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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나타운

 

백성현

인천에서 수년간 살아왔던 나였지만 차이나타운에 가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차이나타운 이라고 하면 나에게 있어서 그저 화교들이 만든 중국집이 즐비한 거리에 불과했다. “차이나 타운?” 처음 차이나타운에 가자라는 말을 들었을 때 다소 당황했었다. 한국 사람이 차이나타운에 가보고 싶다라고 말했더라면 나는 금방 그녀의 말을 무시하며 비아냥댈 것 이었겠지만 그 대상이 안카였기 때문에 그랬기에 이내 나는 수긍했다.

그래, 1번 출구에서 만나.”

 

우리 집에서 차이나타운까지의 거리는 지하철 어플로 약 1시간이었다. 그 사이 나는 버스를 30분 타고 다시 지하철로 20분 갈아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지만 안카에게는 무척 가깝다고 웃으며 말했다. 안카를 처음 만난 곳은 대학교 원어 수업시간이었다. 나는 어떻게든 졸업하기 위해 학점을 꾸역꾸역 눌러 담은 대학교 4학년 영문과 학생이었고, 그녀는 한국에 교환학생을 온 루마니아 학생이었다. 강좌 명은 <현대의 미국 시> 뭐 이런 비슷한 이름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정확히는 이도 오래되어 생각나지 않는다. 한 가지 분명하게 기억나는 것은 내가 그 시기에 학교에 나가는 것 자체에 굉장히 많은 불만이 있었으며, 이번에 졸업을 한다 해도 나는 별 볼일 없어질 거라는 것을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던 시기였다는 것이다. 졸업하기 위해서 꼭 필요했던 학점을 수거한다는 생각으로 나갔던 수업 첫날이었기에 당연히 수업에 대한 열의나 기대는 전혀 없었다. 게다가 지금 이 수업이 끝나면 막상 어떻게 무엇을 먹고 살아야 하는 가라는 실질적인 문제를 당면한 나에게 <현대의 미국 시> 같은 수업은 강좌 명만으로도 짜증이 나는 수업이었다. 그런 수업에 심지어 한 번의 개인 발표와 한 번의 조별 발표가 있다는 사실을 늙은 교수가 점잖게 알려줬을 때 나는 당장이라도 수업을 이번학기에서 빼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었다. 하아- 긴 한숨을 쉬고 고개를 들었을 때 낯선 외모의 외국인이 내 앞에 서서 말했다. “Do you want to join my team?”

 

버스를 타고 30분 정도 고속도로를 달려서 송내역에 내렸을 때 안카는 조금 늦는다는 문자가 왔다. 나는 괜찮다- 라고 답장하고 차이나차운 역으로 향하는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항상 지하철을 타면 서울 방면으로 가는 쪽으로만 탔었기 때문에 반대방향의 풍경은 내게 생경했다.

차이나타운 역에 내리자 간의 통로가 눈에 띄었다. 길게 합판으로 이어진 길을 걷다보니 인천, 차이나타운 역 1번 출구가 보였다. 그리고 그 곳에 차이나타운 보다 더 낯선 외모의 안카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안카를 포함해 우리 조에는 고 학번 남학생과 여학생들이 다섯 명 있었다. 원어로 이루어진 수업에서는 토론을 할 때에도 영어로 대화를 해야 했다. 그런데 안카를 제외한 나머지 4명은 모두가 비슷한 표정으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머리가 하얗게 샌 늙은 교수님은 아주 점잖은 목소리로 외국인 친구가 있는 조이니까 그 친구를 잘 챙겨주길 부탁한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교수님의 그 당부가 나를 향한 것임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음 번 수업 조모임 때 나를 제외한 3명은 그 수업에 나오지 않았다.

