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5차 창작콘테스트 응모 - <나의 호수>

by 새벽네시 posted May 20,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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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호수

 


 

  나는 금방 내 생각에 빠져버린다. 누가 나를 뒤에서 밀어뜨린 것도 아닌데 정신을 차려보면 생각에 풍덩 빠져있다. 생각에 빠지는 건 꽤 힘든 일이다. 한참을 뿌연 물속에서 헤매는 것 같다. 그곳에서 헤엄치다 나오면 온몸에 진이 빠지고 머리가 띵하니 아프다. 내 머릿속에는 생각의 호수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따분한 수업을 듣다 보면 나도 모르게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만약 나비처럼 아름다워지면 어떤 모습일까? 내가 먼 미래에 꿈을 이뤄 멋지게 살 수 있을까? 그런 공상들로 머리를 채운다. 내가 꿈꾸는 아름다운 것들이 생각의 호수에 비친다. 내 눈앞에는 노교수가 안경을 고쳐 쓰며 수업을 하고 있지만, 도무지 집중이 되지 않는다. , 안돼. 수업을 들어야 하는데... 하지만 오색 빛으로 반짝이는 생각의 호수는 너무 아름답다. 이대로 잡생각에 빠지면 아주 재미있는 상상을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나는 호수 앞에 서서 갈등한다. 발만 살짝 담그자. 안돼, 생각에 깊이 빠져 버릴 거야. 수업 시간 내내 멍을 때리게 될걸? 아니, 아주 잠깐만이야. 발만 담그고 나오는 거야. 그러면 금방 정신을 차릴 수 있어. 나는 스스로 합리화하며 호수에 발을 뻗는다. 아차, 발이 물에 닿음과 동시에 나는 호수에 쑥 빠져버렸다.

 

  호수에 들어가면 처음엔 즐거운 기분으로 이것저것 상상을 시작한다. 좋아하는 사람과 대화를 하기도 하고, 유럽의 길거리를 활보하기도 한다. 마치 얕은 물에 사는 물고기들과 인사하는 기분이다. 하지만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점점 나의 심연으로 들어가게 된다. 호수 밑으로 헤엄칠수록 물의 색이 짙어지고 가늠할 수 없이 깊어진다. 하지만 나는 더 내려가 보고 싶은 충동을 이길 수가 없다. 그래서 결국엔 과거의 가장 나쁜 기억까지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내 세상이 가장 어두웠을 때는 고등학교 2학년 시절이었다. 극심한 학업 스트레스로 강박증이라는 정신 질환을 앓았었다. 하루 총 8시간 수업 시간, 5분도 졸지 않았지만 나는 수업에 전혀 집중할 수가 없었다. 성적이 내려갈 것 같다는 부담감과 두려움이 내 정신을 사로잡았기 때문이었다. 수업을 듣는 동안 내 얼굴은 점점 창백해지고 식은땀이 났다. 선생님의 말씀이 귀에서 다 튕겨 나가는 것 같았다. 교과서의 글씨도 내 눈과 마주치면 도망가기라도 하는지, 단 한 줄도 읽을 수가 없었다.

 

  수업을 마치는 종이 울리고, 고요했던 교실이 아이들의 쾌활한 소음으로 가득 찰 때 나는 화장실로 도망치듯 달려갔다. 좁은 화장실 칸 안에서 나는 심호흡을 하면서 다음 시간에는 집중하면 돼. 괜찮아. 할 수 있어.’라는 말을 주문처럼 되뇌었다. 하지만 다음 시간에도 상태가 절대 나아지진 않을 것이란 걸 난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비참한 하루하루를 열심히, 그러나 전혀 나아지지 않은 상태로 살아가던 어느 날, 나는 모든 희망을 놓아버렸다. 내 미래는 어둠밖에 없어. 아무리 벗어나려고 노력해도 바뀌지 않잖아. 이렇게 난 경쟁에서 도태될 것이고, 공부 하나 잘 해내지 못한 나는 선생님들이 말하는 인생의 패배자가 되겠지. 부정적인 생각들로 내 방에 어둠이 내리고 나는 희망과 힘을 상실하고 침대에 무기력하게 누워있었다. 그때 내게 찾아온 손님이 있었다. 바로, 앞으로 지겹도록 내게 찾아올 원망이라는 감정이었다.

 

  ‘원망은 절망과 패배감에 빠진 내게 아주 잘 어울리는 손님이었다. 나는 그것을 내 마음의 중심에 놓고 내가 이렇게 망가진 원인을 찾았다. 나는 상상 속에서 선생님들에게 배운 도덕이니 예의니 하는 것을 빈정거리며 말했다. 때로는 그들 앞에서 울부짖으며 나한테 왜 그랬냐고, 왜 공부를 못하면 인생의 낙오자라고, 쓰레기라고 말했냐고 따지기도 했다. 선생님의 모든 말을 교과서 지식처럼 필터 없이 받아들인 대가로 나는 상처를 단단히 입었다. 이 모든 불행이 그들이 나에게 잘못된 사고관을 심어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모든 학생이 나처럼 다 비슷한 소리를 들을 텐데, 유독 내가 마음이 약해 강박증에 걸린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나 자신도 원망했다. 결국, 메말라가는 나를 보다 못한 친척들의 권유로 나는 다른 도시에 있는 학교로 전학을 가기로 했다. 나를 우등생으로 여기고 좋은 성적을 기대하는 그 학교에 더 있기가 싫었다. 과거를 청산하고 나를 모르는 사람들 속에 부담 없이 살고 싶은 바람이었다. 다행히 전학을 간 후 서서히 강박증이 낫고 나는 무사히 대학까지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선생님에 대한 강렬한 원망은 고스란히 내 가슴에 남아있었다.

