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초

by 하이에나김 posted May 2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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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초

 

 

   시리다. 2평 남짓 방안을 가득 채운 매운 향내는 콧끝을 자극한다. 장작에 달궈진 온돌은 두 갈래로 갈라져 널브러진 빨간 고추들을 살랑 간지럽힌다. 창자를 드러낸 허연 고추씨 매운 내음이 온돌방을 이미 점령해 버렸다.

   “엣~취~

   두 세 번의 세찬 기침에 잠이 확 달아났다. 살짝 열려진 방문 사이로 저 멀리 종종걸음으로 들어오시는 어머니가 어슴푸레 보인다. 머리에는 자신보다 큰 바구니를 이고 낑낑 힘겨운 모습이 여력하다. 분명 내 코를 자극할 그놈들이 잔뜩 담겨있으리라.

   "엄니, 언제 나가신겨?"

   "이놈아, 이제 일어난겨? 고추 따러 가자고 어제 그캐 얘기했구먼.“

   어머니는 잔소리를 멈춘다. 그래도 농사일 도와주는 아들 덕에 힘든 고추농사를 이어온 걸 아는 눈치였다. 고추농사는 한 여름 뙤약볕과의 싸움이다. 빨갛게 익기가 무섭게 그것들을 따야만 했다.

   해가 나오기 전 새벽녘이 일하기에는 제격이다. 결국 햇볕과의 싸움이 아침잠과의 싸움으로 바뀌는 것이다. 며칠 째 계속된 싸움에서 난 지고 말았다. 오늘은 결국 잠을 못 이기고 늦잠을 자고 말았다. 어머니는 그런 아들이 안쓰러워 깨우지도 알고 슬며시 혼자 나가셨던 게다.

   새벽녘, 그래도 아침공기는 신선했다. 얼굴을 스치는 기분 좋은 차가운 바람을 가르며 우리 모자는 그렇게 고추를 땄더랬다. 그렇게 고추를 팔아 어머니는 우리를 키우셨다.

 

   ‘아이고~

   새벽녘에 깨신 어머니의 대성통곡이 들렸다. 언제나 조용하던 어머니, 그간 들어보지 못한 다급한 목소리에 가슴이 철렁했다. 태양초가 좋다며 건조기를 거부하고 굳이 도로변 한 켠에 고추를 말리시던 어머니였다. 그렇게 정성들여 최상품을 만든 고추가 송두리째 사라진 것이다. 어젯밤 유난히 짖어대던 개 울음소리가 수상하긴 했다.

   일 년 농사를 망친 걱정보다 몸이 약한 어머니가 더 걱정이었다. 없는 살림에 가족 생계를 위해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농사일을 이어가던 어머니, 밤마다 끙끙 앓는 소리로 주무시고 구부정한 허리를 한 손으로 지탱하며 일어나 새벽일 나가시던 어머니였다.

   얼마나 놀랬으면 다리에 힘이 풀려 마당에 철퍼덕 주저앉아 울음을 멈추질 못했다. 어머니는 천근만근 두 세배는 더 무거웠다. 바싹 말라 평상시 같으면 가뿐히 업었을 어머니를 간신히 이끌고 방안에 눕혔다. 그렇게 사흘을 앓아 누우셨다. 그 해 우리 집은 보릿고개가 일 년 동안 지속되었다. 어머니는 이웃집 품앗이를 죄다 찾아다녔고, 아버지는 매일 중노동 현장을 기웃거렸다.

   시련은 얄궂게도 연이어 닥친다. 고추도둑 사건 후 삼 년째 되던 해였다. 두 번째 곡소리는 아버지 때문이었다. 고추는 탄저병이 심해 주기적으로 농약을 살포해야 한다. 전날 숙취에 정신을 놓아 버린 탓에 농약물에 그만 제초제를 섞은 것이었다. 농약의 효과는 실로 놀라웠다. 도박 빚에 시달리다 자살한 건넛마을 김씨 아저씨도 제초제 반병 마시고는 깨어나질 못했다. 두어 시간 후 고추 잎사귀들은 힘없이 말라 비틀어져 갔고, 어머니 가슴도 타들어갔다. 그 길로 또 사흘내내 이마에 물수건을 얹고 들어누었다.

   누군가에게 태양초는 햇볕에 잘 마른 친환경 농산물이지만 나에게는 매운 고추만큼이나 속 쓰린 추억이기도 하다. 혀끝을 자극하는 매운 맛은 식도를 에이며 내려가지만 침샘을 자극해 식욕을 북돋우기도 한다.

   5월 어린이날쯤 되면 시골 어르신들은 도시에 나갔던 자식들을 불러 모은다. 어린이날 선물이라도 주려는 게 아니다. 꼭 그맘때쯤 고추를 심는다. 봄 기운도 어느덧 사라지는 시기지만 아침나절은 신선한 바람이 분다. 내 피부와 세포를 자극하는 바람에 온 신경이 반응한다. 쓰라린 추억이면 어떠랴. 자근자근 익어가며 맛을 내는 태양초처럼 우리 가족의 힘겨웠던 삶도 세월에 더욱 농후해진다.


작성자 : 김희정, 010-6575-7662, gold030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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