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2차 창작콘테스트]우울의 근원

by 버섯두부된장찌개 posted Dec 09, 2019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우울의 근원




아마 2016년의 봄날이었던 것 같다. 그 날 난 부모님댁에서 나왔다. 아무도 없는 낮 시간에 짐을 몽땅 챙겨서 무작정 조부모님댁으로 들어갔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왔기 때문에 밤이 되어서야 부모님은 내가 집에 없다는 걸 확인하셨을 거다. 엄마에게서 연락이 왔었다.

“너 어디니?”
“나 이제 여기서 할머니랑 살 거야.”
“왜 갑자기?”

동생에게 방이 필요하니까. 동생은 고3이었고 한창 예민할 시기였다. 동생은 방이 없었다. 우리는 방 세 개짜리 집에서 살았다. 우리집은 아니었다. 우리 가족은 외할머니집에 얹혀 살았다. 가장 큰 방은 외할머니가, 작은 방은 부모님이 그리고 나머지 방은 누나인 내 차지가 되었다. 동생의 방은 없었다. 그래서 동생은 거실에서 침대 매트리스를 놓고 지냈다. 6년이나 그렇게 지냈다.


집을 나오기 전날 동생과 문자 메시지로 다툼을 했다. 화장실에 갈 때 나는 내 방 불을 켜고 다녀오곤 했는데 동생은 불빛이 잘 때 거슬린다는 문자를 보냈다. 화장실 갈 때 불 좀 끄고 다니라고. 곱지 않은 말투에 나 역시 말이 좋게 나가지 않았다. 불 안 켜면 안 보이는데 어쩌라고. 그렇게 몇 차례를 더 주고 받았다. 마지막에 화가 나서 그래 내가 집에서 나갈테니까 니가 여기서 살라고 했다. 그러든지. 동생의 대답이었다. 문자로 다툰 후 방에서 울었다. 아마 그 때 진단만 받은 적 없었을 뿐 이미 우울증에 걸려있었던 것 같다. 울면서 여기서 이제 못살겠다는 생각을 했다.


동생에게 방이 필요해서 나갔다는 건 표면적인 이유였다. 동생과의 싸움은 내가 집을 나가는 데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기는 했지만 그 역시도 가장 큰 이유는 아니었다. 가장 큰 이유는 내가 부모님집, 그러니까 외할머니댁에서 사는 게 너무 괴로워서였다. 외할머니랑 아빠가 서로 싫어하는 모습을 보는 게 괴로웠다. 외할머니에게서 아빠의 욕을 듣는 것도 딸로서 힘든 일이었다. 아빠가 외할머니를 퉁명스럽게 대하는 것을 지켜보는 일 역시 불편했다. 그 외에도 이유는 너무 많았다. 그 집에 있으면서 안 좋은 일이 너무 많았다. 집에 있으면 2016년 당시 기준으로 돌아가신 지 얼마되지 않은 외할아버지가 생각나곤 했다.


사고로 몸이 마비된 외할아버지를 집에서 외할머니와 엄마가 간병했다. 처음에는 병원에서 평일엔 외할머니가, 주말엔 엄마와 이모가 간병을 하셨는데 2년이 지나자 외할머니는 병원 생활에 지쳐버리셨다. 당연한 일이었다. 외할아버지는 몸을 거의 움직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인지 능력도 없었다. 사실상 70kg 짜리 아기를 돌보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병원비도 문제였다. 우리는 간병인을 쓸 돈도 없었으며 병원비도 부담스러웠다. 그렇게 외할머니는 외할아버지를 집에서 간병하기 시작하셨다. 간병이 사람 피말리는 일이긴 하지만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정상적인 부부였다면 상황은 그래도 조금 더 나았을 지도 모른다. 불행하게도 정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외할아버지는 외도를 했었다. 회사에서 일하다가 만났다는 어떤 여자와 야반도주를 했다. 외할머니가 몇십 번을 한스럽게 이야기했던 ‘그놈의 연금 통장’을 가지고 외할아버지는 집을 나갔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일이다. 외할아버지가 상간녀와 도망친 뒤 외할머니는 우울증에 시달리셨을 것이다. 우울증이 마음의 감기라고 받아들여지던 시기가 아니었으니 정신과에 가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겠지. 외할머니는 그대로 몸져누워버렸다. 엄마와 이모가 외할머니를 간병했고 외할머니는 기운을 차리셔서 외할아버지 없는 삶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내가 6살 때 외할아버지는 다시 돌아오셨다.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초밥집에서 외할아버지를 포함해 식구들이 다 같이 모였던 것 같다. 그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기에 나는 너무 어려서 멀뚱히 그냥 있기만 했다. 그냥 누군가가 울었던 것만 기억난다.


