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공모 38차: 크리스마스와 빨간 스웨터외 1편

by 베아 posted Dec 10,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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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와 빨간 스웨터

거리는 마법에 걸린 반짝거렸다. 어두워질수록 더욱 빛났다. 울긋불긋 크리스마스 등불로 장식한 회색 샌프란시스코의 고풍건물들이 마치 얼굴단장을 하고 나서는 여자들처럼 설렘의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발길을 재촉하는 사람들과 계속 어깨를 부딪쳤다.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두고 다운타운으로 쇼핑을 나오다니, 어리석은 짓이라 생각했다. 5시도 되지 않았는데 해는 떨어지고 어둑어둑 해졌다. 여기저기서 흘러나오는 크리스마스 캐럴, 사람들의 웃음소리, 대형 스크린 속에서 드럼을 치며 춤추는 장면의 흥이 거리로 넘쳐 흘러내렸다. 유니온 스퀘어 광장은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8 건물의 메이시 백화점은 2 백여 개의 빨간 크리스마스화환을 창문에 걸어서 추운 겨울에 불꽃이 피어나는 보였다. 사람들의 물결에 떠밀리다시피 백화점 건물 안으로 들어섰을 ,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발걸음사이로 눈을 끌어당기는 것이 있었다. 빨간 스웨터를 입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노인의 뒷모습이었다. 멀리서도 선명하게 눈에 띄는, 너무나도 눈에 익숙한 빨간 스웨터였다. 나는 백화점의 쇼핑 인파를 밀어제치고 자석에 끌리듯 뒤따라 뛰어올라갔다. 마치 20 세상을 떠나신 우리 아버지의 뒷모습 같았다. 그러나 어느새 빨간 스웨터의 자취는 사람들 속으로 흔적 없이 사라져버렸다. 눈을 휘둥그레 뜨고 여기저기를 둘러보아도 다시 보이지 않았다.

너무나 예기치 않았던 장면에 나는 넋을 빼앗겼다. 황당한 일이 아닌가. 무슨 환영이라도 듯이 뒤따라가다니. 성탄절 상품들 빽빽하게 들어선 틈새에서 발자국도 움직일 없이 얼어붙었다. 크리스마스캐럴은 신나게 흘러나왔다. 사람들의 뺨은 상기되어 홍조를 띠고 모두들 기쁜 미소를 지으며, 나를 힐끗힐끗 쳐다보며 스쳐지나갔다. 나는 고장 시계처럼 정지된 시간 속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한참을 자리에 멈춰 섰다. 갑자기 다리에 힘이 빠지고 주저앉을 같았다. 백화점 위층 커피숍으로 허둥지둥 올라갔다. 그곳도 소란했다. 사람들의 대화소리는 화려한 크리스마스장식들처럼 자유분방하게 들렸다. 짙은 커피로 정신을 차려보려 했으나 모든 감각이 기억과 하나가 되어 아버지의 모습만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선명하게, 기억은 계속 이어지면서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나를 끌어당겼다. 나는 시간을 되돌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내가 혼자서 미국으로 떠나는 것을 강력하게 반대하셨다. 지금 생각하니 그것은 당연지사이다. 이제 와서야 미혼인 딸을 외국으로 보내는 아버지의 마음이 오죽이나 불안하셨을까, 상상이 간다. 그러나 목을 조여 매는 듯한 현실에서 벗어나려는 나의 결심, 신세계에 대한 나의 열망은 아버지의 뜻을 넘어섰다. 그때 나에게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렇게 아버지의 둘째 딸이 무서움 없이 가족의 울타리를 벗어나 태평양을 건너고, 결혼해서 아이를 둘이나 낳고 미국 땅에 뿌리를 내렸을 아버지는 엄마와 함께 샌프란시스코로 방문 오셨다. 국내선을 타고 부산에서 서울로, 그리고 바로 국제선으로 갈아타서 열대여섯 시간을 꼼짝없이 비행기에 앉아서 여행을 하신 것이었다. 엄마의 얘기로는 아버지는 번이나 아이고, 눈에도 보이지 않는 이토록 길을 혼자서……하고 말하시며 한숨만 쉬셨다는 것이다. 출구를 빠져나오시면서 아버지는 애써 웃음을 지으려 하셨으나 계속 콧물을 훔치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마치 대견한 딸을 상면하는 감격의 눈물을 삼키는 것처럼 보였다.

