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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모자 성명 : 박소정

이메일주소 : aros712@naver.com

HP : 010-7107-3534



<제5차 창작콘테스트 공모>

<수필 부문>

 

나 어릴 적에

 

누구에게나 어린 시절이 있다. 이제 어릴 때의 기억은 드문드문 난다. 어린 나는 엄마 품에 안겨 자고 있다가 중간에 깬다. 나는 이 기억을 떠올릴 때 안겨있는 시점이 아니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이 기억이 엄마와 내 관계에서 제일 편안했던 때인 것 같다. 내가 아주 작고 그래서 엄마가 아주 컸을 때 말이다. 이제 우리는 서로에게 기대는 게 어색한 사람들이다.

여섯 살이나 되었을까. 엄마와 아빠는 결국 이혼을 하기로 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이혼을 하고 상황이 정리될 동안 친할머니 집에 가게 되었다. 엄마 말로는 섬에서 살기 전의 나와 다녀와서의 내가 굉장히 다르다고 한다. 예전의 나는 청소를 잘했고, 길거리에 쓰레기를 버리는 아저씨를 보면 버리면 안 된다고 말했고, 엄마 친구한테 엄마가 옷을 주려고 했더니 그건 우리 엄마껀데.”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 다녀와서는 길에 쓰레기를 버려서 놀랐다고 했다. 지금의 나는 굉장히 소심해서 내가 어릴 때 어른들한테 서슴없이 말 할 수 있었다는 게 신기하다. 할머니 댁은 완도에 있는 섬이었다. 곧 다시 데리러 온다고 해서 매일 짐을 쌌다. 음식물을 담거나 보관하는데 주로 쓰이는 위생 투명 비닐봉지로 책을 포장했다. 하루는 할머니와 살기 싫어서인지, 혼나서인지 짐을 싸고 마당으로 나갔다. 그곳에 책을 두고 이불을 펴고 이제부터 이곳에서 살 것이라고 대청마루 위에 있는 할머니한테 말했다. 할머니는 웃으면서 어디 한 번 잘 살아보라고 했다. 날이 추워서 나는 짐을 챙겨서 방 안으로 들어갔다. 할머니는 해녀였다. 온몸이 검고 바짝 붙은 옷을 입고 한 손에 해산물이 가득 든 양동이를 들고 차박차박 소리를 내며 걸어왔다. 집으로 가끔 동네 할머니들을 불러서 고스톱을 치거나 배를 타고 읍내로 같이 가기도 했다.

그리고 바다 냄새가 났다. 어디서나. 이곳에서 살았기 때문에 나는 이 냄새를 어디서든 맡을 수 있었다. 가끔은 짜고 축축했고 새벽에는 가벼워졌다. 눈을 뜨니, 할머니가 없었다. 창호지가 파랬고 나는 놀라서 그대로 문을 박차고 내복차림으로 맨발로 달렸다. 아랫집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갔다. 갑자기 찾아온 나를 두 분은 이불 안으로 들어오라고 말한다. 두 분은 할머니가 바다에 간 거라고 했다. 발이 녹고, 따뜻했다. 다시 잠들 수 있었다. 어릴 때는 눈을 떴을 때 혼자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어린 아이들은 보이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고 책에서 읽었다. 한밤중에 할머니의 심부름을 나갈 때도 있었다. 여름에 모기향을 사러 가는데, 달이 쫓아와서 달리기도 하고 달을 보면서 뒷걸음쳤다. 달은 슈퍼에 갈 때도 있었고 다시 집으로 돌아올 때도 있었다. 별은 말할 것도 없이 많았다. 그곳에서 나는 김원지, 박의주랑 친구였다. 나는 의주의 이름을 이해할 수 없어서, ‘으주냐고 우주냐고 물었다. 의주는 으이주라고 천천히 말했다. 의주는 조금 사내아이같이 생긴 바가지머리 여자애였고, 원지는 약간 까탈스럽게 생긴 주위에서 오렌지 빛이 나는 것 같은 상큼한 애였다. 할머니와의 첫 날 밤이나 할머니와의 대화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는 같이 보고 또 보고를 봤다. 티비 앞에서 춤을 추기도 하고, 나는 할머니의 흰머리를 뽑아주고, 발가락의 때를 벗겨서 냄새를 맡았다. 기억나는 것보다 기억나지 않는 것이 훨씬 많다. 1999년이 되었다는 영상도 할머니 집 티비로 봤다. 어떤 것이 앞이고 뒤인지도 모르겠어서 그저 하나의 에피소드처럼 드문드문하다.

