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차 월간문학 한국인 콘테스트 응모 -전장(戰場)에 핀 꽃

by 쓰레빠신어 posted Nov 15, 2017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타는 듯한 태양 빛이 내리쬐는, 금방이라도 철모가 녹아내릴 것 같은 그 날은 무척이나 더웠다. 군복 속에는 이미 땀이 한가득 차 있었고 낙동강에서부터 신고 온 군화는 깔창과 밑창이 다 헤져있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기억이 없다. 무엇인가에 홀린 듯 전우를 따라 왔을 뿐이다. 배가 너무 고프다. 아침에 먹은 생감자 하나가 전부다. 먹고 싶은 것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은 나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저 하루하루 버티며 이날이 끝나기만을 바랄 뿐이다. 이제는 과거가 되어버린 포천에서의 행복한 시절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다.

   내가 살던 그곳은 봄이면 송아지를 데려다 풀을 뜯게 하고, 여름이면 개울가에 나가 물장구치며 피라미를 잡고, 가을이면 낫으로 벼를 수확하고, 겨울이면 저수지에 얼어 있는 얼음판 위에서 썰매를 타던 포천이다. 친구들과 재미있게 놀던 그곳은 나의 할아버지가 정착해서 삶의 터전을 가꾼 곳이다. 가진 것 없이 일제 치하의 고통 속에 소작농으로 생계를 유지한 분이 노력 끝에 마련한 터전이다. 그곳에서 아버지가 태어나고 나도 태어났다. 아버지께서는 할아버지의 가업을 물려받아 농사일을 하셨다. 워낙 부지런하고 성격이 강직해서 한 번 목표로 정한 것을 달성하기 전까지 도중에 포기하는 법을 모르시는 분이었다. 자존심도 강해 할아버지처럼 소작농으로 살아가는 것을 싫어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자기 가족을 위해 반드시 논 한 마지 정도는 마련할 계획으로 일했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겪은 소작농에서 벗어나 자신의 논에서 마음껏 농사일 하며 자식을 키울 행복을 꿈꾸며 사셨다. 그러한 아버지의 곁에 내가 태어났다. 나는 둘째로 태어났다. 원래 셋째였으나 내가 보지도 느끼지도 못한 둘째 형이 태어나서 얼마 후 바로 죽었다고 한다. 이유는 자세히 말해 주지 않는데 몸이 너무 허약해서 병에 걸려 죽었다고 한다. 하긴 그 옛날에는 죽어도 왜 죽는지 알 방법이 없었다. 죽으면 그저 죽은 것이다. 이유까지 알 여유가 없었다. 나의 탄생으로 둘째를 먼저 보낸 부모님의 슬픔은 어느덧 가슴 언저리로 사라지고 우리 가족은 하루하루 열심히 농사지으며 행복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해방의 기쁨이 온 국토를 뒤덮고 전국 방방곡곡에서 얼싸안고 콧노래를 부른다. 우리도 드디어 진정한 나라를 가지게 되었다는 가슴 벅찬 감동은 나이가 어린 나에게는 아직 생소한 감정이었다. 포천에서도 해방의 기쁨을 기념하며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나도 친구들과 같이 춤을 추었다. 우리 마을의 중앙에는 커다란 광장이 있어서 큰 행사가 있으면 항상 이곳에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인다. 우리 부모님과 나도 늘 참여하는 단골손님이었다. 내가 빠지지 않고 따라가는 이유는 나와 동갑내기 친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와 태어난 곳, 태어난 달이 모두 같아서 늘 형제같이 친하게 지낸 친구이다. 부모님이 출산하기 전 용꿈을 꾸어서, 용처럼 강하게 커 나가라는 의미로 용강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나는 용강이라는 이름이 입에 찰싹 달라붙지 않아 요강이라고 부른다. 친구는 그래서 오줌 싸는 요강으로 놀린다고 늘 불평불만이다. 하지만 마을에 또래 친구가 나밖에 없어서 울며 겨자 먹기로 나와 놀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학교도 다니지 않아서 친구가 나밖에 없다. 정말 나밖에. 그래서 나의 놀림에도 어쩔 수 없이 나랑 어울려야 한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나도 용강이 밖에 친구가 없다.

   용강이는 나보다 키가 작으며 운동을 못 한다. 그러나 몸집은 커서 하는 행동이 매우 둔하고 곰과 같은 인상을 준다. 서로 만나서 놀 때 주로 비석 치기를 한다. 우리가 사는 포천에는 화강암이 많이 있어서 비석 치기의 주재료는 화강암이다. 두 명이 하는 놀이가 가위, 바위, 보로 술래를 정하고 술래가 돌을 세우면 던져서 쓰러뜨리는 놀이이다. 광장에서 하기 때문에 돌멩이가 떨어지면 어김없이 옆집 아주머니께서 조용히 놀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소리를 지르는 게 하도 꽥꽥거려 우리는 돼지 소리라고 비웃는다. 이렇게 하루하루 순진하게 놀며 우리 둘은 커 나갔다.

