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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의 일본

 

공기는 너무 차가운데, 몸은 벌겋게 될 만큼 뜨거워졌다. 여기엔 진짜 별이 떠 있네. 낭만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애인이 생긴다면 꼭 여기에 데리고 와 밤에 몰래 다 벗고 둘이서만 여기에 있어야겠다는 다짐도 해보았다. 엄마도 옆에서 말없이 별을 봤다. 한국과 그리 멀지도 않은 이곳에는 이토록 맑은 별이 있다니.. 조금은 묘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우울한 졸업식이었다. 중학교를 졸업할 땐 그래도 이 졸업식은 덜 우울하다고, 다들 어딘가 갈 곳이 정해졌기 때문이라는 말을 별로 귀담아 듣지 않았었는데 어쩐지 고등학교 졸업식은 그 자체로도 너무나 우울해졌다. 가장 큰 이유는 내가 갈 곳이 없는 한 사람이기 때문이었겠지. 뭘 하겠다고 결심하는 것 자체가 힘들 때였다. 몸도 마음도 알이 배겨 풀릴 때 까지 기다리는 것도 고역일 때기도 했다. 그 날 졸업식엔 국회의원이 왔었는데 사실 나는 기억이 잘 나질 않는다. 다만 엄마가 그 분의 축하사에 너무 감격을 받아 버린 것이 문제였다. 뭐 그런 뻔한 말을 했다. 자기계발서 앞장에나 나올법한, 속도는 중요하지 않고 방향이 중요하다. 늦은 때는 없고, 심지어 나도 재수를 했다! 등등의..

 

그 날 엄마는 나를 뷔페파크에 데려갔다. 우리가 아는 가장 비싼 뷔페였다. 초콜릿 분수 앞에서 초콜릿을 퍼와 자리에 앉자마자 엄마는 나를 붙잡고 일 년 더하면 될 것 같다는 말을 했다. 솔직히 아무것도하기 싫었다. 공부도하기 싫었고, 운동도하기 싫었고, 뭐 다른 일도 딱히 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냥 어딘가에 쳐 박혀 사람들이 모두 나를 잊어버렸기를 바라며 숨어 지내고 싶었다. 그냥 모든 게 다 창피했던 때였다. 하는 수 없이 재수를 결정하자마자 엄마는 또 일본여행 티켓을 끊었다. 온천에 가서 몸과 마음을 다 풀어놓고 와야 한다는 말도 했다.

 

여권사진이 너무 범죄자처럼 나왔잖아...

 

너무 급해서 어디 알아보지도 못하고 집 앞에서 후다닥 찍은 것이 화근이었다. 이걸 공항에서 몇 번이고 펼쳐 보여줘야 한다니...

 

후쿠오카에서 기차를 타고 한참을 들어가야 유후인으로 갈 수 있었다. 몇 번을 타도 익숙해지지 않는 택시 자동문이 조금 웃겨졌을 때 도착한 료칸은 생각보다, 아니 상상보다 더 좋았다. 그곳엔 내 또래인 애가 일을 하고 있었다. 가업을 물려받는다니, 살짝 생소하고 또 신기해서 되지 않는 영어와 일본어를 섞어 몇 마디를 나눴다. 걔는 자기 몸 만한 이불들을 옮기고, 식기들을 정리하고, 온천물을 확인하러 분주하게 뛰어다녔다. 한 번도 웃지 않거나, 인사를 거르는 일이 없었다. 매우 자주 마주치는데도 그 때마다 기분이 좋아질 정도로.

 

저녁식사 내내 코스로 나오는 요리는 사실 입맛에 맞지 않았다. 그냥 일본에 도착해서 떠날 때 가지의 모든 음식들이 입에 잘 맞지 않았다. 생각보다 음식에서 단 맛이 너무 많이 났다. 간장냄새도 너무 많이 났다. 그리고 야채를 잘 먹지 않아 더 먹을 것이 없었다. 원래 이런 곳 와서는 이것저것 다 시도를 해봐야 한다던데 큰 용기가 나질 않았다. 그나마 마지막 즘에 나온 와규를 열심히 먹고 나니 코스가 끝났다. 배가 꺼지기 전에 온천에 들어가야 할 것 같아서 얼른 옷을 갈아입고 나갔다. 무지 깜깜했고, 시간이 늦어서인지 아무도 없었다.