 

안카는 오랜만에도 똑같은 모습이었다. 잘 있었냐는 나의 물음에 그녀는 잘 있었다 라고 덤덤히 대답했다. 우리는 그저 다른 사람들이 많이들 걷는 방향으로 크게 차이나타운 이라고 써있는 문 안으로 걸어갔다. 안카는 언제나처럼 말이 없었다. 주말이어서 그랬는지 차이나타운에는 가족단위의 사람뿐만 아니라 연인들로 붐볐다. 그리고 처음가본 차이나타운 거리는 예전에 어디에선가 본 적이라도 있는 듯이 예상했던 모습 그대로 양 쪽으로 중국느낌이 물씬 나는 빨간 기와와 등이 달려있는 중식 가게가 쭈욱 이어져 있었다. 나는 안카에게 인터넷 검색에서 읽어 본 글을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실인 듯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내가 맛 집을 검색했어.”라는 말에 안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천천히 영어로 이야기를 하며 거리를 걷자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를 향했다. 안카와 어디를 가면 언제나 이런 시선을 받곤 했었다. 나는 그녀와 동행할 때 금세 익숙해 져야하는 어쩔 수 없는 시선이라는 것을 알았다. 차이나타운은 붉은 색채의 중국음식점들 가게 외에도 거리에서 전병과 공갈빵 등을 파는 상인들이 많았다. 안카는 지나가며 보이는 모든 물건에 눈을 돌렸다. 아직도 의아한 것은 러시아전통 인형인 마트로시카를 차이나타운 여기저기서 팔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안카가 묻자, 나는 별 다른 대답을 찾지 못하고 코리안 스타일이라고 말했다. 이는 사실 아무거나 이국적인 것을 파는거야 라는 의미였다.

 

조에 두 명만이 남게 되자 어쩔 수 없이 안카와 나는 매주 둘이서만 대화를 해야 했다. 주로 수업시간에 다루는 시에 관한 토론 이었는데, 처음에 안카와 대화할 때 두 가지 요소가 나를 힘들게 했는데 첫 번째는 안카가 영어권나라에서 온 사람이 아니었기에 그녀의 영어 발음은 너무도 내게 낯설었다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안카는 살면서 내가 상상하고 만났었던 외국인과는 너무도 다른 성향의 외국인이었다는 것이다. 안카는 루마니아에서 중국문학을 전공하고 한국에 우연한 기회로 교환학생을 온 학생이었고, 서양인이라기보다는 무척 내성적인 동양 같은 성격의 외국인이었다. 조용하고 행동도 무척 조심스러웠으며 말도 언제나 길지 않았다. 내가 그녀를 힘들게 상대하고 있다는 것이 눈에 띄었는지 어느 날 수업 후에 교수님이 나를 따로 불러서 다시 부탁하셨다. “학생이 안카 학생을 데리고 다녀주게나.”라고

 

우리는 한국에서 최초의 중국집이었다는 공화춘에 들어갔다. 시간은 12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고 모든 중국식당 앞에는 길게 줄이 늘어서고 있었다. 메뉴 판을 펼치자 안카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게 물었다. “고기가 많이 들어가 있어?” 아 맞다. “해산물은 먹을 수 있니?” 라고 내가 물었을 때 안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카는 고기를 먹지 않았다. 어떤 신념에 의거한 것인지 무엇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말을 했다. 우리는 가장 무난하게 자장면과 해물짬뽕만을 시켰다. 나머지 음식들은 고기가 들어가지 않은 음식이 거의 없었다. 가게는 정신이 없을 만큼 회전율이 빨랐다. 안카와 나는 천천히 음식을 먹는 편이었기 때문에 주변의 사람들이 몇 번이나 바뀔 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차이나타운은 왜 오고 싶었어?” 라고 내가 묻자 안카는 그냥- 니가 여기 사니까.” 라고 덤덤히 대답했다.

 

안카가 고기를 먹지 못한다는 것을 처음 안 것은 학교 축제기간에 같이 술을 마실 때였다.

