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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저번 달에 고모가 돌아가셨다. 고모는 아버지보다 6살 많으신 76세였다.

  3살 무렵에 한국으로 이민 온 후, 할머니의 장례식 때 이래로는 일본을 다시 방문한 일이 없었다. 그 조차도 벌써 10년이 넘게 지난 일이었다. 친가 분들을 못 뵌지도 그만큼의 세월이 흘렀다.

  부모님의 늦은 결혼으로 집안 통틀어 가장 막내인 내가 스무 살을 넘길 즈음부터 친척들의 소식이 하나 둘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대개는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더 늦기 전에 친척들의 얼굴을 한 번씩 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조의금을 전할 겸 일본에 있는 친척을 방문한다는 아버지의 말에 덜컥 따라나섰다.


  나름대로 엄숙한 마음가짐이었으나 십여 년 만에 고향을 방문한다는 생각에 조금은 들떠있었다. 고향이라고 해도 원래 살던 지역을 방문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친척들과 워낙 교류가 없어 일본에 친가가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릴 정도였으니 말이다. 내가 태어난 나라이자 아버지의 나라에 간다는 게, 나와 피가 조금이라도 섞여있는 사람들을 만나러 간다는 게 설레었다. 왜인지 요즈음 친척들 생각을 하면 조금 애틋해진다.

  일본에서의 기억이라고는 조각조각의 몇 가지 장면들 정도이다. 무척이나 기다란 놀이터의 미끄럼틀, 버려진 쓰레기 없이 깨끗한 도로, 나무로 된 이층집의 풍경그 기억 조각들 속에 흐릿하게나마 할머니의, 큰아버지의, 작은아버지의, 고모의 얼굴이 보인다.

  그 분들이 이제 하나 둘 떠나신다. 이상한 일이다.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것도 아닌데 그 분들은 세월을 더 많이, 온 몸으로 맞는 것 같다. 내가 어른이 되어가는 동안 그 분들은 점차 늙어간다. 내가 삶에 대해 고뇌하는 동안 그 분들은 죽음과 가까워진다. 나는 이제서야 겨우 주변을 둘러보는데 어른들의 세월은 느리고 서툰 나의 발걸음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

 

  인천 국제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나리타 공항에 도착한 후 제일 먼저 돌아가신 고모의 아들, 나의 사촌 오빠 되시는 분의 댁으로 향했다. 사촌 오빠라고는 하지만 나와 30살 이상 차이가 날 뿐더러 나보다 나이가 많은 딸도 있다. 사촌 오빠 댁에는 마침 사촌 언니 두 분도 방문해있었다. '사촌'이라는 단어가 어색할 만큼 초면에 가까운 분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나를 환영해주었고, 내게 관심을 보이며, 긴 문장을 구사하는 건 오랜만이라 조금 서툴고 느린 내 일본어에 귀 기울여주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 이런 게 '혈육'이라는 걸까? 피가 섞였다는 이유만으로 누릴 수 있는 맹목적인 환대가 싫지 않았다.

 

"유미는 지금 뭐하고 있어? 대학생이야?"

 

  왜일까, 재수를 하다가 포기하고 지금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하고 싶은걸 찾고 있어요, 라고 솔직하게 말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옆에 계셨기 때문일까.

 

"아르바이트 하면서 다시 공부하고 있어요.“

 

  라고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내 말이 진담인지 거짓인지 구분할 길이 없는 아버지는 아, 이 녀석 다시 마음먹었구나. 하고 뿌듯해하시는 얼굴이었다.

  안 그래도 비행기에서부터 지금이라도 대학을 가면 어떻겠냐고 계속 물어보시던 아버지였다. 솔직히 말해 아주 생각이 없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올해까지는 계획에 없는 일이다.

  오랜만에 만난 친척들 앞에서 아버지가 내세울 게 없는 것 같아 괜시리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기대가 많으셨던 아버지인데. 하지만 다행이 친척들은 내 학력에 크게 관심을 갖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나를 배려해준 건지도 모르겠다.

 

  친척들과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눈 뒤 큰아버지 댁으로 향했다. 예정보다 시간이 늦어져 댁에 도착할 무렵엔 밤이 다 되었다.

