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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 그 순간부터 나는 괜찮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겁이 많다. 겁쟁이인 걸 숨기려 하는 나의 대표적인 행동은 쿨한 척이다. 쿨한 척은 쉽지 않다. 괜찮지 않은 걸 괜찮다고 말한 뒤 돌아서면 참은 몇 배로 고통이 쏟아진다. 그러고 나서도 잔재는 남는다. 쌓이고 쌓여서 내 혈관을 막아 혈압을 올린다. 이불을 덮고 천장을 보고 누우면 가슴팍이 답답해진다. 돌아누워도 똑같다. 어느 순간부터는 눈물을 흘려도 시원하지가 않다. 소리를 지를 수도 없다. 노래를 핑계로 코인노래방에서 마이크를 들어도 마찬가지다. 다만 노래를 부를 뿐 가슴이 뻥 뚫리게 소리를 지를 수는 없다. 스스로를 모른 척하는 동안 내 영혼은 살기 위해 분열을 시도한다. 어그러지고 뭉그러져 거대한 껌 뭉치가 된 우울한 나와 주어진 일을 정신없이 해내야 하는 나.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은 후자의 나다. 전자의 나는 내 친구들과 만날 수 없다. 왜냐면 전자의 나는 내가 버린 나이기 때문에 내 친구들에게도 버려질 수 있고, 나는 겁쟁이이기 때문이다.


 후자의 나는 현재보다 미래를 택한다. 덕분에 버거운 일들이 쌓이는데 괴로워하는 건 전자의 나다. 하고 싶지 않아. 쉬고 싶어. 그만하고 싶어. 그러나 이성의 키를 쥐고 있는 후자의 나는 전자의 나를 다그치고 설득하고 심지어 비난한다. 그럴수록 전자의 나의 몸이 무거워지는 줄도 모르고. 거대한 껌 뭉치 안에 이상한 공기가 차기 시작한다. 후자의 나가 무시하는 사이 껌 뭉치는 터지기 일보 직전의 상태가 된다. 그 공기는 무서움이다. 두려움이다. 게으름에 대한 혐오다. 외로움이다. 불안이다.


 나는 술을 마신다. 술 양을 늘린다. 담배를 한 개비 빌려 피운다. 술기운에 담배를 산다. 한 대 피우고 가방에 넣어놓은 담배를 다음 날에도 버리지 못한다. 밤에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내내 가방 속 담배만 생각하다 고개를 젓는다. 버리자. 버려야지.

 전자의 나는 담배를 버리고 싶지 않다. 절규하는 입을 막을 건 퀴퀴한 연기를 머금은 종이 막대뿐이야. 어느 순간 후자의 나는 사라지고 없다. 뇌와 가슴을 회색 연기, 그 뜨거운 연기로 가득 채워 현실의 무엇이든 거부하고 싶은 전자의 나뿐이다. 그 순간 머리에 얼굴들이 떠오른다. 친구들. 나는 기대고 싶다. 사랑받고 싶다. 취기 오른손은 이성 몰래 톡을 보내 본다. 나 담배 샀다. 전송을 누름과 동시에 이성이 들이닥친다 후자의 나가 깨어난 것이다. 후자의 나는 전자의 나의 손에서 휴대폰을 빼앗아 간다. 친구들은 키득키득 재밌다는 듯 웃는다. 봐 별거 아니야. 이제 장난으로 넘기면 되지.

 나 힘들다.

 그만해. 후자의 나가 어느새 전자의 나의 손에 쥐어진 휴대폰을 다시 빼앗는다. 친구들은 뭐가 힘드냐며 다정하게도 묻는다. 전자의 나는 후자의 나의 뺨을 후려치고 두 손을 묶어 감옥에 가둔 다음 수습하기 위해 휴대폰을 든다.

 ㄴㄴ걍 일하기 싫어서

 그제야 후자의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심한다. 그때 휴대폰 화면이 바뀐다. 수화기 그림과 함께 친구의 이름에 뜬다. 후자의 나는 전화를 받는다.

 뭐야?

 얘기해줘 나 심심한데

 전자의 나는 뜨겁게 용해되어 가슴팍에서 시작해 얼굴까지 퍼진다. 화끈한 열기는 몇 방울의 액체가 되어 눈물샘을 채운다. 눈가에 자리가 없어지자 한 방울이 낙오되어 떨어진다. 눈을 감자 모든 눈물이 예외 없이 떨어지며 뺨을 적신다. 


 이상하게 나는 그 순간부터 괜찮아지기 시작했다.

 전자의 나가 내 몸 밖으로 나오기 시작한 순간부터.





