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회 창작 콘테스트 수필 응모

by 적극적방관자 posted Nov 2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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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유배지에서

고만고만한 산들에 에워싸인 영남의 한 외딴 골짜기. 외람되게 우뚝 솟은 송전탑과 그 밑으로 기어 들어가는 것이 못내 분해 못 견디겠다는 듯이 우람한 고가도로가 도시 주변풍광과 뒤틀림을 자아내고 있다. 그 곳에 역시 어울리지 않기는 마찬가지인 초라한 중년의 한 사내가 있다. 지금은 공단이라는 이름으로 더러 공장건물들이 들어서 이질감을 조금은 덜고 있지만 그 옛날, 조선왕조 때에는 아마도 이곳이 천혜의 유배지쯤 됐으리라

조선 광해군 때의 사대부 박엽에게는 시문에 뛰어난 소백주라는 애첩이 있었다. 본시 부안기생이던 소백주는 미모도 출중했지만 시문에 남다른 자부심이 있어 비록 기생 신분이나 콧대가 셌다고 한다. 그녀는 자신을 탐하는 양반들에게 시를 짓게 하여 자신보다 재주가 못하면 퇴짜의 구실로 삼곤 했는데 내로라하는 많은 양반들이 그녀를 탐했지만 높은 문턱을 넘기는 쉽지 않았다는 것이다혹 권문세가가 위력을 행사하는 경우엔 장하(杖下)의 귀신이 될 각오로 버텼다고 하니 비록 일개 기생이었지만 기개가 장부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그런 그녀를 첩 삼은 걸 보면 박엽의 시문과 인품 역시 예사롭지 않았을 것이고.

상공(上公)을 뵈 온 후에 사사(事事)를 받자오매

졸직(拙直)한 마음에 병()일까 염려더니 

이리馬 저리車 하시니 백년동포(百年同抱) 하오리다

《상공》은 박엽을 의미하거니와 장기의 궁()과 상(), 《사사》는 일마다 또는 매사의 의미와 함께 장기의 사(), 《졸직》은 옹졸하고 고지식하다는 뜻이지만 여기선 아녀자의 좁은 소견, 즉 자신의 마음을 의미하며 장기의 졸(), 《병》은 앓는다는 뜻과 함께 장기의 병(), 《동포》는 함께 안는다는 뜻과 함께 장기의 포()를 형상하였다. 그리고 《이리마 저리차》는 말 그대로 이리하마 저리하자란 의미를 담고 있으면서 《이리마》에서 《마》는 장기의 마(), 《저리차》에서 《차》는 장기의 차()로 형상하였다.

평양감사로 있던 박엽이 손님과 장기를 두며 소백주를 불러 시를 짓게 했더니 그녀가 즉석에서 지어 올린 시라는 것이다. 장기판에서 사용되는 장기쪽의 이름을 모두 빗대 자신과 박엽의 애틋한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그녀의 재치와 지혜에 탄복하는 한편, 몇 백 년 전의 사람 박엽에게 가당찮은 질투심까지를 느낀다실제로야 어떻든 박엽이 임금의 미움을 사 이곳으로 귀양 온 걸 상상해 본다. 사방이 막힌 골짜기에서 무척이나 답답하고 억울했을 박엽의 호연지기에 대해서보다는 손님 면전에 불러내 자랑할 만큼 애지중지하던 연인 소백주에 대한 그리움이 얼마나 절절했을까에 초점을 맞춘다. 오늘날과는 달리 소식 주고받을 방법이 거의 없는 상황이었을 걸 감안하면 그들의 사랑이 아무리 절절했던들 그걸로 끝이지 않았을까 싶다.

믹스커피 한 잔을 옆에 두고 계단에 걸터앉았다. 담배에 불을 붙여 한 모금 빨고 커피잔을 들었더니 그새 하루살이 한 마리가 잔속에 빠져 있었다. 커피물의 온도를 감안하면 녀석은 아마도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즉사했을 것이다. 당연히 그곳은 녀석이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니었다. 무엇이 녀석을 유혹했을까? 아마도 믹스커피의 달콤한 향기에 취해 녀석은 자기 명을 재촉했을 것이다.지금 이곳 역시 내가 있어야 할 자리는 아니다. 아이러니하게 미물인 하루살이의 익사로 만물의 영장으로서 제 자리에 있어야 하는 것의 엄중함을 새삼 깨닫는다. 문제가 생겼을 때, 맞서기보다 피하는 방식을 택해 온 삶이 21년의 세월을 무위로 규정 당하고 빈손으로 내침을 당하고도 내리 그 타령인 것이 스스로 한심스럽다.