  십여 년 만에 뵌 큰아버지는, 다 벗겨진 머리가 번들거리고 목소리는 쇠약하였으나 80세라는 나이가 무색할 만큼 장난기 많은 분이었다. 무슨 말이든 한 마디라도 할 때 마다 꼭 말장난을 덧붙이셨는데, 아버지도 그런 말장난을 종종 하시던 게 생각났다. 역시 피는 못 속이는 모양이다.


  큰아버지는 지인이 운영하다 폐업한 가게를 사들여 그 곳에서 홀로 지내고 계셨다. 천막으로 된 1층 지붕에 'smile photo'라고 쓰여 있었다. 사진관 겸 담배 가게였다고 한다.

  1층은 전면 유리로 되어 있었는데, 커튼을 대충 둘러놓았으나 출입문이 있는 한쪽 면은 가리지 않아 밖에서도 안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복도처럼 가로로 길게 뻗은 공간에 소파와 테이블 몇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고, 벽면에는 가라오케 기계가 두 대 달려있었다. 듣자하니 가라오케에 쓰는 돈만 한 달에 3만 엔(한화로 치면 약 30만원)정도라 아예 기계를 사버리셨다나. 아무튼 일반적으로 떠오르는 ''의 모습과는 거리가 먼 구조였다.

  방 안쪽에는 화장실과 샤워실, 그리고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다. 계단을 올라가자 식탁이 놓인 작은 주방이 있었고, 그 옆에는 가로로 길게 늘어선 방 두 개가 나란히 붙어있었다. 그런데 방에 들어서자마자 먼지 때문에 숨이 턱 막힐 지경이었다. 오랫동안 청소도 환기도 하지 않은게 분명했다. 탁자에 회색 먼지가 쌓여있었고 유통기한이 지난 레토르트 식품이 여기저기에 방치되어 있었다.

  호텔을 잡아주겠다는 큰아버지의 말을 마다하고 아버지와 나는 온 집안을 뒤져 청소 도구를 찾았다. 작은 핸드 청소기와 빗자루가 전부였다. 그 청소기마저도 흡입력이 굉장히 약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먼지를 한 꺼풀 덜어내 줄 뿐이었다. 필터를 몇 번이나 청소해도 마찬가지였다.

  급한 대로 잠 잘 곳만 대충 청소하고 이불 펼 자리를 만들어 그날 밤은 그렇게 잠이 들었다. 큰아버지는 가장 안쪽 방에서 혼자 주무셨는데, 내내 기침이 끊일 줄을 몰랐다.


  다음 날 아침, 큰아버지는 출근하시고 아버지도 외출 하셔서 나 혼자만 집에 남았다. 열쇠도 없고 길도 모르니 밖을 돌아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고, 어제 못 다한 청소나 마저 할 요량으로 창문을 열었다. 한 쪽 창은 주차장과 맞닿아 있고 반대 쪽 창은 찻길 쪽으로 나 있었다. 나 원, 환기를 시키기도 쉽지가 않다.

  밤 동안 계속 기침을 하셨던 게 신경 쓰여 큰아버지가 주무시는 방을 살펴보자, 아니나 다를까 상태가 심각했다. 타일식 카페트 바닥을 빗자루로 쓸어낼 때마다 먼지가 데굴데굴 굴러 나왔고 창틀에는 새까만 먼지가 쌓이다 못해 눌러앉아있었다. 큰아버지는 기침이 나오는 게 꽃가루 알레르기 때문이라고 하셨지만, 이런 환경에서 기침이 안 나오는 게 이상할 지경이다.

  쓸어도 쓸어도 계속해서 나오는 먼지를 몇 번이나 다시 쓸어내고 새까만 창틀을 걸레로 닦아냈다. 이 방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홀로 잠을 청하셨을까. 매캐한 공기에 마른기침이 나왔다. 코끝이 찡하게 아렸다.

 

  큰아버지는 몇 년 전에 직장암에 걸리셨는데, 암세포가 폐로 전이되어 폐의 3분의 1정도를 떼어내는 수술을 받으셨다고 한다. 연락을 자주 주고받지 못하시는 아버지는 모든 수술이 끝난 뒤에서야 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고모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다. 고모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은 바로 전해들었지만, 돌아가시기 몇 해 전부터 이미 희귀병으로 몸 져 누워계셨다고 한다.