 

이러한 지난 내 아픈 기억들은 원망과 자기연민이라는 물감으로 덕지덕지 칠해져 내 심연 속 괴물이 되었다. 그래서 내 마음 깊숙한 곳까지 헤엄치면 여지없이 그 괴물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큰 괴물 앞에 선 나는 초라하다. 과거의 상처를 끄집어내 나는 선생님을 원망하고, 욕했다. , 책상에 앉아 무표정으로 공부하고 있는 친구들의 모습을 보고 겁에 질리기도 했다. 저들도 나처럼 공부 못하면 인생의 실패자라는 말을 머리에 각인한 채 맹목적으로 공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됐다. 나는 교실에 얌전히 앉아있는 친구의 손목을 잡고 우리의 순수성이 깨지고 있어. 빨리 달아나야 해.”라고 말하며 무작정 밖으로 끌어내기도 했다. 그리고 마지막엔, 감정의 낭떠러지에 서 있는 18살의 나를 끝내 위로해주지 못하고 뒤에서 발만 동동 굴렸다.

 

  그 기억들(괴물)과 뒹굴고 있으면 내 정신을 좀먹는 것 같아 괴롭다. 이미 다 지나간 일인데, 과거를 곱씹는다고 해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데... 또 괴물을 만난 내가 한심하다. 과거에 대한 지나친 회상과 각색으로 야기된 나의 슬픈 외침은 괴물의 괴성이 되었다.

 

  괴성이 내 귓가에 울려 퍼져 머리를 아프게 했다. 종 안에 들어간 사람처럼 나는 웅웅거리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해롱해롱한다. 괴물이 커다란 손을 올리고 나를 집어삼키려고 할 때, 나는 그제야 내가 생각에 심하게 빠져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여기는 현실이 아니야. 내 상상일 뿐이지. 그만 생각해.’ 호수에 계속 있고 싶은 유혹에 세차게 도리질 치며 나 자신을 타이르고 나야 호수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정신을 차린 나는 악몽을 꾸다 깬 아이처럼 말을 잃는다. 주변을 찬찬히 돌아보면 봄볕이 따스하게 들어오는 강의실 안이다. 나는 정다운 가족과 친척들을 생각한다. 나는 안도하며 속으로 말한다. 역시 호수는 너무 위험해. 거길 다시 들어가는 게 아니었어. 거긴 무시무시한 괴물이 살아. 그렇게 말하고 다시 호수를 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잔잔한 물결이 찰랑거린다. 난 원망스러운 눈으로 호수를 바라본다.

 

  호수에서 나온 나는 매번 내 몸에 흐르는 감정의 물을 말리기 위해 책상에 앉아 일기든, 소설이든 뭐라도 적어야 했다. 과거에 돌아가서 나를 아프게 한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하면 어땠을까, 내 잘못은 아니었을까. 하면서 글을 썼다. 그러는 동안 그들과 치열하게 싸우고, 나의 어리석음을 반성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

 

  첫째, 아픈 과거를 회상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치유되지 않은 것은 언제나 위로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나의 호수는 사라지지 않고 끊임없이 나를 부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부르는 건 괴물이다.

 

  둘째, 괴물은 어쩌면 가여운 존재다. 물론 나는 괴물이 두렵고, 밉다. 현재의 나를 너무 괴롭게 하니까. 하지만 그 괴물을 만든 건 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과거의 아픔일 뿐인데 나는 무서워서 그것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부정하고 밀어냈다. 과거의 아픔이 나의 왜곡과 증오가 덧붙여지는 바람에 괴물이 된 것이다.

내가 호수로 뛰어드는 것은 그 괴물이 원래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게 구해주는 과정은 아니었을까? 처음엔 괴물을 돌로 때리고 밀어냈으나, 시간이 많이 지나고 나서는 나의 과거로 인정하고 보듬게 되었다. 실제로, 자주 괴물을 마주할수록, 그것에 대해 글로 쓰면서 두려움이 점점 옅어졌다. 그래서 지금은 호수의 심연까지 들어가게 되면 나는 이렇게 말한다.

그래, 많이 아팠구나. 힘들었겠어. 그래도 지금은 괜찮아.”

그저 담담한 위로와 인사를 건넨다. 그럼 그 깊은 어둠에서 괴물이 아닌 어린 계집애 하나만 서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나는 다시 호수 밖으로, 현실로 돌아온다.

 

  셋째, 나를 정말 사랑해주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내가 과거를 돌아보면서 반성했던 부분이었다. 그 당시 분명 내게 공부가 인생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의 부모님, 친척들, 소수의 선생님. 하지만 그때는 그 보드라운 말을 받아들였다간 성공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들은 위태롭게 공부에 매달리는 나를 만류했으나 나는 듣지 않았었다. 공부만이 나의 살길이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교 안의 좁은 세계에서나 그렇지 막상 세상에 나온 지금, 공부는 인생에 그렇게까지 중요한 건 아니었다.

 

  나는 아직 어리고, 지혜가 부족하다. 그래서 이제는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의 말을 들으려 노력한다. 당장은 그들의 말이 내 생각과 같지 않더라도, 나를 위해서 해주는 말이란 걸 알기에 잠자코 듣고 내 속에서 소화한다. 그리고 책을 보고 노래를 들으며 나는 세상을 천천히 배우고 있다. 그래서 언젠간, 호수 안에서 18살의 나를 만나면 제대로 된 위로와 해결책을 말해주고 싶다. 언제나 무표정의 그 파리한 소녀가 내 말을 듣고 미소를 지을 수 있다면, 그날은 호수에서 빠져나와도 춥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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