 

엄마랑 목욕을 자주 가는 편인데도 알몸이 잠깐 어색해 도망치듯 온천 안으로 미끄러졌다. 뜨거운 물에 들어가려면 아예 몸을 다 담구는 것이 빨리 적응이 된다. 발부터 담그며 앉아있다가는 온 몸을 담그기가 힘들어진다. 얼굴만 내밀고 입김이 나오는 것을 한참동안이나 바라봤다.

 

추워...

 

그 말만 반복하다가 고개를 드니까 별이 엄청 많았다. 순간적으로 무지막지한 감성이 차올랐다. 일본에 가자고 했을 때 도쿄도, 오사카도, 삿포로도, 오키나와도 아닌 이곳에 오는 게 실망스러웠던 마음이 다 사라지는 것 같았다. 마음이 좀 정리되는 것도 같았다.

 

올 해의 남은 시간들을 나를 더 가여워하며 지내고 싶었다. 나에 대한 연민은 가끔은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하니까.

 

다음 날 나는 걔와 조금은 아쉽게 인사하고 료칸을 나왔다. 사실 걔에게 나는 수많은 투숙객 중 하나였을 것이지만 나는 걔가 조금은 좋아질 것도 같았다. 아무리 봐도 멋있었다. 사실은 조금 부럽기도 했다. 나에겐 물려받을 것이 아무것도, 그리고 내가 대를 이어 해내갈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은 너무 당연하지만 괜히 서운하기도 했다.

 

안녕!

 

나는 한국어로 인사했다. 손을 흔드는 나와 달리 걔는 고개를 숙여 안녕..! 이라고 인사했다. 두 인사의 간극에 대해 생각하며 길을 나섰다.

 

그 뒤로는 따로 떨어져서 여러 상점들을 구경했다. 엄마랑 쇼핑을 할 때마다 엄마는 내가 관심 있는 것에 대해서, 나는 엄마가 관심 있는 것에 대해서 전혀 배려하지 않기 때문에 따로 걸을 수밖에 없었다. 저 고로케 집에서 다시 만나서 고로케를 하나씩 사먹자! 하고선 한 시간 정도를 돌아다녔다. 확실히 여기도 관광도시 인가보다.. 뭘 많이 판다.. 하지만 내 수중에 있는 돈이라곤 천 엔이 다였다. 뭐라도 남겨서 사가고 싶었지만 그 어떤 것도 맘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맘에 드는 반지를 찾았을 땐 돈이 부족했다. 로밍을 하지 않은 탓에 엄마를 부를 수도 없었다. 아쉬운 마음에 그 반지를 사진으로 남겨두었다. 한국에 가서 비슷한게 있으면 사야지..싶었지만 재수생에게 반지는 사치인 것 같기도 하고..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우동을 시켜두곤 맥주를 두 잔이나 마셨다. 오전 열 한 시였다. 엄마는 엄마랑 여행 온 가장 큰 장점을 말하라고 했다.

 

피임 안 해도 되는 거!

 

물론 난 그 이후로 몇 년 동안 피임할 일이 없었다.

 

둘 째 날 밤이 될 때 까지 계속 걷기만 했다. 무언가를 구경하고, 길을 찾고, 다시 기차를 타고 후쿠오카 역 근처의 호텔로 왔다. 마지막 날은 더 열심히 술을 마셔야지. 역에서 조금 더 벗어나 한국인을 절대 마주치지 않을 술집을 찾아갔다. 남은 돈을 다 쓰겠다는 열정을 가지고 계속해서 걸었다. 들어가면 무조건 맥주를 원샷할거고, 닭껍질꼬치도 시킬거고..기본안주가 완두콩이었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하며 다리가 아픈 것을 참았다.