  늙고 병든 형제들을 고향에 남겨두고 타향살이를 하는 아버지는 어떤 심정일까. 간간히 걸려오는 전화를 받는 것도 이제는 편치만은 않으실 것이다. 무소식이 희소식인지도 모를 연세들이시기 때문에

 

  그 날 낮에 아버지와 나는 일본 구경을 좀 하다가, 저녁 때 즈음 돌아가 큰아버지와 함께 근처 편의점 도시락을 사다 먹었다. 일본의 편의점 도시락은 웬만한 음식점에서 사먹는 만큼이나 질 좋고 맛있었다. 그런데 큰아버지는 그런 것도 잘 모르셨던 모양이다. 편의점 도시락은 처음 드신다고 하셨다. 맨날 똑같은 레토르트만 드시지 말고 가끔은 도시락도 사드시면 좋으련만

  식사를 하면서, 큰아버지는 아주 익숙한 듯 가라오케 기계를 켜셨다. 그리고는 흘러나오는 반주에 맞추어 콧노래를 흥얼거리셨다. 식사를 마친 나는 아는 노래를 찾아보려 리모컨을 만지작거렸다. 한국 곡들이 꽤 많이 들어와 있었다. 고심 끝에 에일리의 '보여줄게'를 불렀다. 큰아버지는 잘 부른다며 웃으셨다.


  조촐한 저녁 식사가 끝나고 큰아버지와 아버지는 먼저 2층 방으로 올라가 주무셨다. 나는 1층에서 글을 조금 쓰다가 올라갔는데, 큰아버지는 간간히 기침을 하셨지만 전날보다 편히 주무시는 것 같았다.

  아버지보다 일찍 한국에 돌아가기로 한 나는 그 날 밤을 마지막으로 입국 채비를 했다. 제대로 작별 인사를 나눌 새도 없이, 큰 아버지는 나에게 주실 용돈만 남기고 출근하셨다.

  준비 없이 워낙 빈손으로 와서 드릴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댁을 나서기 전 서툰 일본어 쪽지를 식탁위에 써 붙여 놓았다.

 

  공항에서 아버지와 헤어지고 비행기에 탔는데, 큰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왔다.

 

"신세를 졌습니다. 감사합니다."

 

  큰아버지는 내가 남겨둔 쪽지를 소리 내어 읽으시고는, 일본어를 참 잘 한다며 칭찬해주셨다. 쪽지만 달랑 남기고 나온 게 내심 마음에 걸렸는데, 수화기 너머의 큰아버지는 웃고 계셨다. 아주 행복한 듯이.

 

"다음에 또 오렴."

", 꼭 갈게요. 건강하세요."

"그래."

 

  흔한 안부 인사를 주고받는데도 가슴이 먹먹해졌다. 오가는 말 몇 마디에 얼마나 깊은 진심이 담겨있는지 알기에

  가까운 이웃나라 일본에 한 번 가는 일이 왜 이리도 어려웠을까. 다시 한 번 고향 방문을 하게 될 날을 기약해본다. 그 때 까지 부디, 건강히.






상처를 대하는 법

 

  내 몸이 다치는 데에 무신경한 편이다. 조심성 없이 행동하다가 종종 여기저기에 부딪히고, 베이고, 데인다.

  얼마 전 곱창집에서 손님 테이블에 나가 밥을 볶고 있을 때였다. 반찬그릇을 살짝 옮기려다가 불에 달궈진 철판에 손등이 닿았다. ", 뜨거!" 반사적으로 작은 신음이 튀어나왔지만, 손님들 앞이었던 터라 얼른 밥을 마저 볶고 테이블을 빠져나왔다.

 

괜찮아? 흐르는 물에 좀 대고 있어.”

에이, 별 거 아니에요.”

 

  기껏 한 몇 초 정도 물에 쓱 씻어내고 말아버렸다. 뭐 좀 뜨끔뜨끔 거리기는 하는데 참을 만 하네, 하면서. 잊을 만 하면 자신의 존재를 피력하기라도 하듯, 일 하는 중간중간 한 번씩 데인 자리가 화끈거린다. 