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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밤의 소회(所懷)

 

 

  비 오는 어느 여름날에 밤샘 근무를 하고 있을 때였다. 시곗바늘이 새벽 5시를 가리킬 무렵, 밤을 지새운 몸이 노곤하여 바람이라도 쐴 겸 잠시 밖으로 나갔다. 그때 참으로 일상적이면서도 인상 깊은 풍경을 봤다. 비가 내리고 난 뒤의 하늘은 짙은 구름이 산 중턱까지 내려왔었고, 그 사이사이에는 희미하게 푸른빛이 아른거렸다. 그리고 바로 맞은편 건물에는 나와 같은 밤을 지새웠을 근무자가 지난밤이 고단했는지 담배를 입에 물고 앉은 채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이 안쓰러운 생각도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듬직하여 한참을 제자리에 서서 이 이상한 조화(調和)를 감상했다.

  대한민국 청년들은 일정한 나이가 되면 군대에 가야 한다. 20년 넘게 정들었던 가족과 애인, 친구들의 품을 떠나 낯설고 외진 곳에서 혈혈단신(孑孑單身)으로 국방의 의무를 다해야 하는 것이다. 나아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항상 전쟁을 상정(想定)하는 환경이니만큼 언제나 긴장되고 고된 것이 군문(軍門) 안이다. 그럼에도 사랑하는 내 사람들을 지키겠다는 일념(一念) 하나로 우리네들은 그 모든 것들을 짊어진 채 묵묵히 군복을 입고 있다.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생기(生氣)가 넘쳐흐르는 것이 청춘이다. 사람의 일생에서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시기가 바로 이때다. 꽃보다 아름다운 청춘의 한가운데에서 소중한 모든 것들을 뒤로하고 나라와 가족을 지키는 이들의 고단함을 한 데 압축시켜 놓은 것 같은 이 사람은 담배를 입에 물고 앉은 채로 졸고 있었다.

  사실 대한민국 청년들의 청춘이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다. 언론에서는 수년째 청년실업과 이로 인한 사회혼란을 보도하고 있고, 정부에서도 대통령 직속으로 청년위원회를 둘 정도로 우리 사회의 청년 문제는 간단해 보이지 않는다. 군문 안에 있다고 어찌 사정이 다르겠는가. 하나같이 앞날에 대한 불안과 걱정이 가득한 게 또한 우리 또래가 아니랴.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이상하게도 나는 앞날을 치열하게 고민하는 이 시간이 행복하다. 헤르만 헤세는 소설 <데미안>에서 인간은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고 했다. 새로운 세계를 맞이하기 위해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하는 지금이 나를 괴롭히기도 하지만 또한 즐겁게 만든다. 새로운 세상을 가질 수 있다는 것, 그럴 가능성이 아직 내게 있다는 것은 큰 행운이다. 청춘들의 투쟁은 알에서 나오기 위한 숭고한 몸부림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청년들이 군대에 가야 하는 만큼, 군문 안에서는 전국 팔도에서 모인 가지각색의 또래들을 만날 수 있다. 그만큼 다양한 생각들과 질문들을 서로 나눌 수 있다. 나는 어떤 알에서 나오려고 하는지, 네가 새롭게 보려는 세상은 어떤 것인지 끊임없이 얘기한다. 나라가 우리네 청년들에게 어디 마음껏 떠들어보라고 마련해준 자리요, 시간인 셈이다. 삶에 통달하여 완숙(完熟)의 경지에 이른 어느 원로(元老)가 보기엔 햇병아리들의 귀여운 지저귐이겠지만, 그래서 더욱 가치가 있는 시간이 아닐까 한다. 사는 곳도 살아온 길도 다른 이들이 모인 자리는 언제나 시끌벅적하다. 어릴 적 학교 앞에서 병아리를 팔던 아저씨의 자리가 그랬듯이.

  부대 안에는 같은 또래의 병사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각양각색(各樣各色)의 또래들만큼이나 다양한 길을 걸어오다가 한 곳에 모이게 된 장교·부사관·군무원 등이 각자의 위치에서 조국(祖國)을 지키고 있다. 내가 속해 있는 비행대대는 조종 장교들의 비율이 무척 높은 편이고, 따라서 이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다. 조국의 영공(領空)을 반드시 수호하겠다는 의지로 하늘 높은 곳에서 방공(防空) 임무를 수행하는 조종사들은 강인한 체력과 그에 못지않은 정신력을 가진 국군의 소중한 인재들이다. 사람들은 학교에서 우리를 가르쳐주는 분들을 선생(先生)이라고 부른다. 한자 그대로 해석하면 나보다 앞서 살아와 배울 것이 있는 사람이란 뜻이라고 한다. 내가 복무한 부대의 조종 장교들은 2년 동안 나의 훌륭한 선생님이었고, 나는 이들의 관록(貫祿)이 빚어낸 귀중한 지혜와 신념을 배울 수 있었다. 아득히 높은 영공에서 음속(音速)에 가까운 전투기에 탄 채로 하늘을 지키는 조종사들은 밤하늘의 별들처럼 반짝이게 빛나 나의 새벽을 밝혀주었다.