 

엄마는 나보다 잘 걸었다. 발에 굳은살이 박혀있다면 분명 엄마는 나보다 더 많은 세월의 굳은살이 박혀있을까? 가늠할 수 없는 엄마의 스물여덟해가 어느 순간 밀려왔다. 뭘 해도 엄마는 나보다 먼저 해봤을 것이라는 생각, 그 깊이는 내가 알 수 없을 만큼 깊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 엄마가 권하는 모든 것들은 그다지 나에겐 큰 해가 되지 않는 다는 사실도. 어느 순간 아직 나는 엄마가 나를 낳은 나이까지 도달하지 않았음에 안도했다. 스무 살의 내가 가장 믿지 않는 말은 넌 너무 어리다,는 말이었는데 어쩐지 내가 정말로 어리구나, 하고 깨닫기도 했다. 재수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갑자기 차올랐다. 술집에 들어서자마자 그랬다.

 

우리가 네 가족이었을 땐, 주말마다 너무 바빴다. 놀이동산으로, 수영장으로, 눈썰매장으로, 동물원과 아쿠아리움으로 빠지지 않고 다녔다. 그 때의 부모는 우리를 위해 주말을 몽땅 다 쓸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금요일 밤마다 수영가방을 싸거나, 장갑을 챙기는 일에 익숙해졌다. 놀이공원에서 어떤 기구를 먼저 타러 뛰어 갈 것인지도 미리 정해둘 수 있었다. 대부분의 제안은 아빠를 통해 이루어졌고, 나머지는 별다른 의견 없이 따랐다. 운전과 비용과 정보의 제공은 아빠를 통해서 아주 손쉽게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고, 우리는 그 시간을 즐기는 것만이 의무였다.

 

처음으로 엄마가 나와 동생을 데리고 먼 곳에 간 것은 우리가 조금 더 어릴 때 일이었다. 사실 나는 그곳이 어딘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고속버스를 탔었고, 찜질방에서 하루를 보냈다. 나는 직감적으로 엄마와 아빠의 다툼 끝에 엄마가 우리를 데리고 도망쳤다는 것을 알아챘다. 찜질방에서 나는 한숨도 자지 못했다. 엄마가 계속해서 통화를 하거나, 울거나, 쓸데없는 음식을 사오는 것을 보기만 했다. 우리는 엄마를 피해 냉탕으로 가 바가지를 겹쳐놓고 놀았다. 나는 물속에서 조금 울었다. 어쩐지 여기서는 더 오래 있을 수 없을 것 같은데. 그런 불안감이 밀려왔다. 차라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이렇게 즐겁지 않은 주말은 처음이었다.

 

그게 엄마와의 첫 외박이었는데.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맥주를 마셨다. 술을 마시면 별안간 하고 싶지 않았던 이야기를 꺼내게 되기도 했다. 그게 이제 너무 오래 전 일이라 그 때의 모든 감정이 복기되지는 않았다. 생애 첫 해외여행을 둘이서만 오게 되다니, 시간이 아주 많이 흐른 것을 직감했다.

 

흙탕물 같은 시간들이었어.

 

엄마는 항상 그때를 그렇게 칭했다. 시간이 지나고 보면 물 위는 맑은데, 사실 휘저으면 다시 흙탕물이 된다고, 그렇게 말했다.

 

그렇지만 너의 스무 살과 그 이후의 삶은 더 이상 흙탕물이 되지 않도록 엄마는 부단히도 노력하고 있어.

 

엄마는 또 그런 말을 덧붙였다.

