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차 창작 콘테스트 수필 - 엉덩이에 붙은 껍질을 깨닫는 순간 외 1

by 김도연 posted Jun 01, 2018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엉덩이에 붙은 껍질을 깨닫는 순간


김도연


 나는 미생이라는 만화를 본적이 없다. 그저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만화가 있다는 이야기만 들었다. 만화만이 아니고 드라마로도 만들어지고, 또 그럴만한 가치를 독자(시청자)들에게 전달해주는 작품이라고 극찬하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나는 별 큰 관심을 두지는 않았었다.

 24살에 맞이하던 봄. 3. 아직 겨울의 잔향이 남아 옷깃을 부여잡게 되는 그런 추운 날씨 속에서도 그때의 나는 마치 세상이 전부 내 것인 마냥 즐거움의 온기에 가득 차 있었다. 대한민국 젊은 남자라면 반드시 맞이할 수밖에 없는 큰 고비, 군대를 전역했으니까. 진흙에라도 빠진 듯 무겁기 그지없던 군화가 그날만큼은 날개가 달린 헤르메스의 신발마냥 가볍게 느껴졌었다. 훈련소 때부터 줄곧 입어온 꼬질꼬질한 군복도 그날만큼은 그 어떠한 명품보다도 자랑스럽게 여겨졌었다. KTX에 좌석이 없다는 안내원의 말에도 빨리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입석으로 끊어달라는데 망설임 따위는 떠오르지도 않았다. 내 인생에서 그날만큼 몸도 마음도 가뿐했을 때는 아마, 아니 분명 없을 것이다.

 거기에 그때의 나에게는 남들이 부러움에 혀를 내두를 만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 무엇도 걱정할 필요도 없이, 저 지평선 너머까지 길게 펼쳐진 레일 위로 라는 열차를 올려두기만 하면 되는 행운이 나에게 주어져 있었다. 내 나이대의 다른 친구들에게 그 행운이 뭔지 이야기했다면 분명 배가 아파서 드러누워 버린 환자들로 수많은 병원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을 것이 분명하다.

 취직! 이 단어를 듣고 가슴 한 구석에 커다란 돌덩이를 매어 놓은 것 같은 답답함을 느끼지 않는 요즘 젊은이들이 있을까? 능력과 실력이 보증되는 명문대 학생들조차 취직이라는 녀석과 직접 마주하면 부정맥이라도 왔는지 가슴을 부여잡고 호흡장애가 온 것처럼 숨이 거칠어지는데, 흔한 말로 지잡대를 나온 젊은이들이 느낄 압박감은 어떠할까? 측정해서 수치로 만들면 미국 국방비보다 더 나오지 않을까?

 하지만 그때의 나에게는 그렇게 와 닿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취직이 어렵구나, 실업자가 많구나, 명문대 출신 백수들도 있구나, 뉴스나 SNS로 전달받는 정보들을 그저 정보로서 이해하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양심껏 왜 취직을 하지 못하는 걸까?’ 같은 배은망덕한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그보다 조금 약한 난 운이 좋았구나!’정도만 몰래 생각했었다.

 ‘미래행운이 군대를 막 전역한 풋내기에게 어떻게 느껴졌을지 그 본인이 아니고서 누가 짐작할 수 있을까? 남들이 다 고생하는 취업에 대한 공포와 맞설 일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마음을 가볍게 해주었는지는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을 정도다. 사회초년생이었던 나에게 취업할 장소가 찾아와주다니, 그것도 교통비와 식비도 전부 지원받고 덤으로 외국어까지 공부할 수 있는 그런 장소라니! 꿈만 같은 이야기였다.

 로또에 당첨된 것과도 같은 수준의 행운을 맞이한 그때의 내가 남들이 복학이나 알바에 대하여 고민하고 있을 시간에 뭘 하고 있었는가하면, 집에서 빈둥거리고 있었다. 어차피 취업할 거 학교는 안중에도 없어 휴학계를 던져버리고 군대에서 알뜰살뜰 모은 월급을 용돈으로 쓰면서 취업할 때까지 그 시기를 무료하게 흘려보냈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그때의 나는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을까 싶다. 이제 와서 후회한들 소용이 없지만.

