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차 창작 콘테스트 수필 응모 - 강변붕어빵, 소년 신문배달원

by 불탄바나나 posted Apr 09,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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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변붕어빵


이제는 웃는 거야 해피데이 슬픔은 묻어두고 네버 크라이포장마차 지붕 기붕에 매단 카세트 라디오에서 경쾌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대전 서구 만년동 지하 극단 사무실 앞에 작은 포장마차의 붕어빵틀이 달구어졌다. ‘잘 될거야, 죽기야 하겠어생각했다. 한적한 골목길이었다. 난 회전하는 붕어빵틀에 식용유를 조심스레 따랐다. 신발가방을 들고 겨울옷으로 완전무장한 어린 학생들이 간간히 발을 멈추고 호기심을 보였다. 지글지글 고소한 냄새는 이내 타는 냄새로 변했다. 화들짝 놀라 붕어빵틀을 열어보니 검게 탄 아니 튀긴 붕어빵이 나왔다. 붕어빵틀에 기름을 바르는 것이 아니었다. ‘호랑이 굴에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배웠지만 정신을 차려도 안 되는 일이 많았다. 허둥지둥 대다가 손등을 몇 번을 데였다.

 

아저씨 붕어빵 이거 파는 거예요?” “응 아니다 그냥 줄게 먹어보고 소문좀 팍팍 내주라한 아이가 내가 건내준 붕어빵 먹지 않고 이리 저리 돌려가며 살피고 있었다. “아가, 안죽어, 봐바 아저씨가 시범으로 먹어볼게, ... 맛이 괜찮은데!” 실패작을 먹다보니 주인의 배가 먼저 불러왔다. 오후가 돼서야 이제 붕어빵다운 붕어가 틀에서 나왔다. 하교길 학생들이 200원 짜리 붕어빵을 사가고 근처 태권도 체육관에 20개를 사가기도 했다. 내가 속한 극단 예사랑의 단원들이 도와주었다. 그 붕어빵 어묵 떡볶이 포장마차도 극단 단원의 돈을 빌려 시작한 장사였다. 오늘처럼 잔뜩 구름낀 시커먼 하늘에 찬바람이 부는 날이었다. 20년 전의 일이다. 나도 모르게 손목을 돌리고 눈앞에는 둥그런 붕어빵틀이 돌아가는 것이 보일듯하다.

 

난 대전 중구 용두동 토박이다. 날맹이 호수돈여고 담장에 붙은 집에서 태어났다. 거기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졸업을 4남매가 함께 했다. 못했지만 대학교까지 28년간 살았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고모가 마련해준 무허가 집이었다. 거기가 재개발에 되어 철길 옆 작은 아파트로 처음 이사를 갔다가 두 번째로 이사 온 집이었다. 아버지는 평생 운전만 하신 분이셨다. 소심한 아버지의 벌이로는 4남매를 가르칠 수 없었다. 큰 사고가 나서 운전이 무섭다며 택시를 팔았다. 어머니는 오랫동안 오정동 도축장에서 일을 하였다. 소와 돼지의 부산물 장사를 하셨다. 정확히는 선지, 그러니까 돼지와 소를 잡을 때 나오는 피를 굳혀 선지를 만들어 정육정과 식당에 납품을 했다. 하지만 고리의 사채를 끌어서 쓴 게 화근이었다.

셋째인 내가 제대하고 막내 남동생이 입대하고 첫 휴가를 나왔을때 어머니의 조그만 그 도축장 부산물 사업이 망했다. 우리 집은 조그만 유등천 철길옆 낡은 아파트에 이사를 갔다가 다시 만년동 갑천변 사방이 아파트단지로 둘러싸인 섬 같은 주택단지로 이사를 갔다. 변두리 상가주택의 2층 이었다. 우연히 그곳은 당시 내가 속해 출근 아닌 출근을 하는 극단이 가깝게 있었다. 서른이 가까운 나는 당시 영화를 하네 연극을 하네 아직 갈피를 못잡고 있었다. 학교는 휴학을 하고 오래 복학을 하지 않았다. 극단에서 연극을 좀 하였지만 벌이는 없었다. 가끔 공사장에서 일을 하기도 했는데 최후 수단으로 선택한 일 붕어빵 장사였다.