 

가게는 좁았지만 사람들은 끊임없이 들어왔다. 안주는 정갈하고 양이 적었고, 기름 냄새가 역하지 않게 고소했다. 여기서는 한국말이 들리지 않아서 더 크게 이야기 할 수 있었다. 하루의 일과를 끝마친 직장인들과, 연인들과, 가족들은 저마다의 표정으로 자리를 찾아갔다. 주위를 둘러보면 대부분은 취해있었고, 또는 취하는 중이었으며, 가끔은 울거나 소리를 치기도 했다. 다른 나라의 언어로 같은 인간의 감정을 가늠하는 것은 조금은 어려운 일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완벽한 이방인이 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다른 언어를 쓰는 우리를 힐끔거리는 시선을 즐기기로 했다.

 

어울리지 않는 노래가 아주 작게 흘렀다. 그 당시 나는 샘스미스의 노래에 미쳐있었고, 그 노래는 그 해 초에 나온 신곡이었다. 노래의 감미로움은 뒤로 하고 가사를 뜯어보면 그런 내용이었다. 너는 나를 베이비라고 부르지만, 나만 베이비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 나는 그 뜻을 전달했다.

 

원래 베이비라고 부르는 놈들 치고 바람 안 피는 놈이 없는걸..

 

정확한 해석이었다.

 

술을 마시고 나와 사원을 구경했다. 늦은 밤인데도 곳곳에 불을 켜 두었고, 사람들이 붐볐다. 왠지 소원을 빌어야 할 것 같은 곳들이 널려있었다. 확실히 동전을 호수에 던지며 비는 소원은 예의가 없었다. 믿지 않는 신이라도 있을법한 이곳에서 소원을 빌어야만 할 것 같았다.

 

엄마와 내가 만나지 않는 소원을 빌 수 있다면, 그건 엄마가 더 행복해지는 길이 될까? 그렇게 된다면 엄마가 말한 흙탕물 같은 시간들은 아예 없던 일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울적해진 마음으로 다른 소원들을 빌라고 재촉했다. 엄마 딸이 일류대학에 가도록, 섹시한 애인을 만들도록, 술을 아무리 마셔도 튼튼한 간이 지속되기를 등등의 소원이었다. 엄마는 그런 것들을 다 이루지 않아도 된다고는 했지만 빌어준 것 같기도 했다.

 

가깝고도 먼 나라에서 아주 가깝지만 또 너무나도 먼 사람과의 날이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







중도포기



여러 가지 중도포기를 했을 때는 어금니 쪽 잇몸이 두근거리는 느낌이었다.

 

락스물에 머리까지 푹 담그고 숨을 참을 때면, 그리고 물안경이 있음에도 눈을 뜨는 것을 몇 초 정도 주저하다 보면 몸이 더욱 무거워지는 기분을 느꼈다. 어쩐지 수업이 끝나자마자 최와 나는 맥주를 마셔야만 할 것 같아서 홀린 듯 캔맥주를 마셨다. 기초반에서 초급반 까지도 올라가지 못한 채로 포기했다. 수영가방을 일부러 옷장에 넣지 않고 잘 보이는 곳에 올려두었다. 마음이 변하기를 바래서였다. 아르바이트 들을 관둘 때면 별의 별 변명들을 메모장에 10번까지 기록하다가 가장 그럴싸한 변명을 골랐다. 일자리를 포기하는 일은 돈의 욕심만 없다면 금방 이루어지는 것들이라서 쉬웠다. 그리고 어느 날 찾아오는 잔고의 압박은 다시 새로운 일자리를 모색하게 하니까 그리 힘든 포기가 아니었다. 탁구대에서 이쪽저쪽을 옮겨 다니는 탁구공처럼 아무 곳에도 정착하지 못하는 것이 약점이 아니라 진행을 위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연극을 하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었을 때는 충치치료를 하던 중이었다. 나는 가끔 감상적인 마음으로 치과 의자에 누워 치료가 아픈 것 보다 내 마음이 더 아프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치료를 끝내고 돌아와 다시 선언했다. 그 날 밥상에 나온 계란찜 위에 눈물이 떨어졌다. 그리고 정확히 2년 뒤 나는 같은 포기를 하겠다고 다시 말했다. 그 자리에선 놀란 사람도, 우는 사람도 없었다. 침묵이 길게 느껴졌다.