   용강이와 내가 어느덧 15살이 되던 19505월이 되었다. 우리가 태어난 해는 해방되기 한 참전인 19351월의 겨울이었다. 겨울에 태어나 추위에는 아주 강한 우리 둘은 한겨울에도 티셔츠 하나만 걸치고 얼음판에 나가서 썰매를 타는 장난꾸러기 아이들이었다. 그런 우리가 벌써 15세 청소년이 되어 있었다. 해방된 지 5년이 흘렀으니 그동안 나라 안팎에서는 크고 작은 일들이 있었다. 마을에 서울 소식을 너무나도 잘 알아내는 괴짜 할아버지가 계셨다. 그 할아버지께서 늘 마을을 돌아다니며김구가 안타깝게 죽었어. 1년 전 6월에 죽었으니 벌써 일 년이 다 돼가네.’, ‘그렇게 남과 북이 분단되는 것에 목숨 걸고 반대한 사람인, 쯧쯧쯧.’, ‘소련 놈들과 미국 놈들이 왜 우리 땅에 있는 거야! 자기네 나라로 돌아가야지, 왜놈들처럼 우리를 괴롭히려는 속셈이 분명해.’

   할아버지의 말은 쉴 새 없이 우리의 귀를 귀찮게 하고 있었다. 우리가 할아버지에게 궁금한 것은할아버지 왜 조용히 안 하세요?’라는 것이었다. 늘 순진하게 놀던 나와 용강이가 부모님의 이상행동을 보게 된 것은 5월경이었다. 부모님께서는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하자고 하셨다. 용강이네 부모님과 같이 서울을 지나 부산으로 가자고 하셨다. 부산은 생전 처음 들어보는 곳이었다. 포천에서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던 우리가 부산이라는 곳을 알 수는 없었다. 내가 너무 궁금해 물어보면 부모님께서는 곧 큰 사단이 날 것이라고만 했다. 그래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남쪽으로 가야만 한다는 것이다. 용강이도 마찬가지다. 자기네 부모님이 무작정 남쪽으로 이사를 가지고만 했다는 것이다. 물어봐도 안 알려주니 더 물어보는 걸 포기하고 부모님의 결정을 따랐다. 우리가 반대한다고 안 가실 분들도 아니다. 결정을 따른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가야만 했다.

   이삿짐을 꾸리는 일도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시골에서 농사를 지은 집치고는 잡동사니가 너무나 많이 있었다. 농사에 필요한 것과 옷가지, 이불만 챙기고 너무 큰 짐이나 무거운 것은 나중에 다시 가져오기로 하고 떠났다. 어린 시절을 보낸 포천을 떠난다는 생각에 가슴이 먹먹했지만 그렇다고 부모님께서 가시는 부산으로 안 갈 수도 없었다. 포천에서의 추억을 뒤로 한 채 우리는 부산을 향해 출발했다. 용강이네와 같이 가니 외롭지는 않았다. 용강이와는 이사까지 같이 가니 정말 형제와도 같은 친구이다.

   우리는 서울에서 하룻밤을 묵고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가려고 서울역으로 향했다. 서울역에는 부산으로 가고자 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포천에서 그렇게 많던 사람들을 보다 서울역에서 더 많은 사람을 보니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나와 용강이는 나란히 의자에 앉고 부모님들은 짐을 지키며 서서 갔다. 기차는 시커먼 연기를 뿜으며 힘차게 달려 천안을 지나 부산으로 내달렸다. 부산까지 가는 동안 깜박 잠이 들었다.

  나와 용강이가 어디론가 끌려가는 악몽이었다. 용강이는 울고 나도 울고 아무리 물러도 부모님은 없었다. 홀로 남겨진 슬픔만 가득했던 악몽이었다. 악몽에서 소리치며 깨어나니 기차는 부산에 도착해 있었다. 우리는 서둘러서 짐을 내리고 부산에서 새로 살기 위한 집을 구하기 위해 해안가 쪽으로 이동했다. 부모님들께서 집을 구하기 전까지 우리는 사람들이 임시로 모여 사는 곳에 여정을 풀기로 했다. 무작정 연고도 없는 부산에 온 사람들이 서로 모여 있는 곳이어서 불안하지는 않았다.

