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차 공모전 응모작: 이혼 보고서 2 (행복한 가정을 위하여)

by 적극적방관자 posted Dec 1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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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의 연()이란 전생의 원수가 현세에 만나 서로의 죗값을 갚기 위해 맺어진 것이라는 말이 있다. 해서 그 죗값만큼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고 그 전생의 악연을 상쇄하기 위해서는 그 고통을 감내하면서 서로에게 잘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종교라고 다르겠는가 만 특별히 불가(佛家)에서는 억겁(億劫)이라는 감히 상상이 되지 않는 세월을 끌어다 대면서까지 그 연의 깊음을 강조하며 배우자에게 잘 할 것을 권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글쎄, 다 그렇다곤 할 수 없지만 사소한 갈등 정도로도 부부가 쉽게 갈라서는 요즘 세태를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도 않는데, 그 백인백색 파경의 이유 중엔 높아진 우먼파워가 당당히 한몫을 하고 있지 않나 싶다. 요컨대 실체 없는 돈의 힘이 마초들의 원시적 힘을 밀어 내는 고도문명의 사회가 되면서 그것(돈의 힘)의 창출에 일정부분 기여한 여인들의 위상이 높아져, 남편에게 어지간한 잘못이 있어도 팔자려니 여기거나 자식을 위한 희생으로 참고 살던 우리 어머니들 전래의 가치를 마치 구시대의 유물쯤으로 여기고 과감히 다른 인생을 계획하는 당찬 여인들이 많아진 상황 말이다.

한 세대 전, 바로 우리의 어머니세대만 하더라도 남편의 가부장적 권위가 살아있어 성실한 가장은 말할 것 없고, 술에 도박에 아내를 사흘거리로 두들겨대는 파락호여도 남편은 그 타이틀만으로도 당당했고 아내는 그 온갖 수모에 시앗을 보는 모멸까지 더해져도 자식들 앞날에 걸림돌이 될까 그저 꾹 참고 살던 세월이 있었다.

 

이십 년 전, 60수를 채우지 못하고 돌아가신 내 어머님도 바로 그런 세월을 사셨다. 부친은 술, 도박, 폭력과는 무관했지만 유감스럽게도 여자문제로 어머님을 괴롭혔다. 바람이랄 것 조차 못 되는 단 한번의 외도를 냉정하지 못한 성정의 부친이 정리하지 못하고 수년의 세월을 끌어왔던 것인데 당시 혈기 방장한 고등학생이던 나의 헤어지라는 권고를 물리치고 일생 속에 병을 키우며 사신 어머님의 명분도 아직 어린 두 딸을 포함한 4남매 자식들의 앞날에 대한 걱정이었다.

나의 어머님을 비롯한 많은 어머니들이 이 헌신 속에 당신들의 권리를, 자존심을 녹이고 그림자처럼 살았다. 그들의 인생역정만 보면 부부가 전생악연의 연장이고 그 상쇄를 위해 배우자에게 잘해야 한다는 말은 설득력이 다분해 보인다. 또 이런 경우, 드물게 아내의 헌신에 파락호 남편이 개과천선해 말년을 서로 위하며 사는 예도 없지는 않은데 이 케이스면 과정이야 어쨌든지 후한 인심으로 전제한 말의 완성으로 보아 줄 수도 있겠다. 물론 선남선녀로 만나 일생을 모범적으로 사는 부부들도 적지 않을 터, 이들과 앞서 예를 든 깨진 그릇 땜빵한 부부들을 같은 반열로 묶는다는 건 다소 억지일 수도 있겠지만.

 

그런데 정작 문제는 대다수의 남편들이 이런 땜빵의 기회조차 갖지 못하고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다는 데에 있지 않을까 싶다. 유감스럽게 나의 부친도 이런 기회를 활용하지 못한 채 아내를 떠나 보낸 케이스였다.

당신의 고통을 속으로 삭이면서 어머님은 두 아들에게 신신당부를 하셨다. “너희들은 부디 아내에게 이런 고통을 주지 마라. 어머님의 절절한 당부를 나는 물론이고 두 살 위의 형도 무겁게 받아들였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35년 세월을 오직 교직 한 길을 가면서 별다른 잡음 없이 건실한 가정을 꾸려가는 형을 보면 말이다. 나 역시 그런 마음가짐으로 결혼에 임했다. 돈 버는 재주 없어 손에 물 안 묻히고 살게는 못해도 그 물 묻은 손으로 눈물을 훔치게는 하지 않겠다고….