 

팔순의 우리 할머니는 원래 집을 떠나게 되자 치매가 오셨다. “집에 가자” “집에 갈 거야라며 떼를 쓰시기 일쑤였다. 먹고 살기가 힘들어 일본에 돈을 벌기위해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함께 가셨단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사고로 돌아가시고 해방 후에 할머니는 뱃속의 아이와 함께 어린 3남매를 데리고 한국에 돌아왔는데 할아버지의 형제 중 한 분이 사는 곳에 정착을 한 것이다. 그것이 대전에서의 삶의 시작이었다. 당장 아이들을 먹여 살리는 게 문제였다. 그래서 밀주도 만들고 장사도 하고 안 해본 일이 없다고 하셨다. 그리고 미군부대의 버린 음식을 모아 아이들에게 먹이곤 하셨단다. 그리고 언젠가 미군 비행장이 있던 곳인가 미군부대에서 음식을 보자기에 싸서 넘어오다가 죽을 뻔 했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애들 배고프다는 소리가 귀에 들려서 욕심을 부렸어. 마침 비가 많이 와서 강이 불었는데 그 쑥뱅이 다리 아래로 건너는데 발을 헛디딘거야. 둥둥 떠내려가다가 나무인가 풀인가를 잡고 가까스로 물가로 나왔던거여, 십년감수했지.... 아휴 그때만 생각하면...” 그 쑥뱅이 다리가 유등천으로 생각이 되는데 나는 그 상류인 갑천 변에서 또 다른 삶의 갈래길에서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된 것이었다. 그런 할머니가 이제 자꾸 자신을 집으로 데려가 달라고 하셨다. 집에 계시는 어머니가 내가 하는 붕어빵 장사를 도와주셨다. 물론 치매가 온 쇠약해지신 할머니를 챙기시면서 말이다. 할머니는 유독 셋째인 나를 이뻐라 하셨다. 힘든 인생역정 때문인지 술과 담배를 좋아하신 할머니가 경로당에서 술에 취해서 주무시면 으레 나를 찾았다. 내가 할머니를 부축하거나 업고 집으로 돌아왔다.

 

날씨가 더 추워져 한겨울이 되면서 나의 붕어빵 장사는 천천히 안정을 찾아갔다. 길이 들여진 붕어빵틀에는 노릇하게 붕어빵이 맛깔스럽게 구워져 나왔다. 어머니가 국물을 내주신 200원짜리 어묵도 나무 젖가락에 꽂아주니 꼬맹이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그리고 쑥스러움도 이제 잦아들어서 나는 작은 네 바바퀴를 굴려 포장마차를 큰 길이 있는 쪽으로 아파트 단지 앞쪽으로 이동을 했다. 그 아파트 단지가 강변 아파트였고 붕어는 강변에 사는 것이에 나는 강변 붕어빵이란 이름을 지었다. 그리고 주문과 배달을 하려고 명함을 팠다. “착한 사람이 만듭니다. 강변 붕어빵분홍색 꽃무니가 들어간 예쁜 명함에 PCS 전화번호도 적어 넣었다. 처음에 그곳에서 장사를 하던 분의 텃세가 없지 않았다. “아니 여기 뭐여. 시방 누구 허락받고 여기서 장사를 한데 총각, 서로가 말여 잉 이러믄 쓴가?” “아휴 죄송합니다. 같은 업종이 아니니까 좀 봐주세요. 뻥튀기도 같이 잘 될거예요그렇게 또 하나의 이웃이 생겼다.