이런 주제면서도 풍류에서 채 헤어 나오지 못한 의식세계는 커피에 빠져 죽은 미물의 어리석음에 애써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목마른 나그네에게 샘물 한 바가지를 떠 주며 급히 마시다 사레라도 들릴까 싶은 염려에 부러 버들잎 한두 개를 띄워 주던 댕기머리의 고운 마음씨. 건져 낼 수단도 마땅치 않았거니와 댕기머리의 그 마음이 연상되어 후후 불어가며 커피를 마셨다.



 2. 이혼 보고서 (행복한 가정을 위하여)

낮으로 예보되어 있던 소나기가 아침부터 쏟아져 내렸다. 그러고도 하늘의 찌푸둥은 좀체 가시지 않고 실비가 계속되는 걸로 보아 아마도 오전 내내 이런 상태가 지속되지 않을까 싶다. 시간상으로 보면 딸들은 괜찮았을 터이나 애들 엄마는 여지없이 비를 맞지 않았을까 싶은 우려가 없지 않다. 그렇다 한들 그게 뭐 대수일까? 더 큰 것도 버리며 사는데.

버리며. 부부는 이혼절차를 밟고 있는 중이다. 더러 행복했던 순간들이 없지 않았겠으나 전체적으로 그리 행복했다 할 수 없는 24년여의 결혼생활을 청산하려는 것이다. 부부에겐 그 나이쯤의 큰딸과 5살 터울의 작은딸이 있는데, 어쩌면 이 두 딸이 과거 어느 시점에의 위기를 포함해 살얼음판 같던 부부의 결혼생활에 그나마 안전핀 역할을 해왔을 수 있다. 그런데 이제 그 가치들의 약발이 다 된 모양으로 이 낭패가 예상되는 부모의 치킨게임에서 딸들은 더 이상 제동력의 발휘를 거부하고 있다. 딸들은 말한다. 엄마, 아빠의 갭이 워낙 크다고

세상에 이혼하는 부부들은 많다. 빠르게는 신혼여행지에서 이혼을 결심하고 오는 초특급이혼이 있는가 하면 인생말년에 감행하는 황혼이혼도 있다. 이혼사유 또한 각양각색일 것이다. 배우자의 부정이나 과도한 음주로 인한 폭력행위, 또는 습관적인 도박으로 인한 재산탕진 등은 비교적 원인이 분명한 경우일 수 있다. 하지만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란 남녀가 부부란 이름으로 맺어져 오랜 세월을 함께 살다 보면 딱히 이런 경우가 아니라도 그 다름이 누적돼 피로감을 조성하고 그만 같이 살기 싫어질 때가 있다

이처럼 원인을 특정하기 어려운 대개의 경우 두루뭉슬하게 성격차이를 들기도 한다. 각설하고 어떠한 경우라도 어느 시점에 우리 이혼하자 합의하고 결혼을 감행하는 부부는 없을 것이다. 주례가 있든 없든, 하객이 많든 적든 결혼하는 부부들은 모두 백년해로,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를 갈망한다. , 결혼에 이르기 전 과정에서는 배우자가 탐탁지 않았더라도 일단 결혼이라는 공증과정에 임하게 되면 누구나 채 해소되지 못한 불만일랑 묻어 두고 이런 마음을 갖는 게 일반적이지 않을까

결혼은 어느 일방에게 만이 아닌 남녀 모두에게 제약이기에 행복한 결혼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제약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마음자세가 반드시 필요하다. 제약을 기쁨으로 받아드리는 것까지야 어렵겠지만 그것이 굴레로 느껴지는 순간 파경의 금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럼 제약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마음자세만 가지면 행복한 결혼생활의 영위가 가능한 걸까? 유감스럽게도 앞서 말한 제약에의 수긍은 단지 전제조건일 뿐이지만 그마저도 온전히 지켜나가기가 어렵다는 데에 행복한 결혼생활의 딜레마가 있는 것이다.

