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7차 수필 공모 제출합니다 :)

by 流淡 posted Oct 05,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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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은 냄비에서 뚝배기로



낮에 고백해서 사귀자고 했는데, 그날 밤에 차였어. 나도 별 미련은 없는 걸~’

흔한 초등학생의 연애 스토리다. 24개월도 아니고 24시간 채 지나지 않아 처음과 끝을 보는 이 관계. 도대체 두 사람은 어떤 담백한 여정을 함께 했단 말인가.

불과 한 세기 전만 해도 이런 일은 꿈에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한 사람의 언약은 그 깊이와 진심이 담겨있는 법, 관계 하나하나를 소중하게 여기고 지금보다 신중한 선택들이 오갔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부모가 자식의 배필을 정해주던 대과거를 지나, 유학의 이념에 따라 이성이 내외를 하며 눈빛만으로 사랑을 주고받는 과거를 지나, 윙크 하나에도 심장이 쿵덕쿵덕하며 어쩔 줄을 몰라 입꼬리가 귀에 걸려도 어릴 적의 추억으로 자신의 감정을 수용하는 현대의 사랑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양은 냄비와 같은 현대의 사랑. 이것이 진정 무의미와 경솔의 상징일까.

 

누군가는 여전히 요즘 젊은이들의 쌍날검 같은 인연을 저급하다고 보겠지만, 오히려 나는 드디어 본인의 감정에 충실해질 수 있는 시대가 왔다고 생각한다. 좋은 것을 좋다고, 나쁜 것을 나쁘다고 터놓고 말할 수 있는 때는 오늘날뿐이다. 상대로부터 승낙을 받거나 거절당할 마음의 각오를 하고 내가 좋아하는 상대에게 감정을 표현할 줄 아는 것은 타인의 마음을 여는데 가장 기본적인 능력이다. 특히 대인관계 능력과 인성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는 앞으로의 시대에서는 솔직한 감정 표현이 필수적일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내가 고백을 해서 상대방으로부터 승낙을 받는다 한들, 그 관계가 매우 일시적이라면 도대체 무엇이 의미 있단 말인가. 양은 냄비처럼 순식간에 불타올랐다가 차갑게 식는 관계에서 과연 어떤 국을 끓일 수 있겠는가.

 

초등학생들의 자칭러브 스토리를 관찰해보면 고백을 하는 사람도, 고백을 받는 사람도 같이 했던 기간이 얼마가 되었든지 간에 성숙해지는 것 같았다. 그들은 내가 너무 성급하게 고백한 건가’, ‘내가 어떤 점이 부족할까’, ‘상대의 기분이 나쁘지 않게 고백을 거절하는 법은 무엇이 있을까’, ‘너무 급하게 만난 것은 아닐까, 아직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는데와 같은 수많은 고민들을 통해 인간관계에 대한 교훈을 하나씩 배워나가고 있었다.

많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보며 참된 본인의 짝을 만나는 것이 현대 사랑의 참뜻일 것 같다. 이것을 넘어 본인의 취향과 가치관, 호와 불호를 깨달으며 자신만의 색과 채를 찾아가는 것이 바로 포스트 모더니즘 철학에 가장 부합하는 삶의 양식이 될 것이다.

마음의 벽에 상처가 생겨 고름이 곪고 아물며, 스스로 회복하는 과정 속에서 냄비의 벽은 점차 두꺼워지게 된다. 외부로부터 어떤 간섭이 있어도 본인만의 색과 채를 유지할 수 있고 둔해질 때까지, 청춘들의 순수한 고백은 계속될 것이다. 자신의 마음이 상대를 담아 뜨끈한 진국을 우려낼 수 있는 뚝배기가 되면, 사랑의 배는 비로소 닻을 내릴 것이다.



이호성

hoseong608@naver.com

010-4512-2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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