 눈앞에 놓인 번쩍번쩍한 행운에 눈이 멀어버려서는 그 휘황찬란한 빛 무리 속에 잠겨있던 그 놈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만약 그때의 내가 그 놈에 대해 조금이라도 빨리 눈치 채고 대처했더라면? 지금과는 다른 결말을 맞이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요는 행운에 취해 방탕해지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얼마 안 있어 배우게 될 것임을 그때의 나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24살의 여름. 7. 나는 여전히 눈부신 행운을 쫓아 공항에 도착했다. 한국을 떠난다는 두려움과 가족들과 멀어진다는 두려움에 공항을 가로지르던 나의 발걸음은 굉장히 무거웠었다. 그다지 손에 잡을 일이 없던 여행가방의 바퀴소리가 낯설게 들렸었고 쓸데없이 넓어 보이는 공항의 풍경에 사람들이 개미처럼 바글거리고 있는 모습도 부담스럽게 느껴졌었다.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무슨 이유로 비행기에 오르는 걸까? 사소한 의문들이나 가다가 추락하는 거 아닌가에 대한 헛걱정들, 아버지 혼자 집에 계실 때 또 소파에서 주무실 텐데 누가 챙겨드릴까? 쓸데없는 걱정들로 속을 태우고 있었다.

 내가 가게 될 곳이 어떤 곳인지 전혀 알아본 것도 없고, 무엇을 하게 될지도 전혀 생각해두지 않았었다. 외국이지만 같은 한국인들과 일할 거니까 거기 말은 거기서 배우면 되겠지? 안일한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 안일함에 크게 데이게 될 거라는 걸 깨닫는 것은 그곳, 태국에 도착했을 때다.

10시간이 넘는 비행 끝에 태국에 도착한 나는 일단 길을 해맬 수밖에 ㅇ벗었다. 말이 안 통하니까. 번역기를 사용하더라도 제대로 된 정보를 얻을 수 없었고 또 당황해서 정신이 없던 터라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찾기 힘들었다. 시작부터 불안한 암운이 끼기 시작했음을 전혀 자각하지 못한 채 방황하던 나는 겨우겨우 내 이름이 적힌 피켓을 발견할 수 있었다.

 피켓을 들고 있던 분은 한국 사람일 것이라는 내 예상과는 반대로 태국분이셨다. 당연히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분이 오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게 무슨 일이야? 말도 통하지 않잖아? 걱정으로 가득 굳은 채 쭈뼛쭈뼛 태국분에게 다가갔는데 익숙한 한국말로 인사를 건네주셨다. 지금도 그때 느꼈던 안도감은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유창하지는 않았지만 직원분이 한국말을 하실 줄 안다면 일하는 데 큰 걱정은 없겠구나. 도착한 직후의 내 모습이 어땠는지 까맣게 잊어버린 나는 앞으로 일하게 될 공장에 도착할 때까지도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 아니 걱정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었다. 그 뒤에 펼쳐질 일들은 내 평생 내 가슴에 묻고서 관까지 숨기고 싶었던 것들이지만 그만큼 나에게 많은 것을 느끼고 되돌아보고 반성할 수 있게 해준 계기들이다.

처음에 언급했던 미생의 이야기로 잠시 돌아간다. 미생의 주인공 장그래는 바둑기사를 꿈꾸었으나 프로가 되지 못하고 아는 인맥의 도움을 받아 회사에 취직하게 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은 주인공 장그래가 회사라는 현실을 풀어나가며 겪게 되는 고초와 환희의 이야기들이다. 행운이 주어진다고 해서 그 행운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또 그 행운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만큼 자신에게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리고 또 공짜로 주어진 행운에도 그만한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주인공 장그래는 보여주었다. 미생이 보여주는 교훈과 내가 후회하게 되는 현실이 너무나도 잘 맞아떨어졌다.

 준비되지 않았던 나. 외국어도, 하게 될 일도, 목표도, 각오도, 절실함도 아무것도 없었던 나.

 내가 마주하게 된 행운의 본모습은 잔인한 현실의 냉정함이었다. 당연히 숙지해야할 일들도, 나에게 주어진 역할도, 나를 키우기 위한 가르침도 나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저 가르쳐주지 않는다, 도와주지 않는다, 처음이다, 같잖은 변명만을 늘어놓고 있는데 대우가 뒤따라 올 리가 없었다.