 

어머님의 여성상을 모든 여인들의 보편성으로 생각할 만큼 당시의 나는 어리석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아내 입장에서도 천성이 우유부단하고 게으른 내가 별로 마음에 들진 않았던 모양이다. 단지 체질적으로 술 한 모금 입에 대지 않는다는 점이 남편들의 주사로 극심한 고통을 받던 두 처형의 마음을 움직여서 결혼에 이르게는 되었지만, 남자로서 술 한 잔 못한다는 건 애주가인 아내에게는 또 다른 불만은 될지언정 앞서의 단점을 상쇄할 전가의 보도가 될 순 없었다.

이렇듯 너무도 다른 취향으로 우리의 악연은 잉태되고 있었지만 별로 명민하지 못한 나는 당시엔 그걸 몰랐다. 가소롭게도 내 안의 알량한 사랑으로 무언지 모를 그녀의 아픔을 감싸줄 수 있으리라 여겼다.

환상이 깨지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진 않았다. 결혼 전에도 나를 미더워하지 않던 아내는 결혼을 하고 나서도 온전한 내편이 되어 주지 못했다. 우여곡절 끝에 가정이란 게 꾸려지고 딸 아이가 태어났을 때 나 역시 여느 남자들처럼 가장으로서의 각오를 새롭게 했었다.

섣부른 사업 실패 후 택시 핸들을 잡으면서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희망을 추스르던 나와는 달리 아내는 시집살이가 다소 불편했던 모양이다. 시앗에게 남편을 뺏기고 보험아줌마로 생활전선에 뛰어든 어머님이나 여동생이 매운 시집살이를 시킨 것도 아닌데 무언가를 불안해 하고 사소한 갈등에도 술을 마셔댔다. 결혼 3년 차가 되면서 아내는 친정 오빠와 언니를 따라 아르헨티나 이민을 결심하고 나를 움직이고자 거짓조건을 제시했다. 그 거짓말에 넘어간 나는 이민 이듬해에 돌아가신 어머님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불효를 포함해 20년 넘게 부모형제와 생이별을 하고 있었다. 자식이나 오라비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건 물론이고.

 

저의 불효나 사람구실 못함을 남 탓으로 돌리는 건 참 비겁한 짓이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기회의 땅이었으며 적지 않은 동포들이 그 기회를 잘 활용해 안정적인 생활기반 마련에 성공하고 있었다. 아내의 의도 역시 그 도약의 기회를 잡기 위함이었을 테지만 유감스럽게도 나의 역량이 그걸 따라가지 못한 것이었으리라. 그나마 이런 깨달음도 한참이 지난 뒤의 일이고 당시엔 속은 것에 대한 앵한 마음만 좁은 속을 채우고 있지 않았나 싶다. 모름지기 이 세월 속에서 나에 대한 아내의 실망감도 그 크기를 더해 갔으리라.

열심히 살던 세월이 아주 없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이민의 삶이란 그리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았다. 틈만 나면 돌아앉는 세상을 끌어안고 가기에 나의 노력이 턱없이 부족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우리 부부의 노골화된 악연은 이런 일련의 해소되지 못한 반목들이 지지부진한 경제형편과 맞물리고 세월에 따라 그 더께를 더한 결과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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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공항에서의 대기시간은 채 3시간을 넘지 않았지만 꽤나 지루하게 느껴졌다. 이제 여기서 타는 비행기로 21년 만의 나 홀로 귀국이 정점을 찍는 것이다. 이전의 경유지와 달리 대합실엔 가족단위로 여름휴가를 즐기고 돌아가는 내 나라 사람들이 태반을 넘어 보였다.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있는 나와 달리 그들의 옷차림이나 행동에는 마치 이웃집 나들이라도 나온 듯한 여유와 자연스러움이 배어 있었는데 그것이 또 초라한 낙오자에겐 반가움보다 이질감으로 다가왔다. 하긴 해외여행을 동네 마실쯤으로 여기는 그들과 쉰이 넘은 나이에 모든 걸 잃고 불투명한 귀국길을 택한 아웃사이더에게 DNA의 동질성이 남아 있다면 그게 되레 이상한 일이었겠다. ! 그때 그대로 시간이 멈춰주기를 얼마나 갈망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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