그 후에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는 같이 살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자식과 아내를 내팽개치고 돈까지 싸들고 나간 외할아버지를 외할머니는 절대 용서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중간에 아주 잠깐 같이 산 적 있었지만 그마저도 우리 가족이 외할머니집으로 이사를 하며 끝이 났다. 외할아버지는 경비일을 하며 따로 나가서 사셨다. 그러다가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사고가 났다. 2010년의 크리스마스 이브날 외할아버지는 계단에서 넘어져서 혼수상태에 빠졌다.


오늘 밤이 고비라는 의사의 말이 무색하게도 외할아버지는 회복하셨다. 그러나 반신마비에 인지 능력이 거의 없는 수준이었다. 벌어 먹고 살기 바쁜 자식들을 대신해 외할머니가 간병을 맡았다. 그게 4년이라는 기나긴 간병의 시작이었다. 처음 2년은 병원에서 그 다음 2년은 외할머니집에서였다.


병원에서의 간병은 나는 잘 모른다. 고등학교 3학년이었으니까. 엄마는 너는 신경쓰지 말고 공부나 하라고 했다. 그래서 정말 그렇게 했다. 그리고 나에게 외할아버지는 낯선 사람이었다. 기껏해야 일년에 한 번 보는 사이였다. 용돈을 받으면서도 참 껄끄러웠다. 저렇게 온화한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이 바람이 나서 가족을 버리고 갔다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복잡했다. 어쨌든 난 무심하게 그저 내 할 일을 했다. 다만 외할머니가 몹시 힘들어하셨고 엄마 역시 평일엔 일을 하고 주말엔 간병을 하는 생활에 지치셨다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 그렇게 병원에서의 생활을 그만하고 집에서 외할머니가 간병을 시작하셨다. 그리고 외할머니는 스트레스를 우리에게 풀었다.


외할머니의 짜증을 받아내고 넋두리를 듣는 건 나와 동생의 몫이었다. 엄마는 일하느라 집에 없었고 아빠와 외할머니는 사이가 좋지 않았으니까. 외할머니는 우리가 물을 마시고 컵을 싱크대에 갖다놓지 않는다고 짜증을 내셨다. 방 정리가 되지 않으면 다 갖다 버리라며 언성을 높이고 물건을 홱 던지셨다. 과거에 대한 후회 역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야 했다. 아빠에 대한 험담도 마찬가지였다. 너희 아빠는 돈도 못벌면서 라고 시작되는 외할머니의 아빠에 대한 험담은 끝이 없었다. 참 괴로웠다. 그래도 우리 아빠였는데.


그 때 나는 간병의 스트레스가 무지막지하게 크다는 걸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렸고 외할머니에 대한 증오심을 마음 속에 키워나갔다. 연민을 못느낀 건 아니었다. 외도로 집 나갔던 남편의 똥기저귀를 갈아야 하는 외할머니가 불쌍했다. 그렇지만 연민보다는 미움이 조금 더 컸다. 아직도 기억나는 건 나가려는 나를 붙잡고 엘레베이터 앞에서 외할머니가 했던 말이다. 집을 나갔던 외할아버지가 짐을 가지러 잠깐 돌아왔던 날 외할머니는 ‘개 같이 벌어서 정승 같이 쓰라고 했어 이 씨발 새끼야.’ 라고 말했다고 했다. 그저 몇 마디 말일 뿐인데 지금도 그 말은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그리고 우울할 때면 이따금씩 그 때의 기억이 떠오르곤 하는 것이다.