엄마와 아버지는 여기저기 신기하고 별난 세상구경하시느라 분주하셨다. 3개월은 후다닥 지나갔다. 그러다가 엄마는 향수병에 걸렸다. 내가 직장에 나가면 영어로 말하는 손자들과 시간을 보내시는 것이 여간 답답하다고 토로하셨다. 행여 전화벨이라도 울리면 가슴이 두근거려서 전화 받는 것도 불안하고 영어 말이 두려워 벙어리가 되었다고도 하셨다. 온종일 길에 보이는 사람은 우체부 밖에 없다면서 여기가 사람 사는 동네는 맞제?하며 묻곤 하셨다. 빨리 집으로 가야 엄마의 병이 나을 같았다. 앞집 뒷집에 사는 엄마의 말동무를 그리워하시더니 결국 사람냄새가 나는 미국에서는 이상 견디시겠다며 먼저 한국으로 들어가셨다. 내가 대접을 못해드리고 소홀해서 섭섭하고 화가 나서 일찍 가신 것은 아닐까, 씁쓸한 마음을 떨칠 수가 없었다.

반면에 호기심이 많으신 아버지는 미국에 체류하시기로 결정하셨다. 흰머리가 제법 희끗희끗 많이 보였지만 활기찬 아버지의 목소리와 깊은 눈동자는 어릴 적부터 보아왔던 그대로였다. 아버지는 시내 버스노선을 파악해서 한국노인회도 찾아가시고, 놀랍게도 샌프란시스코 시립교향악 연주도 보러 다니시며 중국 촌에 있는 한약방까지 찾아내셨다. 차차로 친구들도 생기면서 아버지는 미국생활에 자연스럽게 적응하셨다. 영어는 못하지만 웃음만 지어도 친절하게 대해 주는 미국사람들에게 헬로, 탱큐라고 말하면 나머지는 손짓발짓으로 소통할 있다고 뿌듯해하셨다. 아버지가 미국생활을 즐기시는 것이 얼마나 기뻤는지 엄마한테 섭섭했던 마음이 누그러졌다. 아버지의 생일이 찾아왔다. 나는 난생 처음으로 아버지의 생일상을 차리기로 마음먹고 아버지가 노인회에서 만난 친구들을 초대해서 생일파티를 벌렸다. 맛있게 식사하시고 아이들처럼 순진하게 장난도 치고 서로 놀리기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셨다. 중에 분이 피아노에 앉으셨다. 조용히 건반을 하나씩 둘씩 누르시더니 갑자기 노래 곡을 선사하겠다고 말하셨다. 모두 박수를 쳤다. 그가 선창을 하니 여기저기서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몸이 새라면 몸이 새라면 날아가리.

건너 보이는 건너 보이는 작은 섬까지.

상상을 해보라. 70세가 넘은 명의 노인들이 입을 맞추어 합창하시는 모습을. 그것이 고향을 등지고 이국땅에서 마음에 품고 있었던 향수를 노래하는 삶의 애환이었으니. 동요를 부르던 것이 언제였던가, 나도 어린 시절로 되돌아갔다. 부엌 귀퉁이로 돌아서서 나는 뜨거워진 가슴을 어루만지면서 노래를 따라 불렀다. 그들의 마음도 나의 마음처럼 작은 섬으로, 우리의 고향으로 날아가고 있었으리라. 노래, 그날의 아버지와 친구들의 우정은 오랫동안 나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어쩜 동요를 부르셨을까, 지금도 경이로운 생각이 든다.

그해 크리스마스 전날, 시내 백화점에서 빨간색 카디건 스웨터를 보면서 아버지 선물로 괜찮을까?하고 집어 들었다. 사이즈가 약간 클까? 그래도 아버지의 어깨는 넓으시니까 맞을 거야. 혼자서 중얼거리다가 밝은 색깔에 마음이 끌렸다. 처음으로 우리와 성탄절을 함께 보내시게 아버지는 빨간 스웨터를 입으시면서 젊어지겠네, 평생에 빨간 옷은 번도 입어본 적이 없는데.하시며 마음에 들어 하셨다. 어깨도 품도 맞았다. 그러나 소매가 사실 너무 길었다. 미국사람들은 팔도 길제. 이거 맞는데 소매가 너무 길어서......하시는 아버지의 말씀 속에 아쉬움이 들어 있었다. 다음 당장 바꾸어드리겠다고 얼른 아버지를 위로해 드렸다.