최악의 영화제


 화가 난다. 요즘은 정말 불쑥불쑥. 아주 작은 일에도, 아니, 가만히 있다가도. 사람들에겐 나의 이런 점이 의아하고 원인을 알 수 없는 문제라고 투정을 부리곤 했지만 사실은, 진짜로는, 나는 내가 왜 이러는지 알고 있다.


 옛날 먼 옛날. 얼마나 옛날이냐면 지금으로부터 자그마치 23년 전. 세고 보니 그렇게 옛날은 아니다. 아무튼 그때 우리 엄마는 품에 소중한 생명 하나를 끌어안고 우셨다. 기쁨이 두 눈에 송골송골 맺혀 이 아이를 건강하게, 예쁘게, 밝은 아이로 키우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하셨겠지. 그리고 현재. 나 역시 같은 아이를 끌어안으며 울고 있다. 소중한 나를. 나를 위로할 유일한 상대인 나를. 그러나 좌절의 눈물은 멈추질 않는다. 나는 계속 허공에 대고 화를 내고 있었다. 사실은 다가올 어떤 것에 대한 두려움에 새끼 포메라니안처럼 있는 힘껏 짖고 있던 거일지도 모르겠다.


 “무슨 일이냐 대체.”

 동기이자 친구인 진우가 한참을 말없이 밥만 먹다 지나가듯 물었다. 나는 멍하니 샐러드를 씹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들었다. 뭐가? 내 눈빛에 진우는 한숨을 쉬더니 고개를 대충 저었다. 

 “왜.”

 “요새 왜 그래?”

 “뭐?”

 “이상하잖아. 사람이 힘도 없고, 말도 줄고.”

 나는 걱정과 의문이 섞인 친구의 표정에 할 말을 잃고 수저질도 동시에 잊어버렸다. 막상 남의 입으로 내 상태를 들으니 기분이 영 오묘해진 것이다. 힘도 없고, 말도 줄었다. 최근의 나에 대한 진우의 진단은 정확했다.

 아아. 그것뿐만이 아니다. 요즘 집에만 들어가면 가족들에게 불쑥불쑥 화를 내고 베개를 주먹으로 내려치기까지 한다. 정말 뜬금없이. 베개가 내게 시비를 건 것도 아닌데. 걔가 아무리 내게 시비를 걸고 싶다고 해도 그럴 수가 없다는 건 나도 잘 알고 있는데도. 내가 느낀 건 다만 요즘 화가 자주 난다는 것뿐이었지만.

 어쨌든 나를 걱정해주는 친구에게 나는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을 느꼈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아무 이유나 갖다 대기로 했다.

 “곧 졸작 영화제라서 그런가 봐. 잘 모르겠다.”

 집에 와서 이 말을 곱씹고 나서야 깨달았지만 나는 졸업작품 영화제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그래, 그게 다가오고 있는 거야. 소리 없는 형체로 내게 두려움을 심어주던 건 바로 이거였다.

 방학 동안 없는 돈을 끌어모아 사방팔방 뛰어다니며 만들어낸 단편영화는 수급 세 시간 전에 제출할 만큼 정성의 정성의 정성을 들인 작품이었다. 그래서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개폐막작 안에 들 수 있다고. 영 근거 없는 기대도 아니었다. 심사 때 차 교수님의 그 흥미롭다는 표정. 끄덕이던 고개. 어슴푸레한 미소. 물론 내 편집본을 본 모든 사람들이 시원하게 반응해준 건 아니었지만 괜찮다는 평이 대다수였다. 하지만 꿈은 꿈에서 그쳤다. 나는 개폐막작에 선정된 많은 사람에게 축하의 박수를 보내줬지만 그 중 백 퍼센트 진심은 없었다. 부럽지 않아. 부럽지 않아. 속으로 스스로를 달랬다. 최선을 다했잖아. 성장했잖아. 인생은 길어. 이게 네 재능을 판가름하는 게 아니야.

 결과적으로 모두 쓸모없었지만.


 나는 이상하게 개폐막에 내 영화가 들어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서 뒤늦게 감기에 걸렸다. 감기는 가래 기침에서 그치지 않고 몸이 으슬으슬 떨려오더니 결국 나를 침대에 드러눕게 만들었다. 게다가 요새 하는 과제들이 몽땅 마음에 들지 않을뿐더러 제대로 진행되지도 않았다. 팀원이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게 꼴 보기가 싫었고 집에 와서 강아지들이 아는 체하는 게 귀찮았다.

 “최악이야. 정말 영화제 때문일까?”

 결국 나는 진우에게 내 상태를 털어놨다. 진우는 내 영화의 조연출을 맡은 사람으로서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기만 할 뿐 질문에 답을 하진 않았다.