현대인의 결혼생활은 결코 만만한 게 아니다. 결혼 당시의 마음가짐을 유혹하는 폭탄들이 도처에 널려 있는 것이다. 손 가까운 곳에 술과 도박이 있으며 배우자 아닌 선남선녀들과의 자연스러운 접촉이 사회생활이란 걸 통해 너무 쉽게 이루어진다. 문제는 이런 위험요소들이 산업화와 문명의 발달을 등에 업고 해악의 본 모습을 숨기고 있어 가려내기가 쉽지 않다는데 있다. 사람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보통사람으로 늙어 죽을 때까지 이것들로부터 한발 비켜 서있는 사람은, 글쎄? 모름지기 성자란 칭송보다 어딘가 좀 모자란 사람이라는 비아냥을 듣게 되지 않을까?

초심조차 지키기 어렵다면 행복한 결혼생활이란 불가능한 것일까? 지혜를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초심을 위협하는 산재한 위험들을 극복하기 위해서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람이기 때문에 실수 한다는 말이 의미하듯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다. 인간의 사악한 본성을 규제하기 위해 사람들이 합의해 만든 법이라는 것도 이 누구나 때문에 초범과 누적범의 처벌을 달리 한다. 축구에서도 퇴장 전에 경고가 있으며 야구에서 타자의 삼진에는 스트라이크가 무려 세 개나 필요하다

우리나라 형사처벌의 삼진 아웃 제는 이 야구의 삼진 제를 본 딴 것일 게다. 보통의 배우자들 역시 이 누구나의 한 사람이므로 실수할 수 있고 한 번의 실수는 병가지상사라고도 한다. 실수의 반복은 의당 중징계로 다스려야 하겠지만 한 번의 실수를 과도하게 응징해 가정을 파탄 내는 지경에까지 이른다는 건 지혜의 부족이요, 이만저만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실수의 무게에 따라서는 한번이라 해도 용서할 수 없는 것이 있을 수 있지만 그 정도 무게의 실수쯤이면 배우자 이전에 사회가 먼저 처벌을 하게 마련이다.

부부의 연령에 따라서 지혜의 적용이 달라질 수 있다.자녀 없는 젊은 부부의 경우, 굳이 삼진 제를 고집할 필요는 없겠다. 잘 안 맞으면 쿨하게 헤어져 각자에게 잘 맞을 만한 새사람을 만나는 게 서로를 위한 최선일 수 있다. 말년에 어렵게 황혼이혼을 감행하는 노부부의 사례에서 경각심을 얻을 수 있겠다. 배우자의 잘못이 무엇이든 간에 한번 참고 두 번 참고, 그러다 아이라도 생기면 또 그 아이들 때문에 참고 하다 결국 아이들이 다 제 삶을 사는 노년에 가서야 뒤늦은 새 삶을 찾으려 한다는 것이지만 그땐 이미 늦어도 너무 늦는 것이다

하지만 사춘기거나 결혼 적령기의 자녀들을 둔 사,오십 대 부부의 경우는 이 지혜의 필요성이 더 절실하다 하겠다. 부모의 이혼은 그 시기의 자녀들에게 적지 않은 상실감과 위축감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주변의 비우호적인 시선도 자녀들에겐 감당하기 버거운 무게일 수 있고. 반복되는 잘못으로 배우자뿐 아니라 자녀들까지 당사자의 퇴출을 원하는 경우는 물론 별개지만 실수를 저지른 당사자에 대한 배우자와 자녀들의 감정이 서로 다를 때는 좀 더 신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떠한 경우든 가정의 해체는 그 자체로 자녀들에게 상당한 데미지를 주기 마련이므로. 용서에 관해 예수는 "일곱 번씩 수백 번을 용서하라"고 설파하고 대중 앞에 끌려 나온 매춘부를 "죄 없는 자 돌로 치라"며 죄 없는 당신 스스로도 용서했다. ! 이쯤 되면 당신이 잘못을 범한 배우자를 용서하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만은 아니지 않겠는가.