   부산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질 7월 말 우리는 강제 징집되어 전장에 투입되었다. 부모님과 이별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긴 했으나 너무나도 짧은 시간이었다. 나와 용강이가 투입된 곳은 북한군이 많이 밀고 내려오는 낙동강 전선이었다.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이었다. 우리와 같이 있던 나이가 많은 분이 알려주어서 부산에서 경북 칠곡까지 왔다는 사실을 알았다. 너무나도 무서운 곳이었다. 부모님과 생이별을 하고 바로 전장에 투입된 나와 용강이는 무엇을 어떻게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시키는 대로 방아쇠를 당길 뿐이었다.

   북한군의 공세가 너무나도 강해서 우리도 사력을 다해 방아쇠를 당겼다. 사람은 죽어 나가고 여기저기 시체가 나뒹굴었다. 시체를 보는 것도 익숙해져서 처음에는 토하고 똥오줌을 쌌으나 이제는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나와 용강이는 수염이 덥수룩한 아저씨를 따라 외진 곳으로 침투했다. 북한군에게 기습을 시도하려는 작전이었다. 소년병인 우리를 끌고 갈 정도로 자신이 있었던 모양이다. 아저씨를 선두로 가운데 내가, 마지막에 용강이가 따라갔다. 포탄이 터지는 소리가 쉴 새 없이 들려왔다. 그때 갑자기 귀가 먹먹해지더니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흙먼지가 사방에 흩날리고 있었다. 앞에 가던 아저씨는 보이지 않는다. 뒤를 돌아보았다. 용강이가 없었다. 무서웠다. 사력을 다해 뒤돌아 뛰어갔다. 몇 미터쯤 갔을까? 군화에 짓밟히는 물컹한 느낌의 고깃덩어리가 보였다. 용강이었다. 포탄에 얼굴만 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몸이 망가져 있었다. 숨은 쉬지 않고 붉은 피만 흘러내리고 있었다. 붉은 피에 하얗게 피워있는 흰 꽃이 빨간색 꽃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온 사방에 붉은 꽃이 만개했다. 어디서도 보지 못한 붉은 색의 꽃이 나의 가슴을 조여오기 시작한다. 허무했다. 한순간에 죽어버린 용강이를 보는 나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죽어서 그냥 고 깃 덩어리와 같이 보였다. 전장에서의 참혹함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많고 많은 시체를 보았지만 용강이의 시체를 보는 것은 더 비참했다. 정신을 차리고 포탄 소리가 나지 않는 곳으로 뛰었다. 얼마나 뛰었을까? 포탄 소리가 잦아들었다. 사력을 다해 뛰어온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쓰러졌다. 내 귀에 흰 꽃이 아른거린다. 꽃향기는 시큼하다. 피비린내와 어우러져 더 시큼했다. 저 멀리 그가 보인다. 감자를 먹으며 여기까지 왔다. 배도 고프고 지쳤다. 타는 듯한 태양 빛이 우리를 녹이기 위해 내리쬔다. 그가 나를 깨운다. 눈을 뜬다. 그는 없었다. 저 뒤편에 죽어 있었다. 고 깃 덩어리처럼,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다.

   나는 배가 너무 고프다. 아침에 먹은 생감자가 전부였다. 낙동강에서부터 신고 온 군화는 피로 물들어 있었고 군복에는 땀이 흥건했다. ‘여기서 잠들면 죽는다. 이대로 죽어서는 안 된다.’ 꿈속에서 용강이가 외친 말이다. 그 말에 잠에서 깬 것이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달렸다. 저 멀리 꽃이 보이는 곳으로……. 꽃이 더 선명해진다. 피비린내가 나지 않는 향긋한 냄새의 꽃이다. 향은 더욱더 진해지고 서늘한 바람이 불어온다. 얼굴에 흘러내리던 땀이 식는다. 더욱더 힘을 다해 뛰어간다. 그리고 안긴다. 얼굴이 까칠하다. 털이 덥수룩한 아저씨였다.

  "아저씨 고마워요",  "아저씨가 흰 꽃처럼 보였어요.", "저 살았나요?"라고 물어보며 바로 정신을 잃는다. 아버지, 어머니, 포천, 용강이, 비석 치기, 얼음 썰매, 전장에 투입되기 전까지 가장 행복한 시절을 보낸 그것들이 모두 너무나 그립다. 그립다. 깊은 잠을 잔다. 꿈속에서 용강이와 물장구치며 피라미를 잡고 있다. 어항에 걸려든 피라미가 살려달라는 듯 파닥거리다. 파닥거림이 유난히 심하다. 살아보겠다고 몸부림치는 피라미가 가엽게 느껴진다.




이름 : 안현준

이메일 : eliteahn@korea.kr



Articles

2 3 4 5 6 7 8 9 10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