학년이 높아질수록 대학교 축제는 그저 시끄럽고 번거로운 기간이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축제로 인해 종종 수업이 휴강되는 일은 4학년에도 예외 없이 일어났다. 안카와 나는 멀뚱히 휴강 공고를 보고는 걸어 나와 주점으로 향했다. 가자고 말했던 것은 나였지만 사실은 어떤 의무감에서 했던 말 이였기에 그녀가 진짜로 따라올 줄을 몰랐었다. 우리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법학과 주점에 풀밭 위 돗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안카 와의 식사도 처음이었지만 술도 처음이어서 그야말로 소개팅에서 처음만난 남녀사이 그 이상으로 어색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보통 대학교 주점의 안주는 뻔했다. 계란말이, 제육볶음, , 과장 등등 나는 안카에게 메뉴를 설명하고 먹고 싶은 것을 물었다. 안카는 전을 먹어보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자신은 고기를 먹지 못하기 때문에 고기 없는 전은 없느냐고 물었다. 우리는 김치전에 막걸리 한 병을 시켰다. “안카 기숙사 친구들 부르자. 나도 내 친구들 부를게.” 나는 전화기를 열어 학교 안에 있는 친한 친구 몇 명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안카는 가만히 전화기만 바라볼 뿐이었다. 이윽고 내 친구들은 나와 안카가 돗자리에 어색하게 앉아있는 모습을 보고는 깔깔 웃어대며 다가왔다. 안카는 내 친구들과 즐겁게 대화에 임해주었고 그 날의 술자리는 둘 일 때보다는 꽤나 흥겨운 분위기로 마무리 되었다. 나중에 친구를 부를 수 없는 사실에 대해 안카는 친한 친구가 없어서 라고 평소처럼 덤덤히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한편으로는 안카가 외국인이어서 내가 너무 많은 편견으로 그녀를 대하고 있다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공화춘의 음식은 자극적이지 않고 순한 맛이었다. 나는 자장면은 중국에는 없는 음식이며 화교들이 정착하며 만든 한국식 중식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안카는 화교라는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했고 그것을 설명하기까지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어쨌든 안카는 공화춘의 음식을 좋아했다. 음식 값은 안카가 냈다. 처음 안카는 한국의 계산문화를 이해하지 못했었는데 어느덧 그녀는 마치 한국에서 오래 살아온 사람처럼 능숙하게 카드를 점원에게 내밀며 점심은 내가 살게 라고 말했다. 우리는 공화춘을 나와 벽화마을 이라고 하는 골목에 있는 카페로 걸어갔다. 12월 이었고 바람이 꽤 차가웠다. 가는 길에 우리는 전병 2개와 공갈빵 6개를 샀다. 사실 나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지만 안카에게 재미를 선물해주고 싶었고 안카는 나의 재미에 작게나마 호응해주었다. 우리는 작은 커피숍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생각보다 커피숍은 무척 단출했는데 테이블이 고작 6개에 아주 작은 커피머신하나만이 있었다. 주인인 아주머니도 커피숍을 오래 해 오신 분 같지 않았다. 차이나타운의 휘황찬란한 외관과는 반대로 너무도 소박한 모습이 낯설게 느껴질 정도였다. 안카와 나는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전병을 조금씩 뜯어먹기 시작했다. “다음 달이면 루마니아로 돌아갈 것 같아.” 안카는 한국에서 유학을 하고 있는 학생이었기에 돌아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 말이 당황스럽게 느껴졌던 이유는 안카가 나를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가까운 친구라고 느끼고 있었구나..라는 느낌이 들게 해줬기 때문이다. 사실 안카의 낯선 발음 때문에 나는 안카가 쓰는 말을 100% 알아듣지는 못했다. 100%는커녕 80%전후로 알아들을 뿐이었다. “, 그래? 아쉽네라고 나는 의례 준비한 듯한 대답을 내 뱉고 어떤 말을 이어나가야 할지 망설이고 있었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한국에 나중에 오면 나를 찾아달라고 해야 할까 그것이 아니면 내가 루마니아에 한번 가보겠다는 지키기 어려운 약속을 해야 하나 이리저리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적절한 말을 찾고 있는 나를 향해서 안카는 말을 이어갔다. “ 부모님이 이혼을 하셔서 법적으로 문제가 생길 것 같아. 막내 동생이 걱정이 되어서 더 이상 유학이 힘들 것 같아.” 안카는 내게 형제가 많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시 수업에서 개인발표는 5분에서 10분 사이로 준비해서 간단히 시에 관해서 풀어 설명하면 되는 정도의 짧은 발표였다. 문제는 내가 그 시를 한 번도 본 적도 없는 중국계 미국인의 시였다는 것이었다. 한국에는 번역조차 제대로 된 적 없는 이 시에 대해서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시의 내용도 낯설 뿐만 아니라 상징하는 바가 무엇인지 와 닿지 않았다. 그날 토론 시간에 나는 안카에게 투덜거렸다. 한국에서 4학년에게 이런 시를 발표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러니 니가 나를 도와줘라 라는 투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내 말에 안카는 큰 두 눈을 깜빡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저녁 메시지에 안카는 잔뜩 시에 대해서 연구한 흔적이 보이는 글을 써서 내게 보냈다. 시는 결혼하는 딸에게 아쉬운 마음을 표현하는 어머니의 마음에 대한 내용이었고 이에 대해 안카는 자신이 형제가 많은데 둘째 동생이 결혼을 한다면 자신 역시 이러한 감정이 들것 같다고 부연설명이 덧붙여져 있었다. 단순히 구글 에서 긁어온 내용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이 들어간 감상문 같은 내용이었다. 나는 그 긴 해설을 받고도 너무도 얼떨떨하여 고마워 안카라고 답장하며 적잖이 당황해 했었다.