 공장에서 사용하는 설비들의 이력을 통해 리스트를 만들어보라는 첫 업무를 받았다. 설비의 사진을 찍고 규격을 기입하고, 수량과 부속품을 표를 통해 만들면 되는 일이었다.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닐 거라는 말에 나는 안심했었던 모양이다. 그 안심이 너무 지나친 바람에 첫 업무를 어영부영 설렁설렁 해버리고 말았다. 사진하나 똑바로 찍지 못하고 설비에 다 나와 있을 규격들도 찾지 못해서, 아니 없더라도 직접 규격을 측정해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서 개월로 따질 시간을 한 업무에만 매달려버리는 결과를 내놓은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때 왜 그랬을까, 후회하기에는 늦었다는 것을 알아도 불편한 마음은 어찌할 수 없었다. 일을 못하더라도 더 나아지겠다는 의지를, 나는 이 일이 아니면 안 된다는 절실함이라도 보여줬어야 하는 게 아니었냐고. 해소되지 못한 절규가 마음속에 파문처럼 퍼져나갔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눈부신 행운에 손을 뻗었다가 그 안에 숨어있던 책임이라는 무서운 녀석에게 물리고 말았다. 잘못을 바로잡겠다는 절실함이 없었던 나는 결국 행운의 대가를 견디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선택했다. 행운이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기 전의 나는 너무나도 순진했다. 어리석은 순진함에 빠져 현실을 얕보고 말았었다. 모두가 그렇게 힘들어하고 괴로워하는 취업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이제야 뼈가 시리도록 체감하고 있다.

 25. 그때의 나로부터 몇 개월 지나지 않았다. 강산이 변할만한 시간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보다 몇 계단뿐이지만 높은 곳에 올라설 수 있었다. 순진하고 무지했던 내가 현실이라는 장벽에 부딪혀 코가 깨지고서야 현실을 직시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더 이상 그때의 내가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던 것들을 똑같이 당연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현실이 입으로 말하는 것보다도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깨달았으니까.

 행운이 또다시 찾아와주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찾아오더라도 그 안에 숨어있을 책임을 감당할 자신이 지금의 나에게는 부족하다. 그 사실을 깨달은 것만으로도 값어치가 있었다는 위로를 받았지만 그 위로에 안주하고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것, 행운의 책임을 감당할 수 있게 되는 것이야말로 지금의 나에게 주어진 과제이리라.





커피


김도연



 언제부터인가 커피를 입에 대는 것이 자연스럽다. 어렸을 때는 분명 건강에도 안 좋고 키도 크지 않을 거라는 말에 멀리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나도 나이를 먹어서일까? 아니면 먹으면 좋지 않다는 이야기에 반항심이 생겨서가 아닐까? 아지랑이가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무더위 속에서도 시원한 청량음료보다 커피부터 찾게 되는 것은 나에게 뿌리박힌 버릇이다.

 어린 시절의 작은 일탈로 시작된 커피에 대한 집착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내 삶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 사람을 가죽으로 이루어진 물주머니라 표현하는 것을 얼핏 들은 적이 있다. 그렇다면 지금 내 몸은, 아니 커피를 즐겨 찾는 현대의 많은 사람들의 몸은 절반이 커피로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싶다. 잠깐 웃자고 생각한 건데 의외로 가능성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발끝이 살짝 떨릴 정도의 전율을 느꼈다.

 다른 사람들이 커피를 즐기게 된 건 나처럼 어린 시절의 작은 일탈에서 비롯된 걸까? 어른들의 하지 말라는 말을 청개구리처럼 알아먹고서 개굴개굴! 자기는 하지 말라는 게 더 흥미롭다며 커피를 홀짝홀짝 마시다가 그 맛에 반해버린 것이 아닐까? 딱히 커피가 아니더라도 모두가 일탈의 달콤함을 알고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조숙하게 책상에 앉아 책에서 손을 떼지 못하는 샌님이라도 님몰래의 맛을 모를 수 없을 것이다.

