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하루 외 1편

by 강가람 posted Sep 07,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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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하루 


엄마의 손을 잡은 한 소녀가 길을 걷고 있다. 두 사람의 얼굴에는 3월의 봄처럼 화사한 웃음이 만연하게 피어있다. 아이의 손에 들린 풍선은 아이의 행복처럼 한껏 부풀어 있다. 장난기 가득한 소녀는 엄마의 손을 놓고 앞으로 달려간다. 한참을 뛰던 아이가 뒤돌아보았을 때 엄마의 모습은 골목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사라진 엄마를 찾기 위해 왔던 길을 되돌아가던 소녀는 그만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만다. 넘어지는 바람에 손에 들고 있던 풍선은 소녀가 잡을 수 없을 만큼 높은 하늘에 걸린다. 소녀는 눈물을 흘리며 일어난다.

 

쓰라린 무릎을 안고 일어선 소녀는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이 어느새 교복으로 바뀐 것을 눈치 챈다. 무릎에 났던 상처도 이제는 보이지 않는다. 등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느낌에 뒤를 돌아보니 커다란 책가방이 등에 걸려있다. 소녀는 사라져버린 엄마를 찾으려고 두리번거리지만 길모퉁이에서 돌아 나온 친구들은 소녀의 팔을 잡아끈다. 걱정스러운 눈길로 골목을 돌아본 소녀는 이내 체념한 듯 친구들과 함께 길을 걷는다.

 

직각으로 꺾인 골목 모퉁이를 돌아 나오는 순간, 소녀는 혼자 서있다. 교복은 약간 작아진 듯 몸에 감겨있다. 아무리 돌아봐도 친구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뒤쪽에서 무언가 쫓아오는 느낌이 든다. 잔뜩 겁에 질린 소녀는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한다. 뒤를 돌아보는 횟수도 눈에 띠게 늘었다. 귓가에 발자국 소리까지 들려오는 것 같다. 다행히 골목길 끝에 자리한 소녀의 집이 보인다. 무거운 책가방두 손으로 단단히 움켜쥔 소녀는 악착같이 뛰어 집에 도착한다. 대문 앞에 선 소녀는 주위를 한 번 살피고 집 안으로 들어간다.

 

집으로 들어온 여자는 정장차림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서류가방을 아무렇게나 집어던지고 높은 하이힐을 벗는다. 집에 발을 디디는 순간 구두 때문인지 퉁퉁 부은 다리가 눈에 들어온다. 털썩 주저앉은 여자는 발을 주무르다 이내 눈물을 흘린다. 소리 내어 울고 싶지만 마지막 자존심은 세어 나오려는 울분을 집어 삼킨다. 흐르는 눈물을 닦아낸 여자는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때 방문이 열리며 한 소녀가 뛰어나온다.

 

웃는 얼굴로 달려오는 소녀를 받아 안은 여자는 허름한 복장의 자신을 내려다본다. 아름답던 자기는 이제 없다는 사실에 슬픔이 몰려온다. 그때 품에 안긴 소녀가 여자의 얼굴에 입을 맞춘다. 굳어있던 여자의 얼굴은 봄볕을 받은 땅처럼 서서히 녹아간다. 어느새 소녀의 미소와 닮은 환한 미소가 여자의 얼굴에도 떠오른다. 소녀의 재촉에 여자는 밖으로 나간다.

 

문 밖으로 나온 노인은 순간 불어온 차가운 바람에 몸을 한껏 움츠린다. 그때 문이 열리며 한 여자가 문 밖으로 나온다. 여자는 손에 들린 목도리를 노인의 목에 걸어주고 옷맵시를 다듬어 준다. 여자의 사랑스러운 눈길에 노인도 미소로 화답한다. 양손으로 옷깃을 움켜쥐고 있던 노인의 손을 잡은 여자가 대문 쪽을 가리킨다. 그곳에는 한 명의 노인, 두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 그리고 세 명의 소녀와 두 명의 소년이 서있다. 그들은 여자의 손을 잡은 노인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노인은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흘러 하늘을 올려다본다. 하늘에는 언젠가 본 적 있는 풍선이 구름을 따라 날아가고 있다. 



변화


요즘 나를 괴롭히는 사실은 단 하나였다. 그것은 세상 그 무엇보다 뚜렷했으며 실체도 없었지만, 어느 샌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라 세상을 보는 그 심오하며 소중한 소통의 통로를 반쯤 가려버렸다.


