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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흉터 자

 

우리 선영이, 어디 있어요?”

병원에 들어서자마자 쌍문동 이모네에 가셨던 엄마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다급하게 나를 찾으셨다. 그리고 내가 있는 병실에 들어오셔서 붕대가 칭칭 감긴 내 왼쪽 다리를 보시고는 그만 기절해 버리셨다. 그때 내 나이 7살이었다. 기절하신 엄마는 산소통 안에 들어가시고 나서야 정신이 드실 정도로 엄마 인생에 있어 최고로 충격을 많이 받으신 날이 되었다.

내가 7살 되던 해, 전남 나주에 살던 우리 가족은 교육에 관심이 많으셨던 엄마가 아빠를 설득하셔서 서울 구로동에 이사를 오게 되었다. 모두가 가난했던 1980년대 초 우리 가족 또한 단칸방에 5명의 식구가 살아야 했을 정도로 형편이 매우 가난했다. 지금처럼 난방시설이 되어 있지 않아 집집마다 연탄을 때지 않는 집이 없을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은 수도꼭지만 틀면 뜨거운 물이 콸콸 나오지만 그때는 겨울이면 항상 드럼통 같이 큰 파란색 플라스틱 통에 차가운 물을 데워서 그 물로 세수도 목욕도 했다.

그 날은 내 평생 잊을 수 없는 날이 되어 버렸다. 엄마가 쌍문동에 사시는 둘째 이모를 만나러 가신다고 막내 동생만을 데리고 나와 연년생 동생만 집에 남겨 두고 가신 날이었다. 항상 우리 3자매를 보살피시느라 외출 한 번 안 하시던 엄마였는데 그 날은 무슨 일인지 둘째 이모를 만나야겠다고 하시고 집 밖에 나가지 말고 동생 잘 보고 있으라는 신신당부를 하시고선 집을 나가셨다. 나도 평소에는 엄마 말씀을 잘 듣는 편이었는데 그날따라 친구네 집에 놀러가고 싶은 마음이 생겨 친구네 집에 동생과 함께 놀러 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것이 화근이었다.

친구네 집에서 재미있게 놀다가 집 안이 답답해서였는지 무슨 이유였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데 밖에서 놀자는 말에 후다닥 미닫이문을 열고 나가다가 친구가 내 등을 미는 바람에 뜨거운 물이 가득 차 있는 드럼통 같은 플라스틱 통에 내 다리가 빠지고 말았다. 급하게 다리를 뺐지만 내 다리는 이미 건드릴 수 없을 정도로 뜨거운 김이 차가운 공기와 만나 안개꽃처럼 피어나고 있었다. 누가 불렀는지 모르는데 옆집, 앞집, 뒷집에 계시는 어른들이 모두 몰려 오셔서 저마다의 화상 치료방법을 이야기하시더니 어떤 아저씨가 소주가 화상에 직빵이라며 소주를 가져와 내 왼쪽 다리에 들이부으셨다. 지금이야 인터넷이 발달해서 화상 치료방법이라고 검색하면 최소한 소주를 화상 당한 부위에 부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텐데, 그때는 그런 방법이 없이 민간요법이라고 전해 내려오는 치료방법밖에는 없어서 잘못된 민간요법인 소주를 붓는 일이 허다했었다. 나는 그때 청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그 위에 소주를 부으니 더 화끈거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러더니 어떤 아줌마가 청바지를 그냥 위에서 아래로 베끼셨다. 정말 하지 말아야할 응급처치 방법을 모두 당한 셈이었다. 소주를 부은 아저씨와 청바지를 그냥 베끼신 아줌마 모두 어린 내가 걱정되는 마음에 하신 행동이겠지만 나에게 엄청난 아픔을 안겨주신 행동이었다. 잘못된 응급 처치 지식이 커다란 상처를 가져다줄 수도 있다는 것을 크게 깨닫게 한 사건이었다. 청바지를 그냥 베끼니 피가 콸콸 쏟아져 내렸다. 그 피를 보고 어린 나는 놀라 정신을 잃었다. 만약 지금 그런 화상을 당했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청바지를 그냥 베끼지는 않을 것이다. 대신 청바지를 가위로 잘라서 화상 당한 다리와 청바지를 분리시켜 놓을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보니 나는 고대 구로병원 응급실에 누워 있었고, 나의 왼쪽다리는 붕대로 칭칭 감겨 있었다. 그리고 쌍문동 이모네에 계시다가 날벼락 같은 내 소식을 들은 엄마가 헐레벌떡 병원으로 뛰어와 내 왼쪽 다리를 보고 놀라 엄마마저 쓰러지시게 되었다. 병원에서 화상치료를 받고 있다가 병원비를 감당하기 어려운 우리 집은 화상 당한 왼쪽 다리 때문에 잘 걷지도 못하는 나를 퇴원시켰다. 엄청난 빚을 지고 퇴원해서 아빠는 그 빚을 갚기 위해 밤낮으로 일을 하셔야 하셨고, 어려운 형편에 엄마가 하시던 액세서리 부업도 그만두고 우리 엄마는 내 병간호를 하셔야 했다. 우리 가족에게는 가장 힘든 이 시기가 지나고 보니 우리 가족이 서로를 가장 사랑하며 살았던 시기였었다.

