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함께한 한 끼> 외 1편

by 푸른달 posted Apr 10,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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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함께한  

 

 


부모가 자꾸 아프면 내가 나이가  거라고, 병원에서 만난 누군가는 그랬다. 그렇다면 나는 이미 삼십 대에 늙은 셈이다. 엄마가 위암 수술을 받은 서른다섯부터 숱하게 병원을 드나들었으니.

나는 폐쇄적인 성격 탓인지 조직생활을  버텨내지 못했다. 무적자無籍者의 비애를 잘근대며 뜨내기 일을 하다보니 자연스레 집안에 우환이 생기면  내가 나서야 했다. 할머니와 엄마   상복하는 약을 바구니에 쌓아둘 정도로 병치레가 잦아, 병원 보호자 침대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일한 적도 적지 않다. 그래서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지기 훨씬 전부터 나는 병원 냄새에 익숙했다.

예순일곱의 아버지가 회사로 돌아가던  안에서 뇌졸중이 발병한  2009 4월의 일이다. 당시 나는 지역자활센터가 운영하는 자활사업단에서 모처럼 만에 조직생활을 견뎌내는 중이었다. 하지만  일은 언제든 휴직이 가능한 일용직이었고, 아버지는 그때껏 다섯   핏덩이를 안고 친정으로 돌아온 딸이 일하는 휴일이면 외손녀를 애지중지 돌봐주었다. 나는 당장 휴직을 하고 아버지에게 매다렸다. 의사가 개두술을 해도 살아날 확률은 0.3%뿐이라고 했는데, 아버지는 혹독한 중환자실   반을 견디고 의식을 회복했다.

의료보험 수가 문제로 재활환자는  병원에 오래 머물지 못한다. 짧게는 2, 길어도 6개월이면 병원을 옮겨야 한다. 인터넷을 검색하고 발품을 팔아 조건이 맞는 가장 나은 병원을 찾고, 때가 되면 이원하기를 1  넘게 했다.  사이 노무사와 동분서주하며 준비해 산재신청을 했고, 2010  재신청 끝에 드디어 산재로 판정을 받았다.  후로 아버지는 재활과 요양을 병행하는 지금의 병원에서 8년째 지내는 중이다.

처음엔 전문 간병인이 쉬는 주말마다 남동생과 교대로 아버지를 간병했다. 그러다 지금은  혼자 격주로 아버지를 돌본다. 산재 판정 직후부터 지금껏 아버지를 돌보는 분이 최근엔 운동치료 일정이 잡히지 않는 주말에만 쉬기 때문이다. 지금은 5kg 늘었지만, 아버지 진자리 마른자리를 갈기 시작했을   체중은 44kg이었다. 낑낑대며 기저귀를 가노라면 오형제  가장 비리비리한, 아니 가장 엉뚱한 자식이 이러고 있구나 싶은, 조금은 쓸쓸한 생각이 들곤 했다. 한데 차츰  일을 어느 자식인가는 해야 한다면 그게 나여서 다행이다, 감당할  있어서 다행이다 싶으며 마음이 편해졌다.

 한끼의 점심 때문이었을까.

아버지와 나는 서로 원망이 깊은 부녀였다. 내게 아버지는 ‘김일성보다 나쁜 사람이었고 ‘가정 파괴범이었다. 내가 열두  때부터 아버지는 여자와 정치에 빠져 집안을 풍비박산 내고는 십여 년을 폐인으로 살았다. 무서워 숨죽인 다른 형제들과 달리 나는 아버지를 똑바로 바라보며 바른말을 했다. 그런 내게 아버지는 적의 가득한 눈길을 뿜기 일쑤였고, 나는 절대 아버지와 마주 앉아 밥을 먹지 않았다.

폐인이었던 아버지가 버스회사에 들어가 가장노릇을 시작한  사십  중반이다. 물정 어둡던 초반에 겪은 마음고생을 빼면 아버지는 의외로 운전기사란 직업에  적응했다. 그때서야 우리는 우락부락 난폭한 사람이라는 편견에 가려졌던 아버지의 찬찬한 모습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폐인으로 지낸 시간이 오랜 만큼 미더운 남편,  넓은 아비가 되는 데는 그러고도   시간이  필요했다. 아버지가 내게 전화를 걸어 밖에서 점심을 함께하자고   쓰러지기 불과, 서너  전이었다.

아버지와 나는     , 마주 앉아 밥을 먹었다. 아버지는 반찬  가지를 골라  앞으로 옮겨주었다.  낯선 경험을 마주하자 여러 감정이 뒤섞여 일었다. 그즈음 오랫동안 딸네서 지내던 할머니가 늙어 철든 아들 밥을 먹으러 아들네로 돌아와 있었다. 괴팍하게 쪼그라든 할머니는  늙은 외아들이 외증손녀에게 정성을 쏟는  고까워했고,  행동 하나하나를 트집 잡았다. 아버지는   접시에  구워진 갈비를 놓아주며 자상한 말로 그런 할머니를 이해해 달라고 했다.