 

누군가 나를 보며 한심하게 생각할 것을 떠올리면 당장이라도 바깥으로 나가서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어느 날 그게 변명을 하고 싶다는 마음인 것을 알아차리고 나는 더 열심히 중도포기를 했다. 당신들이 어떻게 생각해도 나는 계속 포기를 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주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나의 중도포기를 안타까워하지도, 슬퍼하지도 않았다. 가장 가슴 아파 하는 것은 나였다.

 

돈이 없어서. 엄마가 싫어해서. 몸이 잘 안받아줘서. 재미가 없어서. 집이랑 너무 멀어서. 다른 게 더 좋아서. 중도포기의 이유들은 수없이 쌓여갔다. 하지만 그 어떤 포기도 마음이 아프지 않은 적은 없었다. 각각의 이유로 나를 눈물짓게 했다. 스스로 결정한 일에도 나는 마치 보이지 않는 벽과 싸우는 외로움을 느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무언가를 시작하는 것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게 되었다. 누구도 모른다면 그것은 포기가 아닌 것 같았다. 그 이후로 일어났던 실패와 포기에 대해서는 잘 적지도, 기억하지도 않았다. 오답노트가 전혀 없는 인생이 시작된 것 같았다.

 

충치는 아닌데.. 뭐가 불편하다는 거에요?

 

왼쪽 어금니 쪽 잇몸이 너무 두근거린다는 말을 했다. 충치나 잇몸에 염증이 없으니 딱히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말을 들어도 별로 진정이 되지 않는 기분이었다.

 

새 이가 나나? 꼭 그럴 때 애기들이 간지럽다고 그러는데.

 

그럴 리가 없으니 그냥 알겠다고만 하고 왔다. 새 이가 났던 순간들을 떠올리며 걸었다. 톱니 바퀴 같은 이가 고개를 들고 잇몸을 뚫을 때부터 혀는 계속 거기에 머물렀다. 까끌거리고 생경한 느낌들. 그런 기분이 지속되는 와중에도 잇몸이 두근거렸다.

 

무수한 이유로 포기를 경험했을 때, 그리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에 앞서 혼자만의 외로운 다짐을 할 때에 그런 두근거림이 온다는 것을 알았다. 잇몸에서..그게 잇몸에서 느껴지는 것이 좀 이상할 뿐이다. 나의 모든 신체에 가장 무지한 것은 또 나 자신 같았다.

 

재능이 없어서. 아직 그 이유를 써서 포기한 것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여태 그래왔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으며, 나중에도 재능을 이유로 시작할 일도 없을 것이다. 나의 숱한 중도포기는 그렇게 이루어졌다. 그냥 시작했으니까 그냥 끝낼 수 있었던 것이다. 다만 포기를 할 때 즈음엔 나의 시작이 아주 거창해 보여서 자꾸 울었던 것이다. 왠지 나 엄청 잘 할 수 있다고 큰소리를 치며 시작 한 것 같은데. 벌써 포기를? 하지만 시간이 더 지나고 생각해보면 그런 호언장담은 하지 않았다.

 

글을 써서 누군가에게 보내준다는 말을 했을 때에도 밥상 위에는 침묵만 있었다. 나는 여전히 잇몸이 두근거리는 상태로 두려움에 떨며 글을 쓴다. 누군가의 침묵에도 아직 포기하지 않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그냥 시작했으며 재능이 있는지는 더더욱 모른다. 다만 시작을 누군가에게 알렸다는 점이다. 이제 이 일의 중도포기는 그렇게 쉽게 이루어 질 수 없다







신민영

이메일: fbtndud09@naver.com

010.7746.0625


  • profile
    korean 2019.04.30 21:25
    수고 많으셨습니다.
    더욱 분발하시면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늘 건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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