 

간밤에 눈이 많이 왔던 날이었다. 다행이 다음날 해가 나오고 날이 푹해서 눈이 녹고 있던 날이었다. 눈을 털어내고 장사를 하고 있었다. 그날은 어머니가 할머니를 모시고 오기로 한 날로 기억되었다. 저기 멀리서 엉금엄금 살살 걸어오시는 할머니 옆에는 어머니가 부축을 하고 계셨다. 나는 포장마차의 비닐문을 열어 제끼고 달려나갔다. 할머니를 부축하여 모시고 들어와서 두 분을 의자에 않게 하였다. 그리고 갓 구운 고소한 팥을 잔뜩 넣은 붕어빵을 종이컵에 넣어 할머니와 어머니께 드렸다. “뜨거우니까 조심하세요 할머니, 어때요? 손자가 구우니까 빵이 맛있죠?” “... 맛있다” “진짜요?” “, 진짜루 뜨거워도 맛있다나와 어머니는 그렇게 한동안 말없이 쪼글쪼글해진 할머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천천히 붕어빵을 드시던 할머니가 갑자기 일어섰다.“ 나 갈겨, 집에 갈겨.. 집에 가고 갈거야.” “네 어머니 제가 모시고 갈께요. 추운데 이제 일어나요그런데 할머니가 갑자기 자리에 앉으시곤 말씀하셨다. “우리 공부 잘하는 손자가 어쩌다가 길가에서 붕어빵 장사를 하는지.... 꿈에도 생각 못했다...” “엄니, 손자 잘 하니까 걱정마세요. 뭘해도 잘해요. 자 이제 집에 가요할머니의 외출은 그게 마지막이었다. 나는 할머니의 푹꺼진 뒷모습을 그리고 나더러 그만 들어가 장사하라는 어머니의 느릿한 손짓을 하였다. 난 멀어지는 두 분의 느릿한 걸음걸음을 오랫동안 가슴에 담아두었다.

 

강변 붕어빵에서 장사를 하며 나는 많은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단골도 많이 생겼다. 8톤 대형 트럭을 운전하는 아저씨는 점심시간이 끝나갈 무렵 차를 세우고 들어왔다. 3천원을 주고 붕어빵과 어묵과 떡볶이를 거의 매일 드시러 오셨다. 식사를 그걸로 대신하는 모양이었다. 말수는 없지만 인상 좋게 생기신 단골 손님이셨다. 어떤 날은 어떤 꼬맹이가 우리 가게 앞에서 빼꼼히 나를 한참을 쳐다보았다. 그래서 내가 물었다. “얘야, 붕어빵 하나 줄까? 돈 없어도 돼” “저기 아저씨.. 혹시 개그맨 유재석씨 아니예요?” 누가 개그맨이 붕어빵 장사를 한다고 이야기를 해줘서 확인을 나왔다고 하였다. 나더러 개그맨 유재석을 닮았다며 사인을 해달라고 해서 사인을 해주기도 했다. 거울을 보니 눈과 입이 튀어 나온 게 닮은 거 같기도 했다. 나는 근처 아파트에 배달을 가기도 하고 아주머니들의 장바구니를 들어주기도 하고 짐을 보관하기도 하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친한 이웃이 되고자 노력을 했다.

 

또 이제 갓 여중생이 된 어떤 꼬마 아가씨는 아저씨 여자친구 있어요? 제가요 우리 사촌 언니 소개시켜줄까요?” 하곤 하였다. 그러다가 자신에게도 남자친구가 생겼다고 이야기를 하였다. “그런데 걔는 내가 자기 좋아하는 줄 몰라요.. 까르르르”. 안경을 쓴 어떤 친구는 용돈이 부족했나보다. “저기 사장님 어묵 국물 좀 먹어도 될까요? 오늘따라 따끈한 국물이 땡겨셔요.” 늘 종이컵에 어묵 국물만 마셨다. 그리곤 미안했는지 자신이 종이컵을 가지고 와서 눈인사를 하고 어묵국물을 따라 마시곤했다. 9시 파장 무렵에는 근처 대형 백화점의 손님을 나르는 셔틀버스 기사님이 거의 매일 찾아오셨다. 퇴근을 하시고 오시는데 가끔 소주 한 병이 들려있었다. 근처 주공아파트에 사시는 아저씨였다. 자신이 사는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취직이 안되는 큰딸, 노모를 모시고 살고 버스 할부금 걱정을 하시는 그래도 늘 웃음을 지어보이시던 아저씨와 소주 한잔에 어묵과 국물로 아직 사라지지 않은 희망을 이야기하곤 하였다.