 “영화제 갈 거야?”

 대신 이렇게 되물었다. 이번엔 내가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얼버무렸다.

 “내 영화도 하긴 하니까.”

 그 순간 진우가 상체를 뒤로 빼며 내게서 멀어졌다.

 “말투부터 글러먹었어. 뭐야? 내 영화도? 하긴 하니까?”

 진우가 눈썹을 구기고 다그치듯 말했다. 심지어 팔짱을 끼곤. 나는 당황해서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변명할 말을 찾았다. 하지만 진우가 지적한 두 말 다 분명하게 내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그게 무슨 태도야. 네가 영화에 쏟은 정성은? 내가 쏟은 정성은? 네 크레딧에 있는 사람들이 한 건 다 뭐냐고.”

 나는 더는 진우와 말하기 싫었다. 진우가 하는 말이 다 맞는데. 왜 날 혼내지? 짜증이 났다. 나는 충동적으로 자리에서 일어서 식당을 나와 집으로 가버렸다. 바보같이 진우와는 더는 친구 안 해. 따위의 생각을 하면서. 나는 감기에 걸렸다고. 환자란 말이야.

 그 날 밤 나는 진우와 키스하는 상상을 했다. 생각할수록 진우는 지혜로운 친구다. 혼란 속에 비틀거리는 나를 잡아줄 수 있는 친구. 오늘 진우는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사과하고 싶진 않았고 얼굴을 보긴 더더욱 싫었다. 그래서 나는 영화제에 가지 않기로 했다. 내 영화가 상영되건 말건. 크레딧의 사람들이 뭐 어쩌라고? 나쁜 새끼.

 나쁜 새끼.


 월요일. 전화가 온다. 카톡이 온다. 단톡이 시끄럽다. 영화제 개막식 때문이겠지. 부럽다. 나도 가서 이벤트에 참여하고 함께 레드카펫에서 사진을 찍고. 맛있는 걸 먹고. 티켓팅을 하고. 좌석에 앉아 영화를 기다리며 떠들고 싶다. 감독 중의 한 명으로서 자리하고 사람들과 인사하고 싶다. 하지만 내 작품은 개막작도 아닌걸. 개막작의 주인공들이 웃으면서 손을 흔들고 있을 생각을 하니 부럽고 어쩌고의 가고 싶은 마음은 말끔히 사라졌다. 그냥 당장은 진우가 보고 싶었다. 진우도 영화제에 가지 않고 나와 함께 있어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난 밤이 돼서야 슬쩍 진우에게 전화를 걸어볼 수 있었다.

 “개막식 끝났어?”

 “응. 왜 안 왔어.”

 “감기가 덜 나아서. 계속 잤어.”

 왠지 그렇게 말하고 나니 목소리를 약간 긁게 됐다.

 “영화 재밌었어?”

 별로라고 해라. 별로였다고 해, 제발.

 “응, 괜찮던데?”

 나쁜 새끼. 뒤져버려. 나는 전화를 끊었다. 충동적으로 그렇게 했지만 만약 전화가 다시 걸려오면 나는 실수로 끊어진 척을 할 생각이었다. 진우는 전화를 다시 걸지 않았다. 나쁜 새끼.

 나는 외로워졌다. 그런데 진우의 전화를 끊어버려서 이 외로움을 나눌 사람은 나뿐이었다. 나는 두 손을 들어 스스로를 끌어안았다. 그런 포즈를 하니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물론 기쁨 때문은 아니었다. 나는 소리 내서 추하게 울고 말았다. 그러고 나니 속은 시원해졌지만 마음이 정리되자 이상하게 또 다른 불안이 스멀스멀 자리하기 시작했다. 나는 전화를 예의 없이 끊은 내게, 요 며칠 예의란 건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던 내게 진우가 실망하고 정이 떨어졌을까 무서웠다. 그래서 전화도 다시 걸지 않는 거야.

