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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10 18:41

흙 그리고 논 외 1

조회 수 22 추천 수 1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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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 그리고 논


    

내가 어머니로부터 들은 바에 의하면, 나의 외조부는 매우 근면하고 검소한 분이셨다. 그는 가난한 농부로서, 먼동이 틀 때 논에 나가서 일을 하다가 아침식사를 위해 잠시 집에 들르고는 숟가락을 놓자마자 다시 논으로 나갔다고 한다. 점심은 논으로 가져오게 하여 논둑에서 먹고, 해가 져 어두워 더 이상 일을 못할 정도 돼서야 집으로 들어오는 나날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돈도 농비와 품삯으로 쓰거나 남에게 빌려주어 이자를 받는 수단으로 알았지 먹고 입는 데 함부로 쓰는 것은 사람의 도리가 아닌 것으로 알았다고 한다.

당시는 비료가 귀한 시절이라 가축의 분뇨나 인분이 거름으로 귀하게 쓰이던 시절이었다. 외조부의 논은 마을입구에서 읍내 가는 길 중간 약간 못 미쳐 있었는데, 시장에 다녀 올 때면 오줌이 마려워도 참고 걸음을 재촉하여, 자기 논에 와서야 볼일을 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오가는 길에 지푸라기 하나라도 떨어져 있으면 반드시 주워서 그 논에 던져 넣었다고 한다.

외조부 사전에는 농한기라는 것이 없었다. 겨울이면 논의 높은 곳 흙을 파서 낮은 곳으로 져다 날랐다. 논에 물을 대었을 때 한쪽이 마르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흙은 파낸 곳 지질을 돋우기 위해서 일부러 독새(논에 흔히 돋아나는 잡초의 일종) 씨를 받아놓았다가 뿌렸다고 한다. 잡초는 박토에도 잘 자라니 그렇게 해서라도 논을 옥토로 만들겠다는 심사였던 것이다. 그렇게 알뜰살뜰 살림을 모은 덕분에 외조부는 오래지 않아 상당한 자작농이 되었고 소작을 줄 정도가 되었다.

안강들이 넓고 넓지만 대부분의 농민이 소작이었다. 그러니 소작 얻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얻었다 해도 지주에게 잘못 보이면 그 다음 해는 소작을 떼이기 일쑤였다. 지주 앞에서 소작농은 가렵지도 않은 뒤통수를 수시로 긁적이며, 겸연쩍은 얼굴로 혀 굳은 소리를 여러 번 하고서도 지주의 자비가 있어야 얻을 수 있었다. 떠듬거리는 그 말 꺼내기까지는 수 십 번 지주의 얼굴을 대하고서도 망설였고, 면전에서는 수 백 번 웃음을 흘려야했으며, 밤잠 설쳐가며 말 다듬기 몇 날 며칠이었을 것이다. 소작농에 있어서 지주는 그야말로 주님(, lord)이었다.

다음은 우리 아버지 이야기다. 우리 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고향 신당에서 농토가 넓은 처가 곳 안강으로 이사를 했다. 소작을 다른 사람보다 쉽게 얻을 수 있다는 그 비교적 우위 하나 믿고 온 것이다. 외조부는 자기의 사위에게 자신이 지난 날 하던 것처럼 살아갈 것을 바랐다. 그러나 6.25전쟁 통에 제대가 안 되어 군대 생활을 7년이나 하고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우리 아버지로서는 무리였다.

자작농지는 유산으로 타고 난 말반지기, 300평 한 도가리(배미)가 전부였다. 거기 나는 소출로는 자식 다섯, 일곱 식구가 살아가기에는 절대 부족했다. 오직 의지하는 것은 자신의 노동력뿐이었다. 해 뜨기 전에 들로 나가서 해 지고 나서 집으로 들어 와도 남는 것은 빚이었다. 농촌에서 돈 나올 구멍은 5일장에 달걀 몇 개 갖다 파는 게 전부였다. 여름 보리 탈곡 가을 벼 탈곡해서 정미소에 보리쌀과 쌀을 갖다 내면 모처럼 큰돈을 장만하나 곧바로 농사 빚 갚고 다음 농사 준비하는데 다 들어갔기 때문이다.