 아홉  , 병실의 불이 꺼지고 아버지가 고른 숨을 내쉬면 나도 보호자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한다. 그렇게 누워 가끔 아버지와 나의 인생유전을,   번뿐이었으나 아버지가 아버지다운 모습을 보여준  점심  끼를 생각한다.

 

 

 

 

 

 

산이 부를 

 


 

  전이다. 처음으로 북한산에 올랐다. 정릉 청수장에서 올라 불광동 부근으로 내려왔다. 대학 때부터 동아리 활동으로 산을 탔다는 스물아홉 청년들과 함께. 등반 대장은 빼빼 마른 소녀의 인상과는 달리 과묵하고 어른스런 여성이었다. 네팔에도 다녀왔다고 했다.  등반대장 뒤만 바짝 따르며  험준한 코스를 탔다.  만남이자 마지막 만남이었고,  경험이자 마지막 경험이었다.  기억을 떠올리면  가슴이 설렜다.  산이 내가 있어야  자리인  자꾸만 ‘돌아가고싶었다. 그리고 말없이 산을 타던 내가 두고두고 그리웠다.

 

이월이었다.   넘도록 우울과 불안에 결박당한  속절없이 나락으로, 나락으로 떨어져만 갔다. 짚오라기 하나 잡히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랑밖에는 없는  같았다. 기억의 갈피를 들추며 사람을 찾았다. 그리고 부끄러움 같은  모른다는  주위에 내게 사람이 필요하다고, 사랑이 필요하다고 알렸다. 한데 사랑이 어디 그리  찾아오던가.

 애처로운 노력은 애초 뜻과는 멀리 결혼이란 길로 휘었고  무력하게 상황에 이끌려갔다. 그러던  후배 현숙의 전화를 받았다. “언니,  친구들 하고 북한산 가는데 같이 가실래요?” “ 등산복도, 등산화도 없어.” “저도 그래요.” “ 가면 더플코트 입고 단화 신고  건데?” “저도 그럴 거예요.” 지금은 없어졌지만 산에 오르기  둘이서 찍은 사진에서 현숙이는 붉은색, 나는 초록색 더플코트 차림이다. 혼돈과 마비가 혼재하던 그때, 어쩌면 내겐 낯선 시간과 공간이, 어쩌면 맑은 공기가 필요했는지 모른다.

막상 산행을 함께할 이들을 대하고 보니 긴장이 됐다. 후배 현숙만 빼면 10 가까이 매주 산에 오른 건장한 청년들이었다. 산행 경험이 전무하다시피  내가 자칫하면 일행에게  짐이 되겠다 싶었다. 등반대장 뒤만 따라가자 마음을 다잡았다. 흥분과 기대감 속에 산행이 시작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배낭과 코트는 청년들 짐이 됐다. 등반대장은 말이 없었고(산행이 끝나고 건넨 “산을  타시네요 마디가 전부였다), 그와 나는 다른 이들보다 앞섰기에 아무하고도 말을 나눌 필요가 없었다. 오랜 동안 자폐의  증상으로 말을 통제하지 못해 말의 감옥에 갇혀 지낸 내게 여섯 시간 넘어 이어진 침묵은 얼마나 평화롭고 감미롭던지.

때론 휘청거리고 때론 발을 헛디뎌 미끄러졌다. 그렇게 산비탈을 오르고 바위틈새를 타는 사이, 나는 헐떡이는 숨과 욱신거리는 다리 근육에  감각을 집중했다. 그러자  몸이 신경 말단까지 모두 깨어나는  같았다. 몸이 산에 익숙해질수록 머리가 맑아지며 평온 같은 것이 마음을 채웠다. 그리고 산행에 빠져들수록 내가 오롯이 만져졌다. 크고 작은 상처가 더듬어지는가 하면 강하고 독립적이었던 과거의 내가 후각의 기억처럼 다가왔다. 그렇게 만난 나는 과거의 나든 산을 타는 현재의 나든, 당시 나라고 알고 있던 나보다 훨씬 단단했다. 자신를 통제하며 앞에 놓인 갈림길의 윤곽도 헤아릴  있는  있는 건강한 나였다.  격렬한 몸의 움직임이 선물해준, 살면서 드물게 만난 명징한 순간이었다. 비록  산행 이후 인생의 물길을 바꾸지는 못했지만 오래도록   때의 경험을 순정한 기쁨으로, 이때의 나를 온전한 나로 기억하며 그리워했다.

안치운은 『그리움으로 걷는 옛길에서 여행은 자기 자신을 기억하는 행위라고 했다.  말에서 ‘여행을  ‘산행으로 바꾸면 오래  그날 내가 경험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시  , 『그리움으로 걷는 옛길 읽으면서 나는 그동안 나를 얼마나 많이 잃어버렸는지 새삼 뼈아프게 깨달았다. 산행이든 여행이든 걷기든 몸을 움직여 그때처럼 명징한 나를 만나고 기억하는 일이 지금 내겐 얼마나 간절한지.

 

 

 

 

 

 

 

 

 

 


 

 

김설인 / retonative@hanmail.net / 010-736-이오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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