 나는 진우가 내일 내 영화 상영날에 같이 보러 가자고 하면 갈 심산이었다. 반대로, 진우가 가자고 하지 않는다면 나는 죽어도 상영관 근처에도 가지 않을 것이다.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나는 샤워를 하고 안경 대신 밝은 갈색의 컬러렌즈를 착용했다. 늘 입던 청바지를 한 번 입었다가 도로 벗어 아무 데나 놓고는 옷장을 뒤져 빨간색 체크무늬 치마를 꺼내 입었다. 스무 살 때 산 건데 그때보다 다리가 부은 것처럼 보였다. 날이 추워서 두꺼운 검은 스타킹까지 신으니 태가 더 안 났다. 그래도 화장까지 공들여 하고 나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학교에 가자마자 나는 목을 빼고 진우 먼저 찾았다. 보통은 언제나 과방에 있는데 오늘따라 낯선 후배들만 가득했다. 진우의 화요일 첫 수업 강의실에도 가봤지만 진우보다 먼저 교수님이 들어오는 바람에 결국 그와 만나지 못하고 내 수업을 들으러 가야 했다. 그래도 나는 안심했다. 진우와 화요일 오후 수업이 겹치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그를 너무 열심히 찾아다녔다는 걸 자각하고 자존심이 상해 공강 시간 동안은 도서관에서 교양 강의 공부를 했다. 펜을 움직이다가도 내 책상 앞을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에게 눈이 돌아갔다. 집중하자, 집중. 그 말을 다섯 번쯤 반복하고 시계를 일곱 번쯤 들여다봤을 때 오후 수업 시간이 가까워져 있었다. 나는 수업 시작 20분 전에 짐을 챙기고 일어나 영화과 강의실로 갔다. 그러나 내 기대는 점점 실망으로 고꾸라져갔다. 이번에도 진우 대신 교수님이 먼저 들어왔다. 출석을 부를 때까지 진우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내 양 옆자리가 부끄럽게 비어있었다.

 이상하네, 왜 안 보이지? 수업에도 오지 않고. 이쯤 되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저녁에 당장 내 영화가 상영되는 것과 아주 별개라고 할 순 없지만 진우가 학교를 자기 마음대로 다니는 애는 아니기 때문이었다. 아픈가? 역시 감기?

 나는 결국 진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진우는 내 전화를 열 통 넘게 받지 않았다. 그 정도로 많이 할 생각은 없었는데. 컬러링의 발라드에 홀려 멍때리다보니 그렇게 됐다.

 나는 다짐을 꺾고 홀로 영화 상영관에 팝콘도 없이 들어섰다. 사람이 별로 없었고 그마저 모르는 사람들인 걸 봐서는 내 영화가 있는 섹션의 다른 영화 주인들의 지인들인 것 같았다. 불이 꺼지고 몇 편의 형편없는 영화가 틀어졌다가 꺼지고 마침내 내 영화가 시작됐을 때, 나는 심장이 터져버리는 줄만 알았다. 편집하는 동안 몇 번이고 봤던 오프닝. 지우느라 애먹었던 거슬리는 소리가 정리된 말끔한 사운드. 더워서 온 스태프가 고생했던 씬.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나는 상영관에 앉아 이렇게 내 영화를 보는 스스로를 상상했었다. 회심의 엔딩. 그래, 나는 이 엔딩을 위해. 이 엔딩에 담겨있는 저 주인공의 눈동자를 세상에 보여주기 위해 이 영화를 만들었지, 개폐막작이 돼서 사람들 앞에 우쭐거리며 나타나기 위함이 아니었어. 내 영화는 내가 감히 깎아내릴 수 없는 영혼이 들어있어. 그런데 나는 너를 진우에 대한 짝사랑의 도구쯤으로 여겨버렸구나. 크레딧이 올라간다. 나는 그 이름들을 하나하나 보며 얼굴을 떠올렸다. 땡볕 아래 땀을 닦던 얼굴. 장비를 만지며 입에 김밥을 욱여넣던 얼굴. 내 시나리오에 대해 조언하는 진지한 얼굴. 그 안엔 진우의 얼굴도 있었다.

 상영관을 나오면서 나는 결심했다. 폐막식에 가겠다고. 가서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등을 두들겨줄 거라고. 다들 나처럼 최선의 최선을 다해서 영화를 만들었고, 실력을 인정받은 거니까. 이건 축하받아 마땅했다. 잘했다! 하고 소리쳐줘야 했다.

 “잘 생각했어.”

 진우는 뒤늦게 닿은 전화에서 내 다짐을 듣고 그렇게 답했다.

 “나도 같이 가자.”

 그 날 밤은 기분이 너무너무 좋아서 베개도 주먹으로 내려치지 않고 가족들에게도 짜증 부리지 않았다. 강아지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어대는 게 귀여워서 뽀뽀를 열 번은 해줬고, 팀원들의 톡에도 세심하게 답해주었다. 그래, 이게 인생사는 거지. 생각을 고쳐먹으니 이렇게 세상이 아름답구나. 이불 안에 들어선 지 오 분 만에 나는 달콤한 잠에 취할 수 있었다.