 

그때처럼 안카는 나를 적잖이 당황시켰다. 사실 안카의 부모님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었고 나는 안카와 나 사이에는 한국인과 외국인이라는 장벽이외에도 막역한 관계가 아닌 같이 있으면 조금 어색한 관계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에 어떤 말을 이어나갈지 곤란했다. 겨우 생각을 하다 나는 부모님이 많이 안 좋으신 거야?” 라고 되물어 봤을 뿐이었다. 안카는 아버지가 어머니가 사이가 좋지 않아서 헤어지기로 결정하셨는데 아버지는 이혼을 원하지 않아서 자식들이 사실을 증명해야하는 상황에 처했노라고 말했다. 다른 동생들은 괜찮지만 아직 15살인 막내 동생이 이 사실을 잘 받아들일지가 걱정이라고 말하는 그녀의 표정은 너무도 익숙한 내가 아는 누군가의 눈빛 같았다. 다음 달이면 한국에서 떠나서 일단은 루마니아로 가야하는데 돌아가면 다시 한국에 돌아오기가 어려울 것 같다는 말을 하며 다소 아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안카는 한국에서 한국학연구소라는 곳에서 석사학위 과정을 밟고 있었는데 그 기간이 끝나면 다시 루마니아에서 한국학을 이어서 공부할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나는 그 날 처음으로 안카의 집안일에 대해서 천천히 드문드문 들어볼 수 있었는데 내가 본 안카의 얼굴은 낯선 이름의 나라에서 온 외국인의 얼굴이 아니었던 것 같다. 우리는 커피를 다 마시고, 함께 지하철에 올랐다. 차이나타운 역을 나오며 안카는 말했다. 다시 한국에 돌아오면 여기서 다시 만나도 재밌겠다 라고 해가 천천히 지고 있던 시간대 때문이었는지 그 말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어쩐지 마음이 좀 울적했다. 안카는 늘 내가 자신을 만나러 서울에 와주던 것이 고맙게 느껴져서 인천까지 내려왔다고 말했다. 어쩐지 나는 미안하다 못해 죄를 지은 것 같은 마음마저 들었다. 부평을 지나면서 나는 손에 들고 있던 공갈빵을 줄 수 있는 게 별로 없지만 가서 친구들과 먹고 잘 돌아가라는 말과 함께 안카에게 건넸다. 안카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덤덤히 송내역에서 헤어졌다.

 

잘 돌아가. 그래. 라는 말을 건네며 다시는 볼 수 없을 지도 모르는 관계이지만 엄청 구슬프지는 않은 그런 감정 어디쯤에서 포옹을 하고 손을 흔들었다. 문이 닫히기 전에 안카는 나를 향해서 말했다. “사실, 내가 한국에서 영어로 대화하는 사람은 유일하게 너야. 다음에 보면 한국어로 얘기하자.” 그렇게 문이 닫히고 긴 지하철이 내 앞을 지나갈 때까지 나는 자리에서 서 있었다. 왠지 그래야할 것 같은 의무감이 들었다. 내가 안카에게 대했던 것은 항상 어떤 그 의무감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녀는 내 의무감을 더 좋은 쪽으로 해석해줬던 것 같아서 그녀의 말이 내내 마음에 남았다. 고개를 드니 점점 해가 지고 있었고, 다음번에 한국어로 얘기할 날에 대해 생각하며 나는 에스컬레이터로 발을 옮겼다.

 

 

어머니 곁에는 늘 향냄새가 났다.

 

백성현

 

역에 도착하자마자 공기가 서울과는 확연히 달랐다. 오랜만에 마주한 고향은 여전히 공기에 짠 냄새가 났고, 습기가 느껴졌다. 이곳의 공기는 언제나처럼 조금도 변하거나 자라지 않은 것 같았다. 똑같았다. 언제나처럼

 

난 어머니 제사마다 고향에 내려오진 않았다. 큰 오빠의 전화를 받을 때마다 나는 바빠서, 수업이 많아서, 몸이 아파서 그런 식의 평범한 수만 가지 이유를 대다가 더 이상 댈 핑계가 없어질 때쯤이면 한 번씩 제사에 참여했다.