엄마가 나를 데리러 왔다. 할머니와 엄마는 어떤 대화를 했고 나는 엄마랑 같이 살 수 있다는 생각에 그냥 들떠있었다. 아마 아빠랑 살게 될 일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할머니가 물었다. 계속 나랑 같이 살지 않겠냐고. 나는 엄마 등 뒤로 숨었다. 이상하게도 할머니 집을 내려가는 바다로 이어진 그 가파른 골목에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집밖으로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슈퍼도 문을 닫았다. 그래서 아무와도 인사할 수 없었다. 공터에는 하얀색 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랑 아빠는 이모가 하는 가게에서 만났다고 한다.

학교에서는 소심한 아이였다. 초등학교 4학년 때는 반 년 간 왕따를 당했다. 나는 왕따였다. 내가 왕따가 되니까 전에 왕따였던 남자애가 놀렸다. 가방에 있는 만화책을 뺏어서 담임선생님한테 일러바쳤다. 하필이면 그 책 이름이 예뻐지고 싶어였다. 남자 아이는 예뻐지고 싶냐면서 놀렸고 나는 당황하고 화가 나서 상관없잖아!’라고 소리쳤다. 누가 왕따를 당하던 선생님은 관심이 없었다. 선생님의 관심은 아이들이 자신의 말을 잘 듣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선생님을 우습게보았고 수업과 쉬는 시간이 구분되지 않을 정도였다. 아이들이 화장실에 내 이름이 낙서 되어있다고 말했다. 수업시간이었다. 선생님은 나한테 걸레를 들고 가서 지우라고 했다. 그것들은 다른 사람이 쓴 내 욕이었다.

엄마가 동생을 임신했고 나를 데리고 살 수 있게 되어서 전학을 가게 되었다. 그즈음 남자아이들이 너무 심했다며 여자애들을 말리기 시작했고, 나는 학교 옆에 있는 여성문화회관 화장실에서 여자아이들과 화해를 했다. 어쨌든 왕따를 당하고 나서 그 이전보다 사람들과 친해지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가장 친했던 친구가 왕따를 주도했던 것이기에 친구의 감정에 예민해졌다. 중학교 때나 고등학교 때나 좀 덜 할지 모르지만 어쨌든 지금까지도 나는 다급하게 친해지려고 한다. 가끔은 선택받기 위해서 묘기를 열심히 부리는 것처럼 느껴질 만큼. 그래서 실수를 많이 했다. 혼자 남지 않으려고 과장되게 얘기하거나 내 성격을 죽이면서 상대에게 나를 맞추려고 노력한다. 초등학교 때는 2년 동안 친구 집까지 갔다가 우리 집으로 돌아왔다. 단지 혼자 가는 게 싫어서였다. 혼자 가는 게 싫어서 더 많은 시간을 혼자 돌아와야 했다. 지금도 종종 같이 있을 수 있다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돌아가는 편을 선택한다. 그래서 가만히 있어도 친구가 생기는 아이들이 부럽다. 정확히 말하면 가만히 있을 수 있는 아이들이 부러운 것이다. 나는 불안해서 그럴 수 없다. 그리고 쓸데없이 다른 사람들에게 과하게 다가갔다가 책임 못 질 일도 했다. 아무도 없는 교실을 좋아했다. 시간이 지나면 곧 사람들이 하나 둘 오게 될 교실을. 아니면 청소가 끝나고 선생님과 함께 나갈 때를 좋아했다.

동생이 태어나고, 우리 가족은 왕십리에서 살게 되었다. 물론 나도 성동구에 있는 무학초등학교로 전학을 왔다. 그 당시 우리 집은 왕십리에 족발보쌈 배달장사를 하고 있었는데 돈을 꽤 잘 벌었다. 하루에 백만 원씩 팔릴 때도 있었다. 우리 가족이 살면서 가장 부자였을 때였다. 점쟁이가 팔라고 해서 팔아버리고 화양리에 식당을 차렸는데 하루에 손님이 한 테이블 와서 우리는 세 달도 못 버텼다. 가게가 망하고부터 엄마와 아빠 사이는 나빠졌다. 나는 부모님의 싸움을 말리고 나서는 늘 약국에 가야 했다.

날씨가 맑은 날이었다. 동생이 태어났던 날, 가방을 매고 차병원에 갔다. 병원 복도에서 이모가 아빠 쪽 가족들이 와서 볼 수 없다고 했다. 엄마도 볼 수 없었고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 동생을 본 건 병원에서 퇴원하고였다. 방이동 집은 마루가 넓은 지하 1층 집이었는데, 넓은 마루 가운데에 병진이가 누워있었다. 포대기 같은 것에 둘러싸여 있었다. 조그만 손이 반쯤 주먹을 쥐고 있었다. 나보다 훨씬 작은 손을 만졌다.

