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회 수필 창작 콘테스트] 연애의 조건

by Ravlitzen posted Sep 12,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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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의 조건




지금 돌이켜봐도 난 그다지 좋은 연애 대상이 아니었다. 연인이었던 모든 사람들이 십중팔구가 아닌 백이면 백 훗날에


자신을 사랑하긴 했었냐고 물어보는 걸 보니 확실하다. 어렸을 땐 받기만 했기 때문에 좋은 연인이 되어주질 못했었고


나이가 들어서는 아껴줄 능력이 없어서 좋은 연인이 되어주질 못했다. 그래서 나에 대한 호감만 받고 제대로 응답하질


못했다. 사랑하긴 했냐는 질문에 당연히 사랑했다고 대답은 해주지만 자문했을 땐 당연히 그렇다고 답하지 못한다.



사랑 받는다는 건 감사한 일이다. 스스로도 몰랐던 장점을 깨우치게 해준다. 나의 목소리가 심지어 욕설조차 비속어로


들리지 않을 정도로 부드럽구나. 내 미소가 여름날 공사 현장에서 땀을 뻘뻘 흘린 뒤라서 지쳐있는 일용직 아저씨조차


웃게 만들 정도로 화사하구나. 내 팔뚝의 튀어나온 혈관이 의외로 꽤 섹시했구나. 내가 심심할 때 너의 어깨를 손가락


끝으로 토닥토닥 두드렸던 것이 너의 마음도 설레게 했구나. 불편하기만 할 뿐이라 생각했던 큰 신장에 치이는 사람이


뜻밖에도 많았구나. 고된 일을 많이 해서 자세히 보면 흉터가 꽤 많이 생긴 내 손이 고왔구나. 생판 남에게라도 우산을


건네는 내 마음이 너에게 참 예뻐보였구나. 



받은 건 많은데 해준 건 그다지 없고 그나마도 모자랐다. 네 모든 권유에 그럴듯한 핑계거리를 붙여 달아났다. 공부와


근무는 생각해보면 좋은 변명거리다. 심지어 회사 내의 유명한 술고래 꼰대 과장조차 주말에 자격증 공부해야 한다는


나를 술자리에 강제하지 못한다. 어두컴컴한 곳에 네온 사인만으로 불을 밝힌 클럽을 좋아하는 친구놈조차 회사 일로


불참해야 한다는 나를 강제하지 못한다. 그렇게 싸그리 퇴짜를 놓아서 내가 받아줘서 기뻐했던 너는 봉우리가 열리나


기대를 품은 채 미처 피우지 못하고 졌다. 



좋은 연애를 하고 싶은데 아직 연애의 조건을 다 채우지 못하고 조바심만이 들어서 조급하게 너의 마음을 받아버렸다.


적어도 너를 인파로 가득한 대중교통의 늪에서 건져내고 싶었는데 운전 면허를 도합 12번이나 떨어져버린 탓에 결국


자율 주행 전기차가 상용화되고 난 다음에야 차를 사야겠단 마음을 먹게 되었다. 나 혼자 눈 붙일만한 그런 집이 아닌


너와 함께 안락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집 한 채를 마련하고 싶었는데 근무지가 바뀔 때마다 이사를 가야하는 나로선


불가능한 일이더라. 고백의 결과, 우린 연인이 됐지만 자가 검진 결과 연애의 조건이 채워지지 않았으므로 우린 명색


뿐인 연인이 되어 난 네게 모든 걸 주지 않았다. 




학생일 땐 학생이라는 이유로 달아나고 성인이 되어서는 준비가 안 됐다는 이유로 달아나는군. 그저 사랑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 세상이 사랑 하나만으로 다 해결될 거라 믿고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가는 젊은이들이 부러울 따름이다.


바보처럼 보이겠지만 살아보니 세상살이가 의외로 아무 생각 없이도 잘 굴러가도록 체계가 잡혀있기 때문에 어린 날


과오로 아이가 생겨서 20대 초반의 부부가 되어도 세상 살아갈 땐 큰 문제는 없다. 각오만 있다면. 항상 최악의 경우


부터 상정해두고 조금이라도 불안 요소가 있으면 일보 후퇴 후 지켜보는 건 내 버릇인데 그건 변수를 마주했을 때에


맞서싸울 각오가 없기 때문이다. 



사랑을 각오 없이 가볍게 시작하는 사람도 있지. 그러다 덜컥 뜻밖의 상황을 맞닥뜨리게 되면 각오를 가지거나 또는


책임 회피하고 달아나버리는 사람도 있고. 사랑을 시작할 때 반드시 각오가 필요한 것은 아니라 유원지에 놀러가서


어트랙션 타는 마음가짐으로 시작했어도 괜찮았을테지만 그러고 싶지 않더라고. 어쩌면 그래서 더 잔인한 방식으로


네게 상처를 안겼는지도 모른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고사시키듯이 너의 신호에 무응답으로 천천히 말라죽도록


유도했으니.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깊게 관계가 발전되기 전에 종식해서 다행이라고 안도하는 나를 발견하기도


해. 결과로만 보았을 때 너에게 물리적으로 손실이 발생한 부분은 시간밖에 없으니까. 정신적인 건 차치하도록 하고.


아무튼 나로선 할 변명은 많은데 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요는 미안한 마음이다. 



내가 좋은 연인이 되지 못해서 미안하고. 그전에 나 혼자만의 연애 조건을 달성하지 못해서 미안하고 그런 다음에도


네게 이런 사정을 밝히지 못하고 철저히 외면해서 미안해. 하지만 고백을 받았을 때 거절하는 이유로 이렇게 기나긴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는 건 좀 지나치단 생각이 들더라고. 날 좋아해줘서 고마운데, 난 연애를 할 수 없고 언젠가 이


조건이 해금되는 날은 당연히 오겠지만 그땐 아마 너무 늦을 것 같으니 바삐 너의 행복을 찾아가길 바라. 



시간은 금이니 경제적으로 생각하자. 경제적으로 봤을 때 난 네가 시간을 쏟기엔 그다지 좋은 대상이 아니야. 






신정빈

ravlitzen@naver.com

010-4519-7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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