흔히들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다. 바로 사랑에 대한 미혹이다. 보통 여성들은 변치 않는 사랑을 갈구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사랑의 속성은 변하는 것이고 변치 않는 사랑은 종교서적의 아가페거나 대중가요 가사에나 존재할 뿐이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란 말처럼 아름다움은 그리 오래가지 못하고 더욱이 매일 보는 아름다움은 그 식상함이 더 빠르다. 이 식상한 아름다움을 대체하는 것이 이해와 배려, 그리고 안쓰러움이다

사디즘이나 마조히즘의 추종자라면 모를까, 배설을 아름답게 보는 사람은 없다. 결혼 전, 아무리 클레오파트라급 미모를 지녔더라도 밥 먹고, 쌀 거 싸고, 그렇게 몇 년 함께 살다 보면 식상할 수밖에 없다. 미모는 여전하다 해도 미모 외적인 이미지가 덧입혀져 보는 시선이 달라지는 것이다. 아줌마들의 로망 하수영의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에서 화자는 아내의 미모가 여전해서가 아니라 거칠어진 손마디가 안타깝고 잔주름이 늘도록 자신을 믿고 따라온 게 애처로워서 다시 태어나도 당신만을 사랑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 바로 안쓰러움인 것이다. "사랑한다" 말하지 않는다고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고마워하고 걱정하는 마음, 그게 곧 사랑인 것이다.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서 엄마를 창조했다는 말이 있다. 여자의 위대한 변신을 극찬한 이 선각자의 말은 사뭇 의미심장하다. 여자는 경우에 따라 아빠도 될 수 있지만 남자는 제 아무리 잘 나도 엄마가 될 수 없다. 아줌마들이여! 여자이기를 고집하기보다 엄마의 지위를 한껏 누려보는 건 어떨지.



수필의 지평 확장을 위하여

"수필(隨筆)을 시()나 소설(小說)과 같은 문학의 한 축으로서 동등한 위상을 부여하기는 어렵다" 10여 년쯤 전, 40언저리에서 "수필을 씁네" 하고 나이 많은 어른들과 어울려 문학 동아리 활동을 할 때, 중편소설로 본국 문단에 등단한 한 어른이 자신을 지도한 교수의 말이라며 내게 한 말이다. 강산이 변할 만큼의 짧지 않은 세월을 간직해 온 일이기는 해도 무슨 원한 새기듯 절치부심할 일은 아닌 탓에 그이의 표현 그대로를 옮긴 건 아닐 수 있다. 그렇다 해도 그 의미까지 다르지는 않는바, 그이의 말은 곧 수필은 시나 소설에 비해 문학으로서의 격이 떨어진다는 의미였다. 그 말을 하면서 그이는 지도교수를 끌어다 댔지만 좁은 소견에 그의 그릇이 작아 보여 한동안 그를 멀리 했던 것을 기억한다. 

같잖은 글에 대한 인사치레 성 찬사에 고무되어 분별없이 설치는 천둥벌거숭이의 경거망동을 경계코자 하는, 선배의 깊은 뜻이 아니었을까 싶은 기특한 생각을 한 건 한참 후의 일이다. 딴은 어려운 이민을 살면서 소설로 본국문단을 넘어선 그이의 입장에서 제대로 문학을 공부하지도 않은 주제에 고작 잡글이나 써대면서 수필을 들먹거리는 개뼉따구의 중뿔남이 기꺼웠다면 되레 이상한 일이었겠다. 같은 세월 10여 년을 보낸 지금, 나름 발전이 없진 않겠지만 아직도 잡글 수준을 크게 벗지 못한 나와는 달리 두어 권의 시집과 소설집을 내고 하찮게(?) 여기던 수필에도 발을 담그는 등 3장르를 모두 아우르며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그를 보면 역시 훗날의 깨우침이 맞는 거였지 싶다. 

수필을 흔히 40대 이후의 문학이라고 한다. 소설같이 상상력을 무기로 가공의 이야기를 엮는 것도 아니고, 간결한 시어를 동원해 짧은 글에 난해한 의미를 함축하는 시와도 달리 삶의 순간순간 느끼는 진솔함을 담담히 담아내는 것이 수필이고 그러자면 인생의 단맛, 쓴맛을 고루 맛본 경륜이 필요할 것이기에 그만한 나이를 전제한 게 아닐까 싶다. 물론 과문한 필자의 짧은 생각일 수도 있지만 그렇더라도 전혀 얼토당토않은 논리는 아니리라