크리스마스 다음 백화점은 인산인해를 이룰 것이라는 것을 뻔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며칠이 지난 스웨터를 바꾸러 갔다. 다양한 사이즈가 많았을 것이라는 나의 기대와는 달리 빨간색 소형 사이즈는 없으니 며칠 후에 와보라고 점원이 알려주었다. 며칠 , 다시 갔을 때에는 빨간색 스웨터는 크리스마스에만 나오는 상품이기 때문에 다음해 12월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버지께 설명은 해드렸지만 여간 섭섭하신 눈치가 아니었다. 나도 실망스러웠다.

아버지와 함께 쇼핑을 가서 다른 색으로 찾아보자고 했으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약으로 다스려오던 지병이 갑작스런 이상 증세를 보이자 아버지는 지체할 여지없이 급히 한국으로 들어가셨다. 나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시려고 그렇게 서둘러 가신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병세가 심해지면서 결국 겨울 끝머리에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셨다.

 

그래, 니가 아버지께 선사했다던 스웨터 말이다. 소매가 너무 길어서 바꾸기로 했다면서? 가라앉은 엄마의 목소리가 갑자기 전화보다 아주 곳에서 들려오는 같았다. 머리를 치는 듯한 기억의 소리였다. 두서너 사이에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아버지의 빨간 스웨터. 아니, 엄마가 어떻게 그걸 아시죠?라고 묻고 싶었지만 말은 입안에서만 맴돌았다. '틀림없이 아버지가 빨간 스웨터를 내가 바꾸어 오기를 기다리셨구나, 엄마한테 말하셨구나. 얼마나 서운하셨을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는 말을 찾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다음 주가 아버지 49제다. 절에서 아버지의 옷을 가져오라고 하는데, 니가 미국에서 아버지가 입지 못했던 스웨터도 들고 오너라.하시며 엄마는 전화를 끊으셨다.

법당 안에서 다른 가족들이 하는 것을 곁눈질로 눈여겨보면서 나도 머리가 바닥에 닫도록 엎드려 아버지께 절을 하기 시작했다. 일어서고 엎드리고, 일어서고 엎드리고 번이나 했을까. 생각은 머릿속에서 사라져 버렸고 사진틀 속의 아버지 얼굴만 크게 보였다. 말없이 나를 바라다보시는 아버지. 미국에 계실 때에도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머리에서, 눈에서, 가슴에서 쏟아져 나왔다. 아이들, 직장 일에 몰두하느라 아버지께 식사도 제대로 챙겨드리지 못했고 오히려 아버지가 나를 도와주신 것부터 잘못한 일들이 얼마나 많았던지, 끝없이 풀어내면서 소리 없이 외쳤다. 아버지, 용서해 주세요. 아버지, 감사합니다.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제가 번도 말한 적이 없었지요? 그리고 아버지, 우리 아이들이 세상에서 제일 따뜻하고 자상한 할아버지라고 말한 것도 모르셨죠?

예절을 끝내고 스님을 따라 법당 앞마당으로 내려갔다. 마당 한가운데에 차곡차곡 쌓인 것이 멀리서도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빨간색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아버지가 입고 세상을 떠나가시는 마지막 외출복으로 바로 내가 미국에서 가져온 빨간 스웨터, 구두, 모자, 지팡이, 양말, 속옷, 양복바지와 윗도리가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스님은 우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곳에 불을 지폈다. 불꽃은 활활 타올랐다. 목탁소리 염불소리 속에 승화하시는 아버지의 영혼. 우리는 스님을 따라 둥글게 원을 그리며 말없이 불꽃더미 주위를 천천히 맴돌았다.

부족한 딸이라는 나의 죄의식도 불더미 위로 던져서 태워 버렸다. 불꽃은 하늘을 휘감는 오르다가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넋을 놓고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데, 절간 어디에서 라일락 향기가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갑자기 콧등이 시큰해지면서 생각지도 않았던 말들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아버지, 편안하게 가세요. 아버지가 자랑하실 만한 딸답게 살아가겠습니다.

서둘러 사람들로 가득 백화점의 커피숍을 빠져나오니 거리에는 쇼핑객들로 축제가 벌어졌다. 차가운 겨울공기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꺼졌다가 다시 환하게 밝혀지는 점멸등들이 어두워진 세상을 밝히는 반짝거리는 빛이 한꺼번에 쏟아져 내려 마치 폭죽이 터졌다가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휘황찬란한 크리스마스 불꽃처럼 화려했던 젊은 날의 추억들도 어두운 허공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구나! 그러나 소멸되지 않는 아버지의 기억으로 가슴을 가득 채운 나는 전철역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공모자: 최현술

이메일: beachoi@sbcgloba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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