  군대에서 복무해야 하는 2년이란 기간은 빈말로라도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부모님 슬하에서 엇비슷하게 자랐을 지난 20년만큼이나 길게 느껴지고 또한 많은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 시간이다. 아닌 게 아니라 전역(轉役)을 한 달여 앞둔 지금 지난 23개월을 정말이지 과장을 조금 보태서 산전수전(山戰水戰) 다 겪었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그런데 그렇게 길고 고단하던 나날이었음에도 결코 싫다거나 기억을 멀리하고 싶지는 않다. 오히려 눈을 감으면 아련히 추억하게 하는 그런 시간이었다. 많은 이들이 자신들의 군 생활을 짓궂게 얘기하면서도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이따금 향수에 젖는 것도 나와 같은 이유에서임이랴. 군에서 복무하며 보냈던 청춘은 그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다.

  부대에서는 다들 밤샘 근무를 기피하지만, 이 일도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다. 사람들과 항상 부대껴야 하는 병영 안에서 나 홀로 차분히 보낼 수 있는 시·공간이 제공되는 몇 안 되는 기회다. 뼛속 깊이 아려오도록 차가운 새벽공기를 쐴 수 있고, 산등성이 너머로 조신(操身)하게 얼굴을 내미는 아침 해도 볼 수 있다. 내가 이렇게 하룻밤을 지샘으로 밖에 있는 내 가족과 친구들이 마음 편히 잘 수 있다고 생각하면 왠지 모를 뿌듯함으로 가슴이 벅차다. 밤샘 근무를 할 때만 느낄 수 있는 만족과 보람이다. 그렇게 맞이하는 하루는 참으로 넉넉하고 마음이 편안하다. 그래서 밤샘 근무를 하는 근무자들은 서로 더욱 유대감(紐帶感)이 생기고 정()이 붙는다. 우리로 인해서 밖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하룻밤 안녕이 지켜졌을 것이기에.

  다들 혀를 내두르게 잔혹한 청춘을 보내야 한다는 우리 세대지만, 그게 무슨 대수겠는가. 잔혹한 청춘도 그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다. 열정적으로 고뇌하고 자신을 갈고 닦음으로 인해 우리의 청춘은 보람차고 풍부해진다. 태평한 세월을 맞아 향락으로 젊음을 허비(虛費)할 바에야 나는 지금의 잔혹한 청춘을 사는 게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마침내 지독한 시간이 지나가고 떠오를 선홍빛 아침 해를 기다리고 있자면 가슴 가득 차오르는 설렘과 흥분이 나를 강렬히 자극한다. 그 때 또한 내가 밤을 지새우고 맞이했던 하루처럼 넉넉하고 마음이 편안할 것이다.

 

 

 

 

그 산의 이름은

 

 

  영화 <집으로>는 서울에서 살던 소년이 시골에 있는 외할머니 집에 살며 겪게 되는 이야기로 뭇 관객들의 가슴을 애잔하게 만들었다. 나도 그 영화가 진하게 풍겼던 향토적 정서(情緖)를 좋아하지만, 안타깝게도 직접 그런 경험을 가질 기회는 없었다. 우리 외가는 방배역 사거리 한복판에 있었다.

  방배동 번화가(繁華街)에 위치한 외가는 나에게 아주 특별한 장소다. 어렸을 적, 나는 방학이 되면 아예 짐을 궤짝으로 싸서 한 달 정도는 외가에서 지내야만 했고, 이 관행은 열 살 무렵까지 계속됐다. 외할머니는 당시 예순을 넘긴 연세셨는데도 배드민턴을 무척 열심히 하셨다. 나는 매일같이 할머니를 따라서 살을 아리는 새벽 공기를 뚫고 당신의 배드민턴 경기를 보러갔다. 경기장은 번화가에서 한 블록 떨어진 어느 야트막한 야산(野山) 속에 위치했었다. 새벽에는 짙은 안개로 모습을 감춘 그곳은 어린 나의 눈에도 화려하고 번잡한 방배역 사거리와는 이질적인 곳이었다.

  졸린 몸을 채근하여 배드민턴장에 당도(當到)하면 방배동 전역(全域)에서 모인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미리 출사(出師)를 준비하고 계셨다. 주최 측은 유일한 아동(兒童)인 내가 오면 양은주전자에 갓 탄 율무차를 무료로, 그리고 제일 우선으로 제공했다. 고소한 잣 향기가 은은하게 감도는 율무차의 온기(溫氣)는 하얀 입김이 서린 새벽 산의 냉기를 잠재우는데 더없이 적합한 맞수였다. 그 이후로 나는 또래 아이들과는 달리 달달한 음료수보다 율무차를 더 선호하는 취향을 갖게 되었다. 그 산에서 만났던 사람들은 어린 나에게는 낯설게 느껴졌지만 따뜻한 정을 주전자에 담아 나눠주었고, 덕분에 그들에게 쉬이 동화(同化)될 수 있었다.