고통에서 피어오른 아련한 향기는 내 피를 타고 온몸으로 퍼져갔다. 싸늘하게 식은 두 손은 간절히 온기를 바라고 있었으며, 초점을 잃은 두 눈은 한 곳을 응시하려 발버둥치고 있었다. 가뭄이 온 땅처럼 갈라져있던 입술은 부르는 것만으로 가뭄을 멈춰줄 그 이름을 기다리고 있었다. 멈춘 심장은 고통의 피로 간신히 뛰고 있었지만 그날처럼 갑작스러우며 간절했던 떨림을 기억하고 추억하였으며, 머리는 고통을 멈추기 위해 수 만 가지의 상자를 수 만 개의 열쇠로 열어보기 시작했다.


어느 상자는 먼지에 뒤덮여 마치 회색구름처럼 보였으며, 그곳에선 추억의 향기가 제법 강하게 풍겨오고 있었다.

그곳에서 나온 기억은 대부분 잘려진 필름처럼 귀퉁이가 잘려나가 있거나 흐릿해 잘 알아 볼 수 없었다. 온몸이 고통을 떨쳐내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하자. 온몸이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천천히 움직였다. 그 움직임엔 그 어떤 활기도 찾아 볼 수 없었지만 단결된 움직임은 간절함을 담고 있었다.


몸 속 곳곳에 숨겨져 있는 작은 실마리를 따라 미로에서의 탈출하듯 조심스럽게 한 걸음 한걸음 나아가는 모습은 그 어떤 성자의 모습보다 경건했으며, 그 어떤 악인보다 치밀했다. 기억은 어린 시절 보물처럼 여겨지던 은빛 돌멩이보다 더 소중히 더듬어졌으며, 살짝 벌어진 틈새로 떨어져 사라져버리진 않을까 하나하나 꼼꼼하게 간절한 눈을 통에 엿보여졌다.


이제는 상자 두어 개 정도만큼의 기억만을 남겨 놓고 있었다. 이때 나는 서서히 초조함이라는 벽이 다가옴을 느꼈는데 그 이유는 내가 느끼고자 했던 그 온기나 감정들이 눈을 씻고 찾아봐도 기억의 필름에 들어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봄이 찾아온 언덕을 덮은 꽃만큼이나 많은 장면을 모두 봤을 때, 나는 깨닫고 말았다. 내 손이 느끼고자 했던 그 온기는 한 번도 내 싸늘한 손에 닿은 적 없었고, 심장이 기억했던 그 떨림도 머릿속에서 만들어진 신기루일 뿐이라는 사실이었다.


허탈하게 주저앉은 내게 세상은 머리 위의 불을 꺼뜨린 초와 같이 초라해졌고, 공기는 마시는 것만으로 숨통을 조여 오고 있었다. 두 무릎과 손이 닿은 땅은 꽃들에게 온기를 빼앗긴 채 한 없이 차가워져갔다.


모든 세상이 무()로 돌아가고 있었다.


마치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러한 세상의 변화는 너무나 자연스러워 막고 싶은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저 멀리 언덕너머로 다가오는 태양만이 그 빛을 잃지 않고 어두운 세상을 밝히려 움직이고 있었다.


고갤 들어 하늘을 보니 검은 구체 하나가 보기만 해도 싸늘한 공기를 품은 채 회색 구름을 이끌며 하늘을 누비고 있었다. 그때 내 속에서 들려온 한 목소리는 그 검은 구체가 태양이라고 말하였으며 다시 한 번 언덕을 보라고 다그쳤다.


언덕을 내려온 그 빛의 무리는 서서히 내게 다가왔으며 내 앞에 섰을 때는 그 빛에 집어 삼켜지는 듯했다.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찬란했던 빛 사이로 약간은 옅은 빛줄기가 세어 나왔다. 빛줄기는 내게 내밀어진 구원의 손처럼 느껴졌고,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뻗어 한줄기의 빛줄기를 잡아끌어 가슴에 품었다.


무의 세상에서 빛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 버린 내 몸은 바뀐 세상에 반응하듯 빠르게 변해갔다. 싸늘하던 손은 그토록 갈망하던 온기를 띄었으며, 두 눈은 가슴에 품은 빛처럼 은은한 빛을 띠고 있었다. 심장은 멈출 수 없이 피를 뿜어대고 있었으며 그 박동은 온몸을 울려댔다.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기억은 빛에 지워져 사라져버렸지만 전혀 아쉬운 느낌은 없었다. 오히려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가슴에 품은 빛줄기는 내 가슴에 안긴 채 그 모습을 바꿔갔고 나와 마주한 그것은 어느새 너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세계에 놓고 온 두려움과 괴로움 대신 현()세계는 나에게 너를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