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2차 창작콘테스트] 환상

by 버섯두부된장찌개 posted Dec 0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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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사랑에 금방 빠진다. 인사 한 번이면 사랑에 빠질 수 있다. 물론 이걸 사랑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진 모르겠다. 사랑이라고 하기엔 너무 가벼운 마음이라서 좀 겸연쩍다. 외모를 보느냐고 묻는다면 글쎄? 두 눈이 멀쩡히 달려 있고 제일 먼저 보이는 게 외모니까 외모는 하나도 안 따진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그래도 적어도 나한테는 외모보다는 행동이나 말투가 중요하다. 매 수업마다 학교 선배나 전문가가 와서 특강을 하는 강의를 들은 적 있다. 참여 점수가 성적에 들어갔던 탓에 질문하는 학생들이 무지 많았다. 그 중에 남학생 한 명이 거의 매시간 질문을 했는데 말투가 참 매력적이었다. 나긋나긋하고 다정했다. 참 예쁘게 말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호감이 갔다. 물론 호감 그 이상으로 발전하는 일은 없었다. 나는 금세 사랑에 빠지며 오직 짝사랑만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기에.


외모 혹은 말투나 행동만으로 그 사람 전체를 알 수는 없다. 사람은 엄청 복잡하고 비밀스러우니까. 가령 나만 해도 그렇다. 누군가의 표현에 의하자면 나는 ‘교회 다니게 생긴 얼굴’에 착한 인상이지만 실제의 나는 염세주의에 절어 어딘가 꼬인 사람이다. 어쨌든 사랑에 금방 빠지는 나는 한 사람의 모든 면을 제대로 알기가 힘들다. 실제로 사귀었더라도 '너 이런 사람이었니?' 하면서 연애를 끝내는 일도 허다한 세상이다. 그러니 대화도 안해본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내가 한 사람을 제대로 파악하는 건 불가능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보통 내가 좋아하게 되는 건 그 사람의 환상이 아닐까 싶다. 고작 몇 마디 말과 잠깐 본 표정으로 만들어낸 그 사람에 대한 환상.


얼마 전 학교 선배와 카카오톡으로 대화를 하다가 상처를 받았었다. 미리 말했어야죠 라는 단 두 마디 말에 이해 안 될 정도로 큰 스트레스를 받았다. 아마 나는 두어번 인사를 했고 학교에서 몇 번 지나가다가 마주쳤다는 이유로 선배에게 작게나마 호감을 느꼈던 것 같다. 그래서 아무 근거 없이 내 마음대로 그 사람이 다정하고 선할 거라고 믿었다. 그렇게 나름대로의 환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게 깨지니까 더 충격적이었던 거다. 말 한 번 섞어볼 일 없이 끝나서 환상 역시 깨질 일 없었던 지난 짝사랑과 다르게 이번은 그 환상이 박살이 난 셈이다. 아주 조각조각 처참히.


다른 사람들에 비해 무엇이든 느린 편이다. 밥 먹는 것도 느리고 하여튼 굼뜬데 무엇보다도 내적인 성장이 느리다. 감정이나 생각 같은 게 어리다. 짝사랑에 대한 환상, 사람에 대한 환상은 진작에 깨졌어야 하는데 그게 이 나이를 먹고 나서야 깨지다니. 건축학개론에서 이제훈이 술에 취해 선배 집으로 들어가는 수지를 보고 그녀에 대한 환상이 깨진 게 신입생 때였으니 나는 6년은 느린 거다. 느려도 너무 느리다.


사람에 대한 환상이 깨졌다고는 썼지만 아마도 앞으로 짝사랑 혹은 사랑을 하며 나는 또 다시 사람에 대한 환상을 만들어 내지 않을까? 그렇게 내 마음 속에서만 존재하는 그 사람의 이미지를 좋아하다가 그 사람이 실제로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서 실망할 것이다. 끊임 없이 착각했다가 실망하고를 반복하다 보면 주름살도 늘어 있을 거고 삭신도 좀 더 쑤실거고 환상이 깨진 어른이 될 수 있을 거다. 사람에 대한 환상이 깨지면 아마 세상은 좀 더 밋밋해지고 좀 더 우중충해지겠지만 그래도 늘 환상 속에서만 살 수는 없는 일이다.


shj9421@hanmail.net
이름: 버섯두부된장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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