  배드민턴 경기가 없는 날에 나의 입산(入山)을 담당하는 분은 외할아버지셨다. 할아버지와 나는 양손에 배당된, 서로 합쳐 총 네 개의 플라스틱 약수통을 들고 또한 새벽에 그 산을 방문하는 것이 하루의 시작이었다. 산 입구 언저리에 위치한 약수터에서 약수통을 전부 채운 다음에는 본격적인 등산이 개시(開始)된다. 해발고도(海拔高度) 121m의 야트막한 산이지만, 그래도 등산로(登山路) 곳곳에 위치한 볼거리는 적지 않았다. 우선으로 만나게 되는 것은 꽤 오랜 시간동안 방치되었음이 묻어나는 군() 구축물인데, 용도는 아마 보병들의 벙커 정도로 짐작 간다. 그리고 봉우리에 오르면 방배·사당 일대를 한 눈에 조망(眺望)할 수 있는 기품 있는 정자가 나온다. 그 뒤로는 아담한 무명(無名)의 절을 끼고 무려 효령대군의 능()까지 마주할 수 있으니, 부근 주민들조차 이름을 모르는 야산치고는 품고 있는 내력(來歷)이 상당하다. 그 산을 오르내리는 많은 어른들이 각자 유구(悠久)한 역사를 감추고 있듯이.

  우리 할아버지도 산을 오르는 와중에 당신의 내력(來歷)을 손자에게 아낌없이 들려주신다. 단골 소재는 6·25 전쟁 당시에 백마고지(白馬高地) 부근에서 소대장으로 지낼 적과 전후(戰後) 오대산에서 중대장까지 지내시던 시절의 무용담(武勇談)이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하산을 완료하고 약수통을 챙기고 있자니 할아버지가 근처에 핀 진달래꽃을 꺾어서 가져오셨다. 그리고는 나에게 한 번 먹어보라고 이를 건네셨다. 나는 꽃을 먹으라니 도대체 무슨 영문인가 싶어 머뭇거리고 있는데, 당신은 능숙하게 꽃을 집어 한 입에 드시는 게 아닌가! 나도 따라서 꽃을 어금니로 잘근 씹었더니 꿀이 찔끔 새어나와 혀를 적셨다. 할아버지는 이것이 물자가 부족한 시절에 항상 배를 주리는 병사들을 달래는 하나의 방법이었다고 소개해주셨는데, 나는 다른 꽃들도 따서 먹느라 그것까지는 별로 주의 깊게 듣지 않았다. 어린 나에겐 꽃에서 꿀이 나고 그걸 먹는다는 당연한 사실이 무척 신기했다.

  봄날에는 진달래꽃을 따느라 고사리 손이 바빴다면 가을에는 도토리를 줍는 일로 분주(奔走)했다. 가을이 깊어져 도토리 열매들이 나무에서 충분히 떨어졌다 싶을 때면 할머니는 마대(麻袋)들을 꺼내 나와 함께 산에 오르셨다. 그 날의 일과(日課)는 마대를 꽉 채우다 보면 대강 끝난다. 도토리를 한창 골라내다가 잠시 쉬고 있노라면 할머니의 이야기보따리가 풀리기도 하는데, 노부부(老夫婦)의 입담이 모두 혀를 내두를 만했다. 할머니는 그렇게 어렵사리 모은 도토리를 가지고 돌아오시면 묵을 쑤셨다. 할머니가 직접 만드신 수제(手製) 도토리묵의 맛은 가게에서 파는 묵과는 엄연히 급()이 다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산이 울긋불긋 단풍이 들 무렵이면 언제쯤 할머니랑 도토리 원정(遠征)을 가나 목이 빠지게 기다리곤 했다. 산은 가을마다 도토리를 넉넉하게 챙겨주었다.

  우리 사회는 언제부턴가 전자기계나 자동차, 집 같은 소비재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사람마저 스펙을 기준 삼아 평가하여 가치를 매기는데 익숙하다. 그런 작금(昨今)의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내 유년 시절의 추억을 간직한 그 산은 형편없는 산일 것이다. 높이는 100미터를 겨우 넘고, 산세(山勢)나 넓이 또한 한라산이나 지리산 같은 명산(名山)에 비할 바가 못 된다. 그런데, 그런들 어떠랴. 제자리에서 점잖게 아득한 세월을 살아온 이 산은 오늘도 수많은 방배동 주민들의 곁에서 그들이 휴양할 수 있는 터전을 내어준다.

  우리나라에는 내로라하는 찬란하고 수려한 산도 많지만, 이처럼 이름 없이 우리 곁에서 함께 일상(日常)을 흘러가는 산도 많다. 이들이 한데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기에 우리 국토가 살기 좋은 금수강산(錦繡江山)이라 불리지 않나 싶다. 나는 최근에서야 우연히 그 산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그 산의 이름은 매봉재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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