화상 치료는 전혀 전문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교회를 다녔던 엄마 덕에 교회 전도사님들께서 가져다주시는 화상 연고가 나의 화상 치료의 전부였다. 화상 당한 부위 중 가장 심했던 부분은 발목 부분이었는데 그 부분에 화상 연고를 바를 때면 정말 상상도 못할 정도의 고통을 참아내야 했다. 어린 나는 연고를 바를 때마다 우시는 엄마가 속으로 안쓰러웠는지 아픈 내색도 안 하고 그 고통을 다 참아 내었다. 왼쪽 발가락은 상처가 너무 심해서 발가락뼈가 보일 정도로 그 형태를 찾기 어려웠다. 발가락이 서로 붙어 발가락의 구분이 없어질까봐 엄마는 발가락을 치료할 때마다 가장 신경을 많이 쓰시곤 하셨다. 그래서 다행히도 내 왼쪽 발가락은 지금도 다섯 발가락이다. 화상 치료를 꾸준히 하는데도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내 왼쪽 다리 때문에 엄마는 많이 걱정이 되셨는지 나를 새벽마다 업어서 구로중앙교회(지금은 베다니교회) 새벽기도회에 데리고 가셨다. 새벽에 잠이 채 깨지 않아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는 나는 얼굴에 떨어지는 엄마의 눈물에 잠을 깨곤 하였다. 엄마 자신이 자식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해 어린 내가 이런 고통을 당하는 것 같은 죄책감에 기도하시며 하염없이 흘리셨던 눈물을 나는 아직까지도 잊지 못한다. 그것은 아마도 엄마의 사랑이었던 것 같다.

새벽에는 새벽기도회에 가서 기도를 하고 오후에는 전도사님께서 오셔서 엄마와 함께 화상치료를 하였는데 밤에는 아픈 내가 다리라도 제대로 펴고 자도록 하기 위해 엄마와 아빠는 그 단칸방 구석에 앉아 주무시곤 하셨다. 계속 치료는 하였지만 나는 화상 당한 왼쪽 다리 때문에 걸을 수 없었다.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을 때에도 이 다리로는 평생 걷지 못하고 휠체어에 앉아 지내야할지 모른다고 의사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엄마는 눈물을 훔치셨다.

추운 겨울이 지나고 내 나이가 8살이 되던 해, 국민학교에 입학할 때쯤이었다. 구령대 앞에 내 또래 아이들은 올망졸망 줄을 서서 서 있었는데 왼쪽 다리 때문에 서 있지 못하는 나는 구령대 옆 계단에 앉아 입학식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후로도 혼자 걸을 수 없는 나를 엄마가 업어서 등교를 시키시고, 학교가 파할 때쯤에 시간을 맞춰서 엄마가 업어서 집에 데려가곤 하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의 헌신적인 사랑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고 장영희 교수님의 괜찮아라는 글을 보면 어머니의 헌신과 희생이 잘 드러나 있는데 그 수필을 학생들에게 교단에서 가르칠 때마다 우리 엄마가 떠오르곤 한다.