그런데 이 농익은 삶의 진솔함을 담아내는 일이 어디 그리 쉬운가? 나이 많다고 될 일이 아닌 건 고사하고라도 소재의 채택에서부터 상당한 제약이 따른다는데 문제가 있어 보인다. 염치를 아는 인간이다 보니 자신을 남에게 가감 없이 보인다는 게 여의치 않아 좋은 이야기, 밝혀도 그리 흠 잡히지 않을 이야기 밖에 쓸 것이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사람 누구나 감추고 싶은 내면이 있을진대 점잖은 중년이 타인의 손가락질을 무릅쓰고 내면의 부끄러움이나 욕망 따위를 버젓이 드러낼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속내를 들추어냈어도 내 이야기가 아닌 체 둘러칠 수 있는 소설과 그럴 수 없는 수필의 이 한계가 앞서 언급한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수필의 치명적인 약점 아닐까 생각해 본다.이 한계를 극복하지 않는 한 수필에 대한 그들의 편견은 쉬 바뀌지 않을 것이다. 어찌 이들뿐이랴

이쯤에서 그 동안 궁금했던 점 하나를 짚어보아야겠다. 수필의 세계에도 다른 장르 기웃거리지 않고 오로지 수필 하나만으로 문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대가의 반열에 오른 분들이 적지 않거니와 앞서 언급한 수필에 대해 어줍잖은 생각을 지닌 사람들의 망발이 이분들 앞에서도 당당함을 보일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전제한 대로 이것은 부단한 정진으로 제대로 된 글을 쓰지 못하고 10여 성상을 여일하게 잡글이나 끄적이는 한 사이비의 공연한 딴죽일지 모르지만 그 대가들 보다 훨씬 많은 대가지망생들을 위해서라도 한번은 짚어봐야 할 일 아닐까 싶다. 아울러 그들의 편견을 바꾸자면 수필을 쓰는 사람들 스스로도 수필의 지평을 확장하는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천편일률적인 좋은 이야기, 아름다운 여정만 주구장창 우려먹을 게 아니고 때로는 부끄러운 이야기, 점잖지 못한 욕망 같은 것도 글로 올려 독자들과의 공감대를 넓히는 것도 한 방편일 터, 감히 이의 시도를 제안해 본다. 독자들 역시 사람인 탓에 아름다운 추억만 아니라 더럽고 추한 이야기, 부끄러운 욕망 따위도 많이 갖고 있을 터인즉, 신선놀음 같은 글보다 부대끼며 살아온 애환이 녹아 있는 글을 볼 때 글 쓴 이에 대한 동류의식이 형성되고 그것이 곧 호감이요, 친밀도로 발전하지 않을까 싶어서다. 찬사를 받든 지탄을 받든 그건 전적으로 글 쓰는 이의 역량에 달린 문제이고.

언제인가 실험을 표방한 한 수필전문지에서 나름 신선한 충격을 받은 일이 있다. 수필에 쓰긴 좀 그런 단어, 섹스를 버젓이 제목에 올린 한 여류수필가의 글을 접하고 받은 감상인데 본문에 아들의 군 입대가 언급된 점으로 미루어 40대 초, 중반 정도로 작가의 연령을 유추했었다. 작가는 그날 우리는 격렬하게 서로를 탐했다 정도의 표현으로 남편과의 섹스를 글에 담았는데, IMF로 모든 것을 잃고 죽음을 생각하던 그 절망의 정점에서 돈 없이도 할 수 있었던 섹스가 탈출구 노릇을 했고 그것에 탐닉함으로써 절망을 이겨낼 수 있었다 고백하고 있다

소설처럼 적나라한 묘사는 없었을지언정 자신과 남편의 내밀한 이야기를 까발린 건데 보통의 마음가짐으로 한 건 아닐 것이다. 그건 작가가 의도했든 아니든 자신의 희생을 담보로 수필의 한계를 뛰어넘는 개척의 큰 걸음이리라. 작가의 도량에 경의의 큰 박수를 보내는 것으로 양해 없이 작가를 끌어온 무단에 용서를 구한다.