 어른들에게 철없는 반항, 의미 없는 행동, 결과가 보이는 발악으로 치부되는 모든 것들이 어린 아이들에게는 비누거품처럼 피어나는 호기심의 발로이리라. 이건 무엇일까? 저건 어떤 걸까? 이제 어떻게 할까? 우린 뭘 할 수 있을까? 호기심이라는 비누거품을 허리에 두르고 배움이라는 하늘 위로 날아오른 아이들은 하지 말라는 어른들의 먹구름을 피해 자유롭게 하늘을 노닐며 꿈을 키운다. 설사 먹구름에 거품이 터져 다시 땅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더라도, 점차 나이를 먹어 비누거품으로는 날아오를 수 없게 되더라도, 자유로이 하늘을 날았던 시절이 덧없고 화려한 기억으로 남게 되는 그날이 올 때, 일탈은 어린 시절의 한 페이지로 영원히 자기 마음속에 남지 않을까?

 안타깝게도 아름답게 빛나던 비눗방울도 터지면 한없이 덧없는 아쉬움만이 그 자리에 남게 된다는 걸 알아버리고 말았다. 우리를 자유로이 하늘로 날려주던 것은 비눗방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버리고 말았다. 현실 위에 올라서서 우리를 받쳐주던 것은 우리의 희망을 지켜주고 싶었던 이들의 아낌없는 배품 덕이라는 걸.

 삶이란 원래 그런 것일까? 비눗방울만으로 날아오를 수 있을 것만 같은 순수함은 나이를 먹으면서 현실 앞에 덧없을 수밖에 없는 걸까? 작은 일탈의 달콤함이었던 커피가 피로를 잊기 위한 쓴맛으로 변해가는 것을 느끼는 순간이 바로 어른이 되었다는 증거인가?

 더 이상 날아오를 수 없다는 절망감이 더욱 무겁게 느껴져 발바닥을 파고드는 듯한 가시가 더 나를 힘들게 한다. 너만 아픈 게 아니라고, 원래 아플 수밖에 없는 거라고, 아픈 것을 감사하라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자기들도 아프면서 따듯한 위로 한 마디 해주지 못할망정, 왜 서로가 아프게 하려는 거냐는 매운 한마디해주고 싶어진다. 하지만 내 입은 내 편이 아닌지, 아니면 고통을 참으려 꽉 깨문 입술사이로 말이 나올 틈이 없는지 목소리가 되지 못한 마음은 입안만 맴돈다.

 현실의 건조한 매서움에 퉁퉁 부운 눈은 반항심으로 붉게 물들고 악물린 입술 퍼렇게 부어 오리주둥이처럼 삐죽인다. 요즘 젊은 것들 참을성이 없다는 말을 들어도 어쩔 수 없는 몰골이지 않냐고, 거울을 보면 웃을 일이 아닌데 히죽 웃어버리게 된다. 웃음이 보약이라니까. 히죽이죽 웃다보면 언제 힘들었냐는 듯 새로운 활력이 자라나 멀쩡해진다. 젊음을 그리워하는 어른들의 마음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더 이상 새로운 활력이 돋지 않아 흉터로 자글자글해진 어른들의 얼굴, 탱탱한 우리 얼굴이 얼마나 부러울까? 얼마나 울화통이 터질까?

 편의점에 들어서면 자연스럽게 커피가 진열된 장소부터 찾고 있다. 캬라멜? 카페모카? 카푸치노? 아메리카노, 아니아니 이건 달지 않아. 한 걸음 한 걸음 메마른 황야를 나아갈 기운을 얻고자 달콤함을 찾게 된다. 다시는 일탈의 달콤함을 새로 맛볼 수 없더라도, 맛보았던 달콤함을 떠올리는 것은 할 수 있으니까. 달콤함이 혀를 간질이고 향긋함이 콧구멍을 타고 퍼지면 현실의 고통도 비눗방울 허리에 둘렀을 때처럼 잠시 잊을 수 있다. 달달한 게 그리 좋냐? 어린애 같은 입맛이라 비웃음 사기도 하지만 어린 시절의 일탈이 전해주던 자유로움 떠올리려는데 일부러 어른의 맛을 찾을 필요가 있냐고 따져주겠다. 오늘도 나는 커피를 마신다. 달달한 맛에 빠져 아무 눈치 보지 않고 표정을 늘어뜨리며 커피의 맛이 건져 올린 기억을 음미한다. 그래 오늘도 힘낼 수 있어. 한 걸음 또 한 걸음 메마른 현실의 황야를 지나온 내 발자취에 커피 향을 남긴다.




Articles

8 9 10 11 12 13 14 15 16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