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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꾸지 않았던 세대 




 부모와 자식 간의 감정의 골이 깊어진 시대이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분명 살아온 사회적 배경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대한민국은 1960년대를 기점으로 근 삼십 여년 만에 기적이라고 불리 울 만큼의 큰 폭의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아버지의 말씀을 빌리자면, 우리 부모님 세대의 서민층을 기준으로 생활상을 들여다보면 하루 세 끼 중 한 끼는 고구마나 감자로 배를 채워야 했던 집도 있었고 패스트푸드 등 먹을거리도 지금처럼 다양하지 않았다. 한 집안에 경제적인 활동을 하는 사람은 가장 한 사람이었고 주로 시골 같은 경우는 농사일이나 과수원 일을 했기 때문에 가정의 구성원들이 모두 일손을 도와야 했다. 우리 아버지도 매일 학교가 끝나면 친구랑 축구를 하고 싶은데도 일찍 들어와 아버지의 일손을 해가 떨어질 때까지 도와야 했다고 한다. 한 번은 친구와 축구를 하다고 들어와서 아버지께 호되게 맞았다고도 한다. 아침밥상은 밥, 나물, 간장 이런 식으로 소소히 나오고 점심은 고구마나 감자로 많이 때웠고 저녁은 아침에 남은 상을 그대로 먹었다고 한다. 다이어트를 하려고 일부러 끼니를 거르고 밥을 조금씩 먹는 자녀들을 볼 때면 아버지는 허허 웃음만 지으셨다. 그때는 없어서 못 먹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자주 아버지께 물어보는 질문 들이 있다. “아버지는 제 나이 때 무엇을 할 때가 가장 행복했어요?” “아버지는 꿈이 무엇이었어요?” “아버지는 미래에 어떤 삶을 살고 싶었어요?” 그러면 이상하게도 아버지는 쉽게 답을 못하셨다. 그렇게 몇 번을 물어도 답을 안 하시는 아버지를 볼 때면 꿈이 없으셨나?’ ‘자신의 삶에 대한 열정이 없으신 분인가?’ ‘왜 진취적이지 못하실까?’라고 혼자 생각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어느 날은 아버지가 입을 떼시며 내가 물었던 질문들에 대한 답을 해주셨다. “그때는 나의 꿈에 대해 생각하고 미래에 대해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던 것 같구나. 그저 하루하루 배가 고프지만 않게 그리고 눈앞의 보인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그저 그렇게 다들 살았던 것 같아. 그리고 그때는 한 집안의 가장의 의견이 절대적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큰 형은 대학에 가고 누이들은 시집을 빨리 가고 막내인 나는 아버지의 일을 묵묵히 돕는 것이 당연한 순리라고만 생각했지. 매일 아버지께서 방과 후 끝나자마자 집에 와서 일을 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그저 학창시절에는 친구들과 축구 한 게임이라도 더 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단다. 대학은 갈 생각도 못 했고 그저 스무 살이 된 후 광주로 올라와 할 수 있었던 게 사업이었고 그 뒤 너희 어머니와 결혼한 뒤 지금은 자식이 있는 가장으로서의 책임감 하나로 열심히 살아올 뿐이었지. 너희들이 참으로 진취적으로 살아가 주어서 고맙구나. 그리고 자신의 뜻대로 꿈을 펼칠 수 있는 너희들이 참으로 부럽단다.” 이 말씀을 듣고 나는 내가 태어난 뒤의 시대적인 환경과 태어나기 전 아버지가 살았었던 시대적, 국가적인 환경이 많이 달랐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나의 어린 시절도 너무나 가정형편이 어려웠었고 솔직히 대학등록금도 비용이 저렴한 국립으로 왔지만 한 학기에 200만원을 오롯이 다 내고는 다니지 못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요즘 시대는 참으로 혜택이 많다. 나는 상위 성적을 유지해서 지금껏 장학금 혜택을 많이 받을 수 있었고 아버지가 화물차 운전사라서 한국도로공사나 화물복지재단 같은 곳에서도 성적이 우수하면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혜택들을 부지런히 챙겼다. 그리고 그리도 꿈에 그리던 해외 교환학생도 미래에셋박현주재단을 통해 520만원이라는 큰 장학금을 받아 나갈 수 있었고 그 외 대학시절 4년 동안 중고등학생 멘토링 활동을 꾸준히 해오면서 내 용돈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렇든 내가 살고 있는 사회는 가정형편이 어려워도 나름 노력이라는 것을 하면대학도 다닐 수 있고 해외에서 공부도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대외활동 들도 마음껏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요즘 기업들은 사회적 공헌 차원에서의 복지혜택을 많이 제공하고 있다. 지금은 해외여행도 보편화 되었고 사람들은 한 국가에만 한정되지 않고 다양한 국가에서 공부나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무엇을 먹을까?’ ‘어떻게 먹어야지 맛있게 먹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시대가 왔고 최첨단 과학기술이 발전하면서 누구든 스마트폰, 태블릿PC 등으로 거리의 제한 없이 교류가 가능해 졌다.