수필이 40대 이후의 문학이고 삶의 경륜이 그 바탕을 이룬다고 보면 남자나 여자나 무수히 접했을 섹스 또한 삶의 한 부분일 터이고 더하여 그만한 세월을 살았으면 혼외의 일을 포함해 통념에서 벗어난 사랑 또한 있을 수도 있을 터, 이런 것까지 끌어내 글의 소재로 삼는다면 수필에 공감하는 독자들은 지금보다 훨씬 많아질 것이고 앞서 언급한 일부 문학계 인사들의 흰소리를 더는 듣지 않아도 될 것이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고 누구든 과거 없는 사람은 없을 테니 말이다. 다만 그것들이 워낙 내밀한 것이어서 드러내자면 보통이상의 용기와 개척정신이 필요한 일이겠다. 또한 그럴 경우 배우자를 비롯한 가족들과의 관계에 금이 가거나 힘들여 쌓아온 이미지의 추락 등 반작용 역시 없지 않을 터, 그걸 감수할 배짱도 갖추어야 할 것이다. 결국 앞서 밝힌 바대로 글 쓰는 이의 역량이 소화해야 할 문제인 것이다. 앞서의 여류가 자칫 허접한 관음증으로 빠질 수도 있는 읽는 이의 주의력을 수려한 문장력으로 본질에 묶어 놓았던 것이 좋은 예 아니겠는가.

유교의 도덕률과 관습으로 백성을 옭아매던 조선왕조가 망하고 주권재민의 대한민국이 건국된 지 60년을 넘기며 성()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도 참 많이 바뀌었다. 남녀7세부동석남녀7세 지남철로 바뀌어 유치원 갈 나이만 되어도 이성 친구는 필수가 됐고 남자든 여자든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동정을 간직하고 있으면 무슨 천연기념물 취급을 받는다 한다. 뿐인가? 특별한 사회활동 없는 전업주부조차도 애인 하나쯤은 필수라고 하며 나이 들어 홀로된 어르신들도 새 배우자 마련에 예전과 달리 적극적인 세상이 됐다고 한다. 70,80 노인들의 성생활을 다룬 영화가 개봉되고 연인들끼리 자신들의 성생활을 비디오로 찍어 기념으로 간직할 만큼 남녀노소에 구애 받지 않고 성 담론이 만연한 세상이다

문학은 시대상을 반영한다고 한다. 소설에 담기는 시대상이 수필에 담기지 말라는 법은 없다. 이대로 괜찮은가? 화두를 제시하고 바람직한 방향으로 선도하려는 노력은 관두고라도 변방에서 강 건너 불구경하듯 뒷짐 지고 안주해 오던 지금까지의 자세는 지양해야 하지 않을까? 깨지고 터져 만신창이가 될망정 어울려 함께 하는 것이 까마귀 골의 백로 신세보다 나으리라

5공 때 국회의원을 지낸 한 소설가는 "소설을 쓰려면 창녀촌도 가 봐야 한다"고 공인으로서는 다소 하기 어려운 말을 공석에서 하곤 했다. 소아마비로 한쪽 다리를 저는 그가 얼마나 많은 창녀들과 몸을 섞었는지는 모르지만 그의 소설은 산동네 하층민들의 너절하지만 사람의 냄새가 물씬 나는 삶을 묘사하고 있다. 이런 리얼함이 소설만의 자양분인 건 너무 억울한 일 아닐까? 수필 쓰는 사람들 중엔 훨씬 더 다이내믹하고 드라마틱한 삶을 살아온 사람도 많을 것이다.

요즘 쇼프로 중에 나는 가수다란 프로의 인기가 대단하다고 한다. 유감스럽게도 필자는 짜고 치는 고스톱같은 쇼프로를 좋아하지 않는 탓에 안 보지만 아내나 두 딸은 참 열심히 보는 모양이다. 그 열풍은 고소득 전문직 종사자들도 피해가지 않아 도처에서 나는 변호사다, 나는 기자다 등의 패러디를 양산하더니 급기야 성직에까지 침투해 어느 목사의 나는 목사다란 자기선언까지 이끌어 냈다. 이 바람이 허리케인이 되어 우리 수필가들도 당당히나는 수필가다라는 자기 선언을 하는 그날이 앞당겨지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그나저나 영광의 그날이 와도 혼자만의 편견으로 국민적 관심거리인 나가수를 보지 않는 것처럼 필자의 마음 그릇이 여전히 잡글 수준에 머물러있지 않을까 그게 또 걱정이다.



본명: 이종신

E-mail: jsl7021@naver.com

HP No: 010-5049-76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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