어쨌든 외할아버지는 그렇게 외할머니 방의 침대에서 거의 대부분을 누워서 지냈다. 혼자 밥도 먹을 수 없어서 외할머니가 일일이 떠먹여야 했고 대소변도 잘 가리지 못했다. 대소변 실수를 하는 날엔 외할머니의 짜증이 쏟아졌다. 그런 날은 눈치를 봐야 했다. 내 방에서도 짝하는 파열음이 들렸고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부르라고 했잖아!’ 파열음은 아마 허벅지를 때려서 나는 소리였을 것이다. 그 소리가 들릴 때면 나는 귀를 막았다. 하지만 ‘약 먹고 니랑 내랑 죽자’는 외할머니의 울음 섞인 목소리는 귀를 뚫고 잘만 들렸다.


외할머니가 가여웠다. 마누라와 토끼 같은 자식들을 버리고 나간 남편의 대소변을 받아내는 건 도대체 어떤 심정일까? 나는 일찍이 외할머니에게서 외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었다. 조강지처를 버리고 돈까지 싹 다 들고 간 인간. 엄마는 애한테 왜 그런 소리를 하냐며 외할머니를 말리곤 했다. 어쨌든 외할머니의 ‘그런 소리’ 덕분에 나는 외할아버지를 좋아하지 않았다. 때문에 외할아버지에게 외할머니가 소리를 지르고 짜증을 내도 잠자코 가만히 있었다.


물론 인간으로서의 외할아버지는 불쌍했다. 침대에 누워서 하루의 대부분을 천장만 바라보고 수년 동안을 지낸 사람에게 연민을 느끼지 못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남편이자 아버지로서의 외할아버지를 생각하면 마음이 착잡했다. 바람이 나서 자기 아들(나에게는 외삼촌)의 결혼식에도 오지 않은 아버지라니. 그런 아버지였던 사람이, 이제는 아내와 자식들의 도움 없이는 대소변 하나 제대로 가리지 못한다는 게 그렇게 추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간병 때문에 엄마와 외할머니를 힘들게 하는 짐짝 같은 사람. 그렇지만 외손녀인 나에게는 용돈을 주며 공부 열심히 하라 했던 인자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래서 보면 마음이 복잡했다. 가여워 그런데 싫어. 미워 그런데 미워할 수가 없어. 빨리 돌아가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죄책감을 느꼈다. 왜냐면 그래도 손녀였으니까. 총기를 잃은 눈으로 멍하게 누워있는 외할아버지를 보는 건 괴로운 일이었다. 외할머니의 방에 들어가는 건 그래서 싫었다. 무기력의 냄새와 오줌 지린내가 짙게 배어있었다.


외할아버지가 결국 요양원으로 가게 된 건 나 때문이었다. 물론 외할머니와 엄마가 지쳐있었던 것도 컸다. 당시 나는 피부로 인해 극심한 스트레스까지 받고 있었는데 멍청하게 피부 관리를 잘못한 탓이었다. 어느 순간 얼굴에 피부병이 생겼고 여드름이 걷잡을 수 없이 퍼졌다. 거울을 보면 내 피부 밖에 보이지 않았다. 거의 강박적으로 피부에 집착했다. 가뜩이나 외할머니 때문에 괴로웠는데 얼굴 피부까지 상해버리니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스스로가 추해서 견딜 수가 없었던 힘든 나날이었다.


아마도 외할머니가 외할아버지에게 또 다시 짜증을 냈던 날이었을 거다. ‘조강지처를 버리고 가더니’로 시작되는 외할머니의 신경질이 섞인 욕설을 방에서 듣다가 나는 뛰쳐나와서 끅끅거리며 울었다.  엄마, 아빠는 놀라서 말도 하지 못하셨다. 외할머니도 마찬가지였다.

“나 도저히 외할머니랑 같이 못살겠어. 외할아버지 그냥 요양원에 보내면 안돼?”

이기적이었다. 내가 간병을 하는 것도 아닌데 도대체 뭐가 힘들었겠냐고. 하지만 그냥 다 꼴보기가 싫었다. 내가 정신적으로 힘든 것만 생각하고 외할아버지를 보내자며 징징거렸다.