어릴 때 나는 많은 것으로부터 상처를 받거나 짓눌려 있었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서 나는 어느 날 문득 내가 더 이상 상처만 입던 아이가 아님을, 피해자가 아님을 알았다. 어릴 때부터 쓴 글 속에서 나는 늘 상처를 입는 쪽으로 등장했는데 아이가 아니게 된 나는 그들과 같은 가해자가 될 수 있음을 문득 깨달았다. 동생의 손보다 어느 덧 큰 손을 갖게 된 것이다. 그것은 내가 이제 어른들의 세상에만 의지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 뭔가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과 동시에 무언가를 책임져야 한다는 두려움도 같이 주었다. 집 안에서 계속되던 피냄새와 부모님의 두 번째 이혼. 고등학생 때가 특히 변하지 않은 것들로 괴로웠던 시기였었다. 그 시기를 지나서 이제는 내가 바꿀 수 없는 것들을 받아들이고 내 스스로 바꿀 수 있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에 대해 알게 되었다. 누구에게나 있는 어린 시절이 나에게는 조금 더 파란만장했던 것 같다. 그 때의 기억들은 여전히 내게 영향을 끼치고 있지만 그것들은 이제 내가 껴안고 갈 수 있을 만큼 힘이 약해진 것 같다. 반대로 내가 조금 더 큰 것이기도 하겠지만.

 

 

열쇠를 구하는 방법

 

일을 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네가 일을 할 줄 안다는 것이.

 

도서관에도 성수기와 비수기가 있다면, 그것은 당연히 방학과 개학이다. 송파도서관에서 일했던 세 달 동안은 이 성수기와 비수기가 적절히 섞여 있는 겨울이었다. 방학이 되면 아이들이 아침 일찍부터 어린이실을 찾았다. 어린이실에서 내가 맡은 일은 아이들이 본 책을 정리하고 책을 빌려주고 한 번씩 책들이 제대로 꽂혀있는지 순찰하듯 확인하는 일이었다. 반복적인 업무에서 가끔 다른 일들이 생기곤 하였다. 도서관의 하루하루를 다르게 만들어주었던 사람은 상원 씨였다.

상원 씨는 어린이실에서 일하는 지체장애인이다. 상원 씨는 덩치도 크고 키도 큰 편이라 상원씨가 책을 한 줄로 일렬로 높게 들고 걸어가는 것을 보면 굉장히 든든해지곤 했다. 첫 일주일 동안 책 꽂는 일을 힘들어했던 나는 상원 씨가 오기만 하면 30분이면 사라지는 책들을 보며 감탄했다. 그리고는 상원 씨가 어떻게 책을 꽂는지, 어떤 방식으로 작업하는지 유심히 살펴보았다. 상원 씨가 책 꽂는 방법을 보고 그대로 따라 하니 금방 책을 다 꽂을 수 있었다. 그 뒤로는 일하는 게 훨씬 편해졌다. 상원 씨는 꽂을 책이 없으면 책상에 앉아 흰 종이 위에 빽빽하게 무언가를 써넣었다. 그것은 지하철역 이름과 버스정류장의 이름이었다. 상원 씨는 모든 역의 순서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쓸 수 있었다. 내가 책을 같이 꽂으려고 하면 내가 꽂을 거예요!’라고 말했다. 처음에는 상원 씨가 화를 내는 줄 알고 놀랐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상원 씨도 내가 일을 뺏는 것이 아니라 할 일을 할 뿐이라는 걸 알게 된 것인지 책에 손을 대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상원 씨는 2월 달이 되고 얼마 안 있어 직장을 옮기게 되었다. 갑자기 소리를 지르거나, 노래를 부르는 일이 많아지더니 나중에는 퇴근시간이 되어도 도서관을 떠나지 않았다. 이러한 일들이 문제가 되어서 상원 씨는 도서관을 나가 다른 일을 찾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사서 선생님들은 안쓰러워했지만 어린이실인 만큼 덩치 큰 상원 씨의 그러한 행동이 아이들에게 위협적일 수 있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상원 씨가 어린이실을 떠난 날, 나와 다른 사서 선생님들은 남은 책들을 마저 꽂았다. 상원 씨를 제일 오래 봐온 선생님은 상원 씨가 책은 정말 잘 꽂았다고 말했다. 상원 씨가 가고 나서 다른 도서관에서 일했던 윤이가 왔다. 윤이는 나보다 두 살 어렸는데, 나를 잘 따랐다. 나는 상원 씨가 책을 꽂던 방법을 윤이에게 전수해주었다. 일을 할 수 있다는 게 무엇일까? 상원 씨는 자기 일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찾는 것 같았고, 윤이는 월급으로 자기가 사고 싶은 것에 대해서 말해주었다. 나는 밥벌이를 스스로 하고 싶었다. 내가 좋아하는 김승일 시인이 쓴 시 <나의 자랑 이랑>에서 시인은 일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일을 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네가 일을 할 줄 안다는 것이./이상하게 생각되는 날이면, 세상은 자주/이상하고 아름다운 사투리 같고. 그래서 우리는 자주 웃는데라고. 윤이랑 나는 눈을 마주치면 자주 웃었다. 어느 날은 꽂을 책이 많아서, 어느 날은 꽂을 책이 없어서. 우리는 서로의 일의 고됨을 이해했다.