소작료는 5할이었다. 여기서 5할은 탈곡했을 때 곡수의 반을 뜻한다. 그 때까지 든 노동력, 거름, 비료 값, 농약 값, 놉들였을 때 품삯 등 농비 일체는 소작농 몫이었다. 중국에서 성실하게 세어 보고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쌀 미 자()는 쌀이 만들어지기까지 농부의 손이 여든여덟 번 간다는 뜻으로 만들었다하지 않는가. 그 정성은 오롯이 소작농 몫이었다.

도저히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굴형, 부모님은 짓누르는 가난이라는 바위를 운명처럼 꾸역꾸역 고린도의 높은 산 위로 밀어 올리는 시지프스였다.

외조부의 지난 날 삶처럼 우리 가족에게 절약은 옷처럼 익숙했다. 아버지는 돈이 생겼다하여 결코 돈을 허투루 쓰지 않았다. 반찬도 어쩌다 꽁치나 고등어를 사 오셨는데, 헐한 것을 사다보니 구워놓아도 허물허물했다. 우리가 시장서 사온 반찬은 주로 곰피, 미역귀다리, 마른멸치 정도였다. 파래김도 생일이면 먹을 수 있었는데, 아버지가 가위로 화투장 크기 정도로 잘라 밥을 사 먹기에는 어려워 밥에 얹어 먹어야 했다.

이런 부모님이 면천하듯 가난을 벗어던진 계기는 뜻밖에 내가 공무원시험에 합격함으로 출발했다. 나는 집안 형편을 뻔히 알기에 용돈만 남기고 월급 전부를 아버지께 드렸다. 이 돈은 부모님께 가뭄에 단비였을 것이다. 그 동안 빌린 농비를 갚고, 밀린 품삯을 지불하고, 나머지는 내년 농사를 위해 남겨 놓았을 것이다. 차츰 더 이상 아버지는 돈을 꾸러 가지 않아도 되었고 빌려주는 처지가 되었을 것이다. 처음으로 이자를 받을 때 기분은 묘했을 것이다.

그 동안 모은 돈으로 논도 사게 되어 아버지는 더 이상 소작농을 안 해도 됐다. 그러나 세월은 그 기쁨을 오래 누리지 못했다. 젊을 때 일하다 다친 다리가 연세가 들수록 고통으로 다가와 더 이상 농사를 지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부모님을 내가 사는 대구로 모셨다. 아버지는 호미, 괭이, , , 쇠스랑, 고무래, 갈퀴 등 농기구와 쓰다 남은 비료, 바가지, 물뿌리개 등 도구도 모두 이삿짐 트럭에 실었다. 가까운 데 텃밭이라도 장만하여 가꾸겠다는 심사였다. 나 역시 적당한 소일거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에 같이 챙겼다.

아버지는 비록 농사일은 그만두지만 내 죽기 전에는 논을 하나도 팔지 말라명을 내렸다. 나는 동네 먼 친척뻘 아재에게 부쳐 달라 부탁해야 했다. 불과 한 세대 만에 지주가 사정하고 소작농이 상전인 세상이 된 것이다. 소작료도 지주 몫은 2할에 불과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버지 평생에 이런 세상이 올 줄 꿈에나 생각이나 했을까?

아버지로서는 흙은 먼지덩어리가 아니라 생명의 근원이었다. 먼지가 흩날리는 것은 겨울아침 하얗게 뿜어져 나오는 입김처럼 살아있음의 표시였다. 그리고 논은 삶의 터전이자 어쩌면 삶 자체였다. 생각해보면 어디 아버지뿐이랴 우리 모두 언젠가는 흙으로 돌아갈 존재가 아닌가.