그렇게 아픈 왼쪽 다리와 함께 지내던 어느 날, 나는 기적적으로 걸을 수 있게 되었다. 평생 걸을 수 없을 거라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날들을 뒤로 하고 나는 땅에 왼쪽 발을 딛고 걷고 있었다. 내가 걸을 수 있게 되던 날 엄마가 나의 왼쪽 다리를 붙들고 펑펑 우셨던 것을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다. 비록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내 왼쪽 다리에는 화상 흉터가 남아 그날 있었던 일들을 떠오르게 하지만 그 흉터는 가족들의 사랑과 엄마의 나를 향한 헌신적인 사랑을 생각나게 하는 흉터가 되었다. 비록 엄마는 어린 나를 안전하게 지키지는 못하셨지만 엄마의 거룩한 사랑으로 끔직했던 사고를 까맣게 잊게 하였고 사랑의 흉터 자국을 남겨 주셨다.

 

 

 

 

 

 

굴비와 미역국

 

, 엄마. 생선 비린내 나잖아. 굴비 좀 그만 구우면 안 돼?”

어김없이 그 날도 저희 집 둘째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집안 전체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습니다. 이에 질세라 막내도 둘째와 함께 엄마에게 투정을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엄마는 왜 큰 언니가 좋아하는 굴비만 굽는 거야? 우리 가족 중에 아무도 굴비 먹지도 않는데. 한 사람 때문에 온 가족이 피해를 보잖아. 난 정말 싫어.”

이런 동생들의 투정에도 엄마는 아랑곳하지 않고 매일 식사시간마다 굴비를 맛있게 구워 식탁 위에 올려놓곤 하셨습니다. 저는 그때 수능을 앞두고 있는 고3 수험생이었거든요.

엄마는 25녀 중 셋째이셨습니다. 위로는 2명의 언니가 있고 아래로는 2명의 남동생과 2명의 여동생이 있었습니다. 엄마의 아버지, 그러니까 저의 외할아버지께서는 아들을 무척 바라던 분이셔서 딸 둘을 낳은 상황에서 또 태어난 엄마가 딸이라는 것을 아시고 엄마를 갖다가 버리라고까지 하셨습니다. 이런 설움을 당하면서도 엄마는 무엇이든지 열심히 하고 외할머니 옆에서 집안일도 돕는 착한 딸이셨습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는 항상 반에서 1등을 놓치지 않으셨고 특히, 미술에 소질이 있어 그림 그리기 대회에서 대상을 받으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셨습니다. 가난한 집안 형편에 자식들 모두 가르치지 못한다는 생각에 외할아버지께서는 여자들은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여기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엄마는 한이 생기셨습니다. 공부를 하고 싶으셨는데도 못 했던 한이었습니다.

엄마는 결혼하신 후 3명의 딸을 낳았습니다. 외할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보수적인 생각을 가지고 계셨던 저희 아빠는 아들을 못 낳은 엄마를 매우 못마땅해 하셨습니다. 물론 저희 할아버지, 할머니께서도 저희가 태어난 것을 그렇게 반가워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엄마는 저를 낳으시고 산후조리를 위한 미역국 한 그릇도 못 얻어 드셨다고 합니다. 그래도 엄마는 딸 셋을 잘 키워주셨습니다. 특별히 어렸을 때부터 공부를 잘 했던 저를 기특하게 보셨습니다. 저는 엄마의 희망이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학교에서 교과우수상이나 대회에 나가 상장을 받아 오는 날이면 엄마는 그런 제가 자랑스러워 여기 저기 전화를 해서 자랑하시곤 하셨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래서 가족 중에 저밖에 좋아하지 않는 굴비를 매일 식사시간마다 해 주셨는데 전혀 힘들어 하지 않으시고 매우 즐거워하시며 굴비를 구워 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엄마의 이런 든든한 지원을 받아 저는 사범대학에 합격하였고, 그 어렵다던 임용고시도 합격하여 지금은 인천에 있는 한 중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었습니다. 엄마의 이런 헌신적인 희생이 없었다면 저는 아마 취업이 어려운 이 사회에서 낙오자가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201527일에 결혼식을 올리고 지금의 남편과 결혼하였습니다. 결혼한 후 제가 살고 있는 신혼집에 시댁 식구들을 집들이에 초대하던 날이었습니다. 공부한다고 엄마가 집에서 어떤 음식도 요리해 보라고 하신 적이 없었기에 제가 할 줄 아는 요리는 창피하게도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친정 엄마밖에 없다는 생각에 무작정 엄마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순간 저는 제가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결혼한 것이 모두 엄마의 탓인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짜증 섞인 목소리로 엄마에게 화를 내고 말았습니다.