딸이 우는 걸 보시고 엄마는 뭔가 크게 실수했다는 걸 깨달으신 듯했다. 외할머니의 히스테릭한 성격과 시체처럼 누워지내는 외할아버지가 자식들에게 악영향을 끼쳤음을 그제서야 깨달은 눈치였다. 당연했다. 엄마는 평일 내내 일을 했고 일요일에만 쉬셨으니까 모를 수 밖에. 게다가 나와 내 동생은 엄마에게 외할머니가 부리는 사소한 짜증을 하나하나 다 일러바칠 정도로 철없지 않았다. 며칠 의논을 한 끝에 외할아버지는 순복음교회에서 운영한다는 요양원으로 보내졌다. 그리고 1년도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다.


외할아버지의 장례식날에는 외삼촌만 울었다.  기묘한 장례식이었다. 딸들과 아내, 손녀는 눈물 한 방울 내비치지 않는 기묘한 장례식. 외삼촌은 외할아버지를 자주 찾아오지 않았었다. 기껏해야 주말에 잠깐 왔다 갔는데 그마저도 한두 달에 한 번이었다. 아마 외삼촌에게 외할아버지는 그래도 소중한 아버지로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외할머니집에서 2년 넘게 같이 시간을 보낸 우리 가족들은 울지 않았다. 솔직히 후련했다. 그 후련함은 참 죄스러웠다. 그렇지만 드디어 끝났구나 라는 생각이 더 컸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이따금씩 나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나 때문에 요양원에 가게 되셨고 그래서 일찍 돌아가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때면 뱃속이 불편했다. 하지만 요양원에 보내지 않았더라면 외할머니가 자살하셨을 것이다. 그래서 뻔뻔해지기로 했다. 외할아버지도 차라리 돌아가시는 걸 원했을 거라고. 아무도 그렇게 살고 싶진 않을 테니까 죽어서 오히려 편해지셨을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나는 우리 가족을 편하게 해준 거야. 난 잘못한 게 없어.


장례식장에서는 외삼촌만 울었지만 사실 화장터에서는 가족들 몰래 나도 조금 울었다. 화장이 끝나서 관은 사라지고 뼛조각만 보였을 때였다. 허무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욕창이 생길까봐 외할머니가 때맞추어 옆으로 돌려야 했던 그 무거운 몸뚱이는 이제 없었다. 내가 알던 그 사람은 이제 정말 없었다. 거짓말 같았다. 그 때 새삼 외할아버지의 삶이 가엾더라. 이제 좀 편해지셨는지 묻고 싶었다. 혹시 더 살고 싶으셨냐고 그래서 나를 원망하시냐고 묻고 싶었다. 미안하고 안타까워서 눈물이 나는 걸 애써 참았다. 상투적인 표현 그대로 외할아버지는 ‘한 줌 가루’가 되어 유골함에 넣어졌다.


외할아버지는 그렇게 내 인생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그 기간 동안 겪은 내 상처는 사라지지 않았다. 집은 지긋지긋하고 우울한 곳이 되었다. 동생과의 다툼은 집을 나가야겠다는 내 생각에 불을 붙였다. 때마침 고등학교 3학년이 된 동생에게 개인적인 공간이 필요하다는 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구실이었다. 그렇게 집을 나와 친할머니 집에서 살게 되었다. 그리고 1년 동안 외할머니와 만나지 않았다. 엄마와도 카톡으로만 연락을 했을 뿐 집에 찾아가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연락도 하고 가끔 찾아도 간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외할머니와 부모님을 만나고 온 날이면 희한하게 마음이 울적해지고 마는 것이다.


내 우울증의 원인이 무엇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성격 탓도 분명 있겠지. 하지만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도 분명 어느 정도는 영향을 주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외할아버지의 기일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아서, 12월이 되니까 새삼 더 추워져서 쓰다 말았던 이 글을 이제서야 완성한다.



shj9421@hanmail.net



Articles

2 3 4 5 6 7 8 9 10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