상추의 사춘기

 

 

 

   나와 아내는 올해 비로소 작은 꿈 하나를 이뤘다. 비록 내 땅은 아니지만 구청에서 분양하는 텃밭을 배정 받아 평소에 그리던 도시농부가 된 것이다. 이는 우리의 즐거움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고향 청송에서 오래도록 농사를 짓다가 자녀 따라 도회지로 오신 장모님께 다시 흙을 만질 수 있는 기회를 드린다는데 더 큰 의미가 있었다.

   동구청의 텃밭 사업은 시작한 지가 제법 오래인가 본데, 사실 그 동안 별로 관심이 없었다. 관심이 없으니 도로변에 현수막이 걸려 있어도 몰랐던 것이다. 주위 사람들의 말은 듣고 살펴보니 지난해는 아슬아슬하게 신청 기회를 놓쳐 버렸다. 올해, 학수고대하던 현수막이 입춘을 지난 어느 날 드디어 걸렸다. 우리는 재깍 신청했다.

   공짜가 아니었지만, 어차피 희망자 전원에게 줄 수 없다면 얼마만큼의 부담을 갖게 하는 것도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4평정도 한 뙈기에 연 4만 원 자부담이었다.

   다행히 당첨됐다는 통지가 문자로 왔다. 우리 내외는 그때부터 매일 농사 이야기로 꿈에 부풀었다. 우리 내외 역시 고향이 농촌이라 농사에 대한 추억이 많았다. 부모님 일손을 거들던 그때를 생각하며 오랜만에 솜씨 발휘할 기회가 주어졌으니 그럴 수밖에 없을 터였다.

   텃밭으로 나오라는 날에는 다른 일이 있어, 이튿날 나갔더니 우리 밭은 135번 팻말이 붙어 있는 데였다. 제비뽑기로 배정됐다는데 뉘가 잘 뽑아줘서 원두막이 가깝고 물통도 가까워서 퍽 마음에 들었다.

   관리원이 퇴비 2포대를 무료로 주었다. 우리는 지난 날 시골에서 농사 경험이 있는 장모님 지시에 따라 퇴비를 흙에 골고루 섞은 후 이랑을 지었다. 그리고 준비해 간, 상추, 당귀 씨를 뿌렸다. 텃밭머리에는 절기별 농작물 파종시기를 표로 그린 간판이 세워져 있었는데, 이를 보니 상추는 춘분 때가 적기였다. 우리는 328일이니 1주일 여 늦은 셈이었다.

   마침 봄비가 자주 내려 우리는 즐겁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비가 안 올 때면 물을 주고자 주 1회 정도 밭으로 갔다. 싹이 나고, 잎이 커지고, 나날이 자라나는 모습이 마냥 사랑스러웠다. 우리는 때때로 상추 등 여러 가지 모종을 사 가서 심었다. 그러다보니 밭은 상추 외에 가지, 토마토, , 들깨로 농작물 표본실처럼 되었다. 장모님과 우리는 별일 없으면 매주 금요일 오후 들르기로 약속했다.

   511, 금요일, 드디어 처음으로 상추 잎을 뜯었다. 가져 간 비닐 큰 가방에 그득했다. 마침 승용차 트렁크에 있던 슈퍼마켓 비닐봉지가 있어 거기에도 가득 담았다. 씨를 뿌린 것보다 모종으로 심은 것이 늦게 심었음에도 훨씬 크게 자라 있었다. 상추도 그득 기쁨도 가득, 모두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반야월 시장에서 사 간 고추모종을 심었다. 고추를 씨를 뿌리려면 우수 무렵인 2월 중순까지 파종해야하나 모종을 심으면 입하 무렵인 5월 초순까지 가능하다고 했다.

   이날 저녁, 우리는 상추 파티를 했다. 돼지고기를 삶고 쌈장을 새 것으로 사왔다. 갓 지은 밥에 농부의 즐거움을 맘껏 누렸다. 이튿날 아침도 상추쌈으로 하니 다른 반찬이 필요가 없었다.