여보세요. 엄마. 엄마는 도대체 나한테 왜 요리하는 것도 안 가르쳐주고 결혼시켰어. 엄마 때문에 다 망했잖아. 시댁 식구들 온다는데 나 혼자 어떻게 해. 나 이렇게 키워서 결혼 시킨 엄마 잘못이니까 엄마가 와서 집들이 음식 다 해죠.”

선영아, 엄마가 집들이 음식 해주고 싶은데 몸이 아파서 못 갈 것 같아. 둘째라도 보낼 테니까 같이 집들이 음식 잘 하렴.”

뭐야. 딸이 시댁식구들 집들이 와서 집들이 음식 좀 해달라고 하는데 엄마는 아프다고 못 해준다는 거야? 다른 엄마들은 딸 일이 먼저인데 엄마는 엄마밖에 모르는 거야? 다 필요없어 둘째도 오지 말라고 해. 내가 다 알아서 할 거야.”

그때는 왜 그랬는지 정말 철없는 말과 행동을 하였습니다. 엄마가 저를 어떻게 키우셨는지도 다 알고 있었는데 집들이 음식을 못 해주신다는 것 하나만으로 그렇게 엄마의 마음에 대못을 박았습니다. 나중에 둘째 동생에게 엄마가 추운 날씨 때문에 몸살감기에 걸리셔서 며칠 동안 꼼짝도 못하시고 누워만 계셨다는 것을 듣고 엄마께 죄송하다고 전화를 드리려고 했지만 결혼 초기에 이것저것 바쁘게 지내다 보니 제대로 저의 마음을 전하지 못하였습니다.

어느 정도 신혼집이 정리되고 한숨 돌리고 있을 때 그제야 저의 친정 식구들이 생각났습니다. . 저는 정말 저밖에 모르는 못난 딸이었던 것입니다. 집들이에 초대한다는 저의 전화를 받으신 엄마는 딸자식의 목소리만으로도 반가우셨는지 저의 안부를 먼저 물으시며 어디 아픈 곳은 없냐고 결혼 생활이 힘들지는 않으냐고 걱정부터 해 주셨습니다. 제가 화냈던 것은 엄마의 기억 속에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엄마의 그런 모습에 오히려 죄스러움이 더 생겼습니다. 결혼을 하고 나서 남편과의 의견 차이 때문에 자주 다투곤 하였는데 그때마다 엄마도 이렇게 힘들게 결혼 생활을 하셨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엄마께라도 하소연하고 싶었지만 제가 엄마께 했던 말과 행동으로 인해 전화도 못 드리곤 했기 때문입니다.

엄마께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을 어떻게 전할까 하는 마음에 예전에 엄마가 저를 낳고 나서 미역국 한 그릇도 못 드셨다는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집들이에 오실 엄마를 위해 저는 미역국을 끓여 드리기로 마음을 정했습니다. 태어나서 한 번도 미역국을 끓여본 적이 없는 저는 인터넷으로 미역국을 맛있게 끓이는 레시피를 찾았고, 요리를 잘 하는 남편의 도움을 받아 집들이 당일 소고기 미역국을 끓여 엄마께 드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저희 집 식구들은 미역국을 해서 가져오는 저의 모습에 모두 깜짝 놀라며 다소 장난스러운 말투로 정말 제가 한 것이냐며 여러 번 확인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엄마는 그 미역국을 한참 동안 보시더니 이내 눈에 눈물이 맺히셨고, 결국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우리 선영이가 이렇게 맛있는 미역국을 끓여서 엄마한테 주다니 엄마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구나.”

엄마의 그 말에는 지금까지 엄마가 힘들게 살아오면서 겪었던 어려움을 극복한 자신이 큰 보상이라도 받은 것 같다는 엄마의 한이 담겨 있었다. 그 말을 듣고 나도 내 동생들도 엄마를 안고 울어버렸다. 한참 동안이나. 그런 엄마를 위로해 주고 싶어서. 오늘은 엄마에게 전화를 해서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엄마, 나 이렇게 키워줘서 정말 고마워. 그리고 엄마를 세상 그 누구보다 많이 사랑해. 아프지 말고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자.”


  • profile
    korean 2018.04.30 22:13
    좋은 작품입니다.
    열심히 쓰시면 좋은 결과도 얻으실 수 있습니다.
    건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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