하지만 이와는 너무나 대조적으로 아버지가 살아오신 사회는 달랐다. 상위층을 제외하고는 모두들 하루하루 끼니 굶을 걱정을 하였다. 일을 쉴 수가 없었다. ‘해외라는 것은 아주 먼 나라 이야기일 뿐이었다. 아버지는 어렸을 때 단 한 번도 해외여행이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도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고 한다. 대중교통이 발달하지 않아서 서울만 올라가려고 해도 비포장도로에 7~8시간은 족히 걸렸었고 비행기는 아주 부유층만 타는 교통수단이라고 인지하셨다고 한다. 대학은 집안의 큰아들 또는 둘째 아들까지는 가도 그 밑으론 거의 고졸이라고 하셨다. 패스트푸드니 해외 다른 나라 음식이니 하는 것은 보편화 되어있지 않았고 그때는 다이어트보다 통통한 사람은 복스럽게 생겼다고 부유의 상징처럼 부러움의 대상이었다고도 웃으시면서 말씀하셨다. 지금처럼 대학 내 장학금 시스템이 체계화 되어있지 않았었고 특히 광주에 사시는 아버지는 그 때의 대학생의 이미지는 학업보다는 나라를 위한 데모, 항쟁을 하는 지식인이라는 이미지로 기억된다고 하셨다. 1980년대 5.18 민주화운동을 말씀하시는 거구나 하고 깨달았다. ‘, 아버지가 살아오신 시대는 생존을 위한 삶이었구나.’ 사람의 가장 원초적인 본능은 생존의 본능이고, 매슬 로우의 욕구 5단계에서도 가장 근본 1단계가 생리적, 의식주 욕구이다. 생존이 가능한 여건이 채워져야 사람들은 안전, 자존감, 자아실현, 꿈 등을 생각할 여유가 생기는 것이다. 아버지가 내 나이 때 속했던 사회는 자신의 자존감, 자아실현, 꿈 등 보다는 눈앞에 보이는 먹고 사는 현실이 훨씬 더 컸을 터이다. 이런 점들을 고려한 뒤부터는 마냥 아버지가 꿈 없는 학창시절을 보냈다고 비난이나 실망 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안타까운 마음이 컸다. 아버지도 내가 태어난 시대에 태어났다면 아마도 지금과는 너무도 다른 삶을 살고 계실 것이다. 나보다 더 우직하고, 성실하시고 인내심이 강하신 아버지를 보면 무슨 일을 하셨건 정말 훌륭한 사람으로서 살고 계셨을 것이다. 지금도 나는 가끔 아버지의 미래에 대한 꿈을 물어본다. “아버지, 그럼 노년에는 어떤 삶으로 살고 싶으신가요?” 아버지는 역시나 답변을 하시기를 어려워하시는 듯하다. “, 글쎄. 지금까지처럼 살면 되겠지?”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게 나의 아버지이고, 아버지가 살아오신 시대를 말해주고 있고 그래서 우리의 부모세대는 어렵지만 꿋꿋한 성실함과 희생정신으로 지금껏 살아오신 존경스런 세대들이다. 나는 이런 아버지가 존경스럽고 자랑스럽다. 그리고 나에게 좋은 사회와 세대를 물려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이 크다. 꿈을 꿀 수 없는 자신의 환경을 탓하지 않고 그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나를 위해 나를 보듬고 있는 가정을 위해 아무 말 없이 하고 계시는 나의 아버지. 지금껏 불평불만 하나 없이 항상 나의 입장에서 생각해주시고 나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고 계시는 나의 아버지. 나는 그런 아버지가 너무나 감사했다. 이 글로는 그 마음 다 표현할 수도 없지만 작게나마 나의 아버지 그리고 우리 세대의 아버지 모두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표하고 싶다.

  • profile
    korean 2019.12.31 18:15
    수고 많으셨습니다.
    더욱 분발하시면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늘 건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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