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 외 1편

by 하나린 posted Nov 19,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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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


 그 애를 처음 만났던 것은, 사흘이 채 되지 않은 새봄이었다.

 예쁜 아이. 그 감상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다. 열 살도 채우지 못했던 그 때에도 그 외형의 힘은 대단했다. 누가 말을 먼저 건넸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니는 학교가 같았고, 집 주소의 네 마디가 같았고, 나이가 같았다. 그것만으로인지는 몰라도 언젠가부터 나는 그 '예쁜 애'와 꽤나 친해져 있었던 것 같다. 친해져 보니 '그 애'는 생각보다 더 대단했었다. 어디서든 칭찬받고 사랑받는, 딸로서도 친구로서도 여자로서도 완벽하기 그지없는 친구.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걔는 왜 나랑 다녔을까. 솔직히 그때의 나는 좀, 많이 음침했었는데 말이지.

 그래도 그 애는 좋았다. 네가 나를 왜 좋아했는가와는 별개로 내가 좋아했다. 처음은 생각나지 않지만, 가장 최근에 떠오르는 모습은 나름 선명하다. 본 중 가장 단정한 얼굴, 그만큼 예쁜 목소리, 그리고 빛나는 것 같은 까만 눈. 어렴풋이었지만, 그 좋은 외모에도 지지 않는 속모습이 가장 좋았다. 머리도 좋고 그만큼 노력하고, 하고 싶은 것도 좋아하는 것도 많아서 성적도 높았다. 그렇게 빈틈없는데도 웃음소리는 꾸밈이 없고, 제 마음을 말하는 데 주저가 없고, 좋아하는 사람에겐 더없이 상냥한. 어느 면으로 보나 완벽하기 그지없는 아이인데 일말의 질투심도 일지 않는다. 성장만화의 조언자처럼 한없이 '이상'에 가까운 아이니까. 속으로는 조금 닮고 싶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

 이제 그 애를 닮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 년간은 거의 잊어버리고 있었다. 며칠 전 문득 떠올랐을 때 확 마음이 일렁였던 걸 빼면, 놀랄 만큼 담담한 존재가 되었다. 금방 잊어버릴 것 같으면서도 절대로 잊지 못할 것 같기도 하다. 분명 한 번쯤 또 마주칠 테지만 어쩐지 다시는 만날 수 없을 모습으로 다가와서 언제나 그렇게 나를 흔들어 놓고 지나간다. 그 유유한 뒷모습은, 사람을 정말 울 것처럼 만든다. 그래, 이제 와서 생각하면 밝고 예쁜 날의 동화 같은 이야기. 너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너는 나를 아직 기억하고 있을까. 마치 철없는 짝사랑에 어쩔 줄 모르는 소년처럼. 이걸 더 이상 친구로서의 애정이라고 불러도 되는 걸지도 모르겠다. 이별 없이 찾아오는 그리움은 존재하지 않는 이유로 더욱 깊게 스며든다. 너를 좋아하는 감정은 이제 동경이라 해도 좋을 만큼 순수해졌지만.

나를 다시 만나는 날에 너는 어떤 얼굴을 할까. 이만큼이나 달라진 나를 보고도 그처럼 환하게 웃어줄까. 아니면 처음 보는 지친 얼굴로 되려 내 어깨를 잡아올까. 이런 상상들로 나는 더없이 즐거워진다. 여자아이들 특유의 애매하고도 막연한 관계는 정말로 머리가 지끈거리도록, 그래.

아름답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쉽게 쓰여진 이야기



어느 평범한 저녁, 텔레비전은 최근 새로 시작한 시리즈 드라마를 내보내고 있었다. 1988년을 배경으로 하는 서막은 오래된 모노드라마처럼 잔잔했고, 그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우리 집 여자들도 역시 그랬다.

시작되는 낯익은 풍경 속에서 등장인물들은 놀고 싸우고 웃고 떠들며 친숙한 분위기를 품어냈다. 향수 짙은 냄새를 풍기는 광경에 작게 웃으며 말문을 트니, 늘 그렇듯 반 농담조의 만담이 이어졌다. 언니는 치고 박고 싸우는 자매를 보며 낄낄댔고, 나는 옛날 만화책 같은 모습에 킥킥댔고, 엄마는 때맞춰 흘러나오는 음악을 따라 불렀다. '스탭 바이 스탭-' 으로 시작되는 익숙한 멜로디의 노래는 따라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만큼이나 여상스러웠다.

아시안게임, 그리고 88올림픽. 옛날 멕시코 드라마, 90년대 초 유행이었던 홍콩 영화들. 목판을 열고 닫는 텔레비전, 첫 새우깡 봉다리까지. 속속 떠오르는 장면들을 해설하듯 이야기하는 엄마는 드물게 들떠 있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보는 경쾌한 웃음 소리도. 식사 때가 되면 골목골목 울려 퍼지던 "밥 먹어라-!" 소리는 나에게도 이미 친숙했다. 한때 그 소리를 똑같이 외쳤던 엄마는, 지금은 전기 곤로에 달고나 만들어먹다가 오빠랑 같이 눈두덩이를 데인 일을 이야기하면서 킥킥 웃고 있었다. 이야기보다도 그게 더 웃겨서 나도 웃었다.

오래된 라디오에서 지직거리며 흘러나오는 지직거리는 방송을 배경 삼아, 저 때가 참 좋은 시절이었지- 라는 말을 귀에 담았다. 간장과 콩나물 사러 돌아다녔던 동네 오빠와, 집집마다 서로 반찬 건네기 바쁘던 시절은 내 어린 기억 속에도 있었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이 삭막한 아파트도 남몰래 좋아하고 있지만. 내가 정말 감상에 빠졌던 건 그런 게 아니었다. 그런 얘기를 하면서 또 웃음을 터뜨리는 엄마는 정말로 열여섯 앳된 소녀 같았다. 나는 그게 왠지 새삼스러웠다.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깨닫지 못했던 것이었다. 우리 엄마도 멋모르는 소녀였고, 청초한 숙녀였고, 예쁘게 빛나는 새신부였을 텐데, 그걸 몰랐다. 내 기억 속의 '엄마'는 언제나 엄마였을 뿐이었으니까. 풋풋하고 서그러운 추억으로 돌아가면, 어쩌면 아직도 젊고 열정 넘치는 모습일 엄마다. 공부 못해도 효도 잘 하기로 소문난 20층 둘째인데, 엄마 마음을 몰랐다는 생각에 내가 퍽 한심스럽더랬다. 몇십 년 후든 그 마음은 언제나 소녀이겠지.

그래도 엄마가 웃는다. 나도 웃는다. 그거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