 

2. 선생님이 되고, 선생님을 만나고.

 

도서관에서 일하는 세 달 동안 나는 선생님을 만나기도 했고 나 자신도 선생님으로 지냈다. 어릴 때부터 좋은 선생님들을 많이 만났고 고등학교 때도 후배들에게 글에 대한 첨삭을 해주거나 세미나를 하면서 내 생각을 누군가에게 알려준다는 게 즐거웠다. 어린이실에서 독서교실을 연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솔깃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독서교실은 하나의 주제를 정해 그 주제와 관련된 책을 읽고 강의를 듣는 형식이었다. 운이 좋게도 일손이 부족해서, 나는 독서교실에 보조 선생님의 역할로 가끔 따라갈 수 있었다. ‘사서라는 직업이 단지 도서관에만 국한된 게 아니라 다른 많은 일도 같이 하고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독서교실을 여는 것 외에도 대중강좌를 열기 위해 책의 작가들을 초빙하기도 하고, 시문학회와 같은 동호회를 만들어 주관하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서 선생님들은 시간이 날 때마다 내게 도서관에서 하는 일에 관한 이야기해주셨다.

진짜 선생님은 아니었지만, 아이들에게 선생님이라고 불리니 선생님이 된 것 같았다. 글쓰기나 만들기가 서툰 아이들을 도와주면 아이들은 내가 대단한 것이라도 해낸 것처럼 감탄했다. 찾기 힘든 책을 찾아주기도 했다.

근로장학생으로 일하면서 좋았던 점은 아르바이트생으로 일할 때와 다르게, 학생이라는 신분으로 일하는 것이기 때문에 주위 분들이 많은 것을 조언해준다는 점이었다. 완전히 직원과 고용주로 만나는 관계와는 다르게, 근로장학생과 근로지담당자로 만나기 때문에 나로써도 직업에 대해 궁금한 것을 더 자유롭게 물어볼 수 있었다. 도서관에서 틈틈이 영어를 공부했는데 새로 오신 사서 선생님이 공부하는 방법을 알려주시기도 했다. 영어학원을 다니지 않는 나는 직접적으로 영어에 대한 조언을 얻을 수 있었다.

 

3. 복 받은 아이

어릴 때부터 나는 나라에서 지원을 받는 학생이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급식비를 지원받았고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는 컴퓨터를 무료로 받았고, 장학금을 받아서 학교에 다녔다. 그러한 혜택이 줄 때마다 엄마는 나한테 복이 많은 아이라고 했다. 그리고 받은 복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줄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어서인지 나는 혜택을 받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 없었다. 그러다가 고등학생 때 처음으로 내가 나를 보는 시선이 아닌 타인이 나를 보는 시선을 만났다. 같은 반 아이가 기초생활수급자들은 자신들이 내는 돈으로 학교에 다니는 것이 아니냐고 말했을 때 나는 처음으로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구나.’ 싶었다. 그 생각이 먼저 들었고, 그 뒤에 그 말이 기초생활수급자 아이들을 폄하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을 때 화가 났다. 하지만 그 뒤로도 내가 낮은 소득의 가정의 아이라는 것보다 운 좋은 애, 엄마 말대로 복 받은 애라고 생각해서 부끄러운 감정은 들지 않았다. 그래서 성인이 되어서는 오히려 내 상황에서 얻을 수 있는 혜택을 더 찾아보았고 되도록 그 혜택들을 활용하려고 했다.

스무 살이 넘어서는 당시에 엄마가 큰 빚을 지고 집에 들어올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내 밥벌이는 내 손으로 해야 한다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들었다. 그랬기에 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근로장학생을 신청했다. 밖에서 하는 아르바이트보다 훨씬 높은 시급에도 불구하고 근로를 하면서 남는 시간에는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나는 학과 공부를 하거나 책을 읽었고 자투리 시간을 잘 이용한 덕분에 성적 장학금을 탈 수 있어서 학비에 대한 걱정도 줄어들게 되었다. 공부에 필요한 돈을 스스로 벌어야 하고, 생활비가 필요한 학생이라면 그러한 환경을 역이용해서 활용할 수 있다. 정해져 있는 환경을 내가 가지고 있는 하나의 열쇠로 본다면 나갈 수 있는 문이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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