 

엄마는 언제나 제사를 지내던 옛날 여자였다. 우리 집 제삿날이 아닐 경우는 다른 사람의 일도 도와주러 가곤했다. 엄마는 살아있는 우리들의 챙겨할 날들보다 돌아가신 사람들의 챙겨야할 날을 더 중시 여기는 듯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 엄마가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마치 제사를 위해서 사는 사람처럼 느껴졌었다. 그래서인지 엄마의 의복에는 언제나 향 냄새가 났다. 어떤 날에는 소매에서 또 어떤 날에는 치맛자락에서 독하게 또는 연하게 향냄새가 나곤했다. 내가 서울에 있는 대학에 다니면서 집을 떠나고 일 년에 두 번 정도 집에 와서 낮잠을 잘 때도 종종 향냄새를 맡곤 했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엄마 염하는 날 보았던 핏기 없는 엄마 주변에서도 나는 짙은 향냄새를 맡았었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말하진 않았다. 아니 말할 수 없었다.

 

동네의 모래는 서울의 모래와는 알갱이가 달랐다. 더 작고 고왔다. 한걸음 걸음 떼어가며 집으로 걷는 길은 너무도 친숙하지만 너무 멀게 느껴졌다. 엄마는 이곳에 30년 전에 시집을 왔다고 말했었다. 시집 온지 얼마 되지 않아서 시아버지 제사를 지내며 엄마는 이 집의 며느리가 되었다고 했다. 엄마는 앞모습보다는 뒷모습이 더 익숙했다. 부엌에서 나오는 일이 없었고 같이 밥 먹었던 날도 드물었다. 마치 고행을 하는 사람처럼 엄마는 늘 제사를 챙기기에 바빴다.

 

내 키만큼 낮은 담장들이 이어진 동네 입구에 다다랐고, 오래된 옛날식 문이 보였다.

엄마의 그리고 우리 가족의 옛날 집이었다. 나는 엄마에 대한 생각을 안고 문지방을 넘었다. 제사는 단출했다. 새언니는 일하는 사람이었고 엄마 같은 예전사람이 아니었다. 몇 가지 음식과 몇 가지 과일들로 상이 차려졌고 그 중앙에 그렇게 제사를 위해 사는 것 같던 엄마가 있었다. 나와 오빠들은 덤덤했다. 모두가 덤덤한 제사였고, 그렇게 30여분의 제사가 지나갔다. 간단히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마루에 앉아 엄마를 떠올리며 얘기를 하는데 오빠들은 엄마를 그리워하기도 하고 미안해하기도 했다. 오빠들과 내가 서울에 올라가 일터를 잡고 결혼을 했을 때 조차 혼자인 엄마는 이곳에 남았었다. 자주 뵙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웠고 언제나 엄마에게 전화조차 자주 하지 못했었다. 우리는 모두 엄마에게 마음의 짐이 있었다. 우리를 모두 키우고도 엄마는 계속해서 이곳에서 홀로 제사를 지내며 지냈었다. “내년부터는 우리 집에서 제사 지내기로 했어요. 이 집 이제 정리 하려구요큰 언니의 말에 모두들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어느덧 자정이 넘었고 이윽고 다들 방에 들어가 잠을 청하고 나만 마루에 혼자남아서 엄마의 사진을 보고 있었다.


나는 엄마의 사진 가까이에 조금씩 조금씩 다가갔다. 엄마의 사진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생전에 옷가지에서 나던 그 향냄새가 짙게 나는 듯 했다. 한걸음 옮길수록 향은 더 짙게 느껴졌다. 엄마의 얼굴을 바로 앞에서 마주했을 때 엄마는 약간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나도 엄마를 따라 그런 표정을 지었다. 날은 어둡고 귀뚜라미 소리, 개구리 소리가 크게 들리는 깊은 밤이었다.

 

   백성현

010-8752-8229

biny337@naver.com  

 

  • profile
    korean 2016.02.29 01:05
    열심히 정진하시면 좋은 결실을 반드시 걷을 수 있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늘 건필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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