 

그런데 해가 바뀌고 어느 날 사건이 벌어졌다. 아침에 장사를 하러 나가보니 내 붕어빵 포장마차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었다. 나는 너무 당황해서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묶었던 두꺼운 고무줄이 잘리고 쪽지가 붙어있었다. 연락을 해보니 구청에서 민원이 들어와서 철거를 해간 것이었다. 오후에 어머니와 구청 민원실에 들어갔다. 사정사정해서 범칙금을 내고 포장마차를 주주차장 구속에서 찾아냈다. 나의 분신 같은 문패도 없는 강변 붕어빵 포장마차풀이 죽어 한없이 처량하고 안쓰러운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포장마차를 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고개를 넘을 때는 어머니가 뒤에서 밀어주셨다. 내리막길에서 양 볼을 때리는 찬 겨울바람은 또 얼마나 매서운지 기억이 생생하다.

 

그렇게 2년 겨울 동안 강변 붕어빵장사를 했다. 얼마의 돈을 모아서 나는 서른이 넘어 상경을 했다. 서울에서의 삶도 팍팍하긴 마찬가지였다. 영등포 옥탑방에 살다가 도봉산아래 지하 월세방에서 살며 이삿짐센터에서 일을 했다. 그 이후로 겨울 몇 해 동안 내 명함을 보고 가끔 전화가 오기도 했다. “아저씨 붕어빵 배달되요?” “아저씨 떡볶이 사러 갈 건데 포장되죠?” 달콤한 단팥의 강변 붕어빵과 그걸 팔았던 아저씨를 기억하고 소환하는 목소리다. 정신을 차린 나는 마음을 잡고 노력하여 마흔 한 살에 결혼하고 가장이 되었다. 나는 가끔 고향 대전에 내려가면 강변 붕어빵의 흔적을 찾으로 그곳에 가곤 한다. 그때 내 포장마차 안에서 추위를 녹이고 붕어빵을 먹으며 잠시 쉬었던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아픔을 삭이고 희망을 꿈꾸던 함께 이야기했던 이웃들은 지금 어디에 살고 있을지...모두 행복했으면 한다. 아이들도 이제 부모가 되었으리라. 대전 갑천의 강변아파트 앞에 자리 잡았던 추억의 강변 붕어빵’.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내 삶의 아지트로 기억될 것이다.




소년 신문배달원


초등학교 6학년 때 나는 갑자기 신문배달 소년이 되었다. 아버지는 택시 운전을 했고 어머니는 소와 돼지를 잡는 도축장에서 일을 하였다. 어려운 형편에 돈을 달라고 하기가 힘들었다. 뭐든 일을 해서 돈을 벌어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었다. 돈을 벌어서 나는 내가 갖고 싶은 것을 사고 싶었다. 당시 나의 꿈은 무전기! 멀리 떨어져서 이야기를 하고 싶은 무전기를 사고 싶었다. 청소년 잡지 광고를 통해서 본 무전기. 영화배우처럼 무전기를 들고 놀면 정말 멋지고 근사할 것 같았다. 물론 힘들게 일하시며 자식들 뒷바라지 하는 부모님의 힘을 덜어 드리고 싶었다. 또 내가 스스로 번 돈을 드려서 기쁘게 해주고 싶었다. 4남매 중의 셋째인 어린아이였지만 그래서 나 스스로 할 일을 찾아 나섰다. 구두를 닦으러 나갈까? 그런데 준비하기가 힘들었다. 기술도 없었고... 그러다가 우리 집에서 가까운 언덕위의 고등학교 앞에 있던 대전일보 신문보급소가 눈에 들어왔다. 내 또래의 아이들도 학교에 다녀와서 보급소에 가서 신문을 받아 묶어 어깨에 메고 신문을 배달하러 가는 모습을 종종 보아왔었다. 땀 흘리며 일하는 신문 배달하는 아이들이나 형들을 보면서 얼마나 처음엔 어려우면 저런 일을 할까 생각을 했다.