 나는 사실 폐막식이 열리는 상영관에 들어서기 직전까지 집으로 도망칠 생각을 했지만 막상 발을 내딛고 사람들과 인사를 하기 시작하면서 모든 걸 대단히 잘해냈다. 폐막작 축하해. 아니야, 대체 내 작품이 왜 됐는지 모르겠어. 무슨 소리야, 될만하니까 됐지. 기대할게. 기대는 무슨. 하하하. 너도 졸업 축하해. 나는 눈이 마주치는 감독마다 축하인사를 건넸다. 얼굴이 익숙한 동기들과 자리를 나란히 잡아 앉았다. 영화가 하나 끝나고 크레딧이 올라갈 때마다 박수를 쳤다. 영화제 기획팀에서 준비한 가위바위보 이벤트하고 사진도 찍었다. 폐막식 때는 인기상, 각본상, 감독상 수상도 한다. 나는 상의 주인들에게 큰 박수를 건넸다. 어찌나 열심히 쳤는지 손바닥이 다 벌게질 지경이었다. 나는 내가 대견했다. 이겨냈구나. 성장했구나. 나는 더 용기를 내 폐막식이 끝나고 오늘을 향해 달려온 사람들을 위한 리셉션 파티에도 참여할 계획이었다. 이것저것 참여한 영화가 많은 진우도 당연히 가겠지 하는 생각이었는데, 내 예상과 달리 진우는 저 멀리 선배들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며 한 손엔 당장에라도 갈 태세로 가방을 쥐고 있었다. 얘들아, 잠시만. 나는 놀라서 친구들에게서 떨어져 빠른 걸음으로 진우에게 다가갔다.

 “집에 가?”

 “응. 너는 더 있다 가?”

 나는 순간 말이 막혀 뜸을 들였다.

 “아, 너는 리셉션 가야지, 참.”

 “잘 모르겠어. 사실 별로 가기 싫어서.”

 “이미 간다고 사람들한테 말한 거 아니야?”

 “넌 어디 가는데?”

 “나?”

 마지막 말을 끝으로 더는 진우의 목소리가 귀를 뚫고 뇌로 전달되지 않았다. 진우가 내게 손 인사를 하고 멀어져 가는 모습이 느리게, 흐리게 보였다. 진우가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사라져 간다. 사라졌다. 진우가 빨간 숫자가 변하는 것에 맞춰서 아래로, 아래로 멀어져간다.

 진우가 여자 친구를 만나러 떠났다. 날 여기에 두고.

 나는 오늘 아침에 눈을 뜬 순간부터 다짐했다. 오늘은 멋지게 해내 보이겠다고. 최선을 다해서. 내 못난 자아를 누르고 눌러서. 감히 최고의 하루로 만들겠다고. 하지만 오늘은 최악이야. 벗어날 수 없는 최악의 늪이야. 아마존보다 복잡하고 태평양보다 넓고 우주보다 깊은 벗어날 수 없는 지옥이야. 사실 별로였어. 오늘 본 폐막작들 따위 전부 상업 영화 엉덩이쯤 흉내 내거나 어쩌다 운이 좋아 걸린 것들뿐이었다고. 박수를 친 건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 품격을 위해서야. 가위바위보 이벤트 같은 바보짓을 한 것도 다 위장이었어. 내가 충분히 이 자리를 즐기고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함이었다고. 나는 사실 아직도 이 모든 것들이 이해되지 않아. 내 작품은 왜 이렇게 초라하게만 느껴지는지 저 형편없는 것들을 만든 자들은 왜 한껏 들떠서 침을 튀기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자, 리셉션 파티 장소로 이동합시다.”

 멍청한 것들이 얼굴이 벌게지도록 마셔대는 술 파티에 내가 왜 가야 하지?

 나는 갑작스러운 추위를 느끼며 양팔을 감쌌다.

 아아. 어디서 많이 본 자세. 어디서 많이 본 전개. 익숙한 눈 주위의 뜨거움. 코끝의 찌릿함. 떨려오는 가슴께. 그에 맞춰서 끊기는 호흡.

 나는 빠르게 화장실로 들어가 칸의 문을 잠그고 변기 위에 앉았다. 밖의 시끄럽게 들뜬 무리의 소리가 냉장고 소리만이 남는 정적으로 바뀔 때까지, 아주 오랫동안 나는 눈물을 떨구며 변기 위에 앉아있었다.

 내가 원망해야 하는 것은 저 무리일까.

 여자 친구를 만나러 간 진우일까.

 못난 나 자신일까.

 그런 내가 만든 영화일까.

 최악이 될 줄 알았어.


정희윤 huizzzang@naver.com

  • profile
    korean 2019.12.31 18:36
    수고 많으셨습니다.
    더욱 분발하시면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늘 건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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