   우리는 약속대로 매 주 금요일가서 수확하고 물을 주고를 되풀이 했다. 상추는 거의 매 끼 먹었어도 남아서 우리는 여기저기 이웃에게 나눠주는 인심을 베풀었다. ‘의식이 족해야 예절을 안다던 옛날 어른들의 말이 생각났다.

   629, 이날도 금요일이다. 더위를 피해 해가 서산에 걸칠 무렵 텃밭에 들렀다. 차에서 내려, 밭으로 걸어가던 우리는 이제까지 못 보던 풍경에 깜짝 놀라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거의 모든 상추가 껑충 커 있었던 것이다. 눈대중으로 봐도 한 뼘 이상은 자란듯했다. 왜 갑자기 이런 반란을 하는가, 불과 한 주 사이에 과연 그렇게 자랄 수 있는가, 눈을 의심할 정도였다. 다발로 핀 노란 꽃들이 나름 아름다웠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배추흰나비 한 마리가 팔락팔락 날아왔다가 인사만 하고 다른 데로 날아갔다.

   그 동안 가장자리에 있던 몇 포기가 벌쭉하게 커 오른 적은 있었다. 우리는 그 놈을 씨받이로 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일제히 올라올 줄을 몰랐다. 이제까지는 땅에 붙어 있던 잎을 아래로부터 뜯었는데, 이번에는 줄기에 붙은 곁 잎을 뜯어야했다. 장모님은 씨받을 것은 몇 포기로 족하니 나머지는 뽑아내는 게 옳다고 했다. 노란 꽃을 채 피워보지도 못하고 뽑혀져 나가는 상추 줄기들.

   그날 저녁 상추쌈은 맛이 달랐다. 빛깔부터 더 이상 연녹색이 아니라 양배추 겉잎 같기고 하고 키위 같은 짙은 녹색이었고 맛도 쌉싸래했다. 그제야 나는 상추의 반란 이유를 깨달았다. 그들도 사춘기를 맞이한 것이다. 하지를 넘어서면서 그들은 이제나 제제나 그 시점을 노리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온 몸에 호르몬이 돌고 햇볕은 꽃 피우기를 재촉하자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생각한 상추는 잎 색깔이 변하고 줄기는 쭉쭉 자라 오르고, 대궁은 꽃을 일제히 피워 올려 젊음을 터트리고 만 것이다.

천지간, 만물에는 때가 있다. 그들에게는 종족 보전의 사명을 받았음에 틀림없다. 하루살이로부터 200년을 산다는 거북이까지 그들에게는 생애의 절정기가 있을 것이다. 그 시기를 일러 사춘기라 할 것이다. 상추에서 보듯 식물도 그러할 것이다. 사춘기기를 거치면서 성체가 되고, 꽃피고 열매 맺어 후손을 번성케 하고자 최선을 다하고 있다.

   우리 인간도 사춘기를 거치면서 인생의 청춘을 맞이한다. 화사하게 아름다운 시기, 눈부시게 찬란한 광채로 빛나는 한 때를 헛되이 보내서는 안 될 것이다. 때로는 두려움, 고통, 수치감, 갈등, 슬픔, 분노, 혼란, 고독, 좌절, 불안을 동반 할지라도 되돌아보면 청춘은 생애의 꽃봉오리, 하늘이 내려 준 선물이었다.

   장모님은 대궁이 맛이 좋다며 연한 윗부분을 잘라서 많이 갖고 갔다. 아무쪼록 연세 많은 분이 이로 말미암아 새 힘을 얻는 계기가 되기를 바랐다

 


010-2688-5330

cjaey@daum.net





  • profile
    korean 2018.08.31 23:08
    좋은 작품입니다.
    열심히 쓰시면 좋은 결과도 얻으실 수 있습니다.
    건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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