 

어느 날 보급소를 힐끗 처다 보고 지나가다가 배달원 구함, 장학금 지급이라는 구인쪽지가 붙은 보급소 유리창을 보았다. ‘장학금이라는 말에 정말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몇 번을 망설이고 갔다가 돌아온 끝에 신문 보급소의 문을 두드렸다. 그렇게 초등학교 6학년 때 나는 지방의 석간신문인 대전일보의 신문배달원이 되었다. 나는 중구 선화동 일대가 나의 배달구역이었다. 제일 힘든 일은 아무래도 배달하는 집 기억하기. 못 쓰는 달력을 뜯어 커다란 하얀 종이 뒤편에 골목골목을 그려놓고 배달할 집과 상점을 표시를 했다. 하지만 헛갈려서 정말 진땀을 뺐다. 친구들이 이런 일을 하는 나를 볼까봐 창피하기도 했다. 구독료 수금을 할 때는 어른들을 상대하는 일이라 쉽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꾹 참았다. 천천히 나도 어른이 되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느 날 학교를 일찍 파하고 보급소에 달려갔다. 보급소장님이 신문사에 직접 신문을 찾으러 갈 일이 생겼다. 보급소장님이 나를 데리고 나섰다. 소장님이 모는 오토바이 뒤에 타고 시내를 달려 나갔다. 일찍 찾아온 여름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날이었다. “부다다다 부다당오토바이 소리에 부딪힌 시원한 바람이 내 볼을 간지럽히며 불어왔다. 신문사는 대전역 대로변 맞은 앞에 위치했다. 주변에서는 제일 큰 건물 중의 하나로 작은 내가 고개를 올려야 전체가 다 들어왔다. 그만큼 크고 위압스럽 모습도 보였다. 소장님은 신문사에서 다른 직원들과 인사를 하고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나 또한 소장님을 졸졸 따라다녔다.

 

처음 신문사 건물에 들어섰을 때 들리던 기계소리가 잊혀지지 않는다. 신문사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는데 기차의 기적소리가 크게 들렸다. 하지만 이윽고 더 큰소리가 기차소리를 집어 삼켜버렸다. 소변기의 진한 암모니아 냄새마저 잊게하는 웅장한 기계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우우웅~ 우우웅~ 우우우웅!” “차알차작, 차알차작, 차알차작!” 난생 처음 방문한 신문사에 호기심이 나서 난 여기 저기 고개를 기웃거렸다. 무슨 소리가 이렇게 규칙적이고 큰가 하며 목을 쭉 빼고 귀를 쫑긋 세우고 둘러보았다. 우리 보급소장님이 저 앞에서 나를 보며 따라오라고 손짓하는 걸 발견하였다. 나는 소장님을 따라 지하로 내려갔다. 어둠 컴컴한 지하에는 거대한 기계 여러 대가 쉴 세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바로 윤전기였다. 13년 인생을 살면서 그리고 그때 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거대한 기계였고 처음 본 신비로운 장면이었으며 웅장한 소리였다. 뿐만 아니라 거기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진지한 모습을 보았다. 한쪽에서는 다양한 한자와 한글이 모여 있는 수많은 작은 글자판도 보았다. 몇몇 아저씨들은 그 작은 활자들로 판을 만들었다. 그 글자들을 모아서 신문 크기의 네모난 판 안에 잘 짜놓은 다음 잉크를 묻힌 윤전기를 돌리니까 신문이 인쇄되어 나오는 것이었다. 저기 큰 길 건너 기차역의 기차가 출발할 때 나는 빼에엑!” 기차 소리와 우우웅~ 차알차작!”하는 거대한 윤전기의 소리와 합쳐지니 천지창조의 소리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압도되었다. 그리고 검은 잉크 냄새와 섞여 무슨 공상과학 영화의 미래도시에 온 느낌이 들었다.

 

신문이요!” “대전일보요!” “신문왔어요!” 그날 이후 학교를 마치면 보급소에 가서 신문을 받았다. 나는 힘차게 소리치며 신문을 메고 배달하며 뛰어다녔다. 처음엔 너무 창피해서 이 일을 어떻게 계속하나 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안하고 생기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아버지의 말을 들었다. 힘들었지만 내 손으로 자랑스러운 일을 해보고 싶었다. 얼마 후 대전역 철도회관에서 신문배달 소년 장학금 수여식에도 참석을 했다. 처음 참석한 큰 행사였다. 나는 일을 한지 얼마 안되서 장학금 15천원 전부를 받지 못했지만 5천원을 받았다. 그 돈을 가지고 집으로 가는 길을 정말 뿌듯했다. 어머니께 드렸더니 참 잘했다고 칭찬을 해주셨다. 신문을 배달하면서 신문을 가까이 하니까 안 보던 신문을 읽게 되었다.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신문을 보려면 신문에 많이 나오는 한자를 알아야 했다. 고등학교 다니는 형에게 물어보고 주위에 질문을 하여 모르는 한자를 많이 알게 되었다. 그렇게 신문을 끼고 살다보니 내가 가진 상식이 넓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뭐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가지게 되었다. 또 한 가지 신문을 배달하면 남과 다른 좋은 혜택이 있었다. 바로 무료로 버스타기이다. 시내에서 신문을 배달하고 돌아 올 때는 집근처에 종종 29번 버스를 타고 우리 동네로 돌아왔다. 남은 신문을 버스기사님께 드리면 버스를 무료로 탈 수 있었다. 그때면 어깨가 으쓱해지곤 했다.

 

신문을 배달만 하지는 않았다. 구독자를 늘리는 신문 확장이나 신문 구독료를 수금하는 일도 배워서 해야만 했다. 그럼 건당 얼마씩의 수당이 월급에 보태져서 더 많은 돈을 벌수가 있었다. 처음엔 정말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내가 배달한 구역은 선화동 번화가로 동양백화점이 있었고 뒤로 술집도 식당도 많았다. 초등학교 6학년 꼬맹이가 수금을 하러 다니니 수금을 잘해 주시는 분도 있었지만 불쌍히 보는 분도 있었고 무시하는 사람도 만났다. 정말 감사하게도 추석 명절인가를 앞두고 나에게 새 신발을 선물해주신 분이 있었다. 당시 국일관이라는 커다란 술집에서 일하시는 분이셨다. 한복을 단아하게 입은 키 큰 아름다운 젊음 분으로 기억이 된다. 보급소장님과 같이 확장 작업과 수금을 나간 어느 날이었다. 갑자기 큰 소나기가 쏟아지고 비를 피하러 들어간 식당에서 먹은 칼국수의 맛도 정말 잊을 수가 없다. 멸치로 국물을 낸 구수한 국물에 하얗고 노란 계란이 풀어져서 둥둥 떠 있었다. 그곳은 지금 유명한 선화동의 두부 두루치기 골목이 되어있다.

 

13세 대전일보 신문배달 소년은 이제 흰 머리카락이 더 많은 나이 쉰의 아저씨가 되었다. 그때 또래보다 일찍 접했던 세상물정은 나를 좀 더 일찍 철들게 만들었던 것 같다. 힘이 들 때마다 나를 일으켜 세워주고 마음을 다 잡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상식을 넓혀주었고 자립심을 키워주었다. 지금 대전일보사는 대전역 앞에서 사라졌지만 나는 늘 고향에 내려가 대전역에 가면 내 소년시절의 꿈과 희망과 삶의 흔적을 만날 수 있는 그 곳을 천천히 둘러보곤 한다. 정말 잊을 수 없는 곳이다. 주말에 대전 고향의 부모님을 뵈러 간다. 선화동 두부두루치기 골목으로 모셔가서 맛있는 음식도 대접하고 추억을 되살리고 싶다난 거기서 대전일보요!” “신문 왔어요!” 외치면서 신문을 메고 골목을 돌며 대전일보를 돌리던 유년시절의 코흘리개 신문배달원인 나를 만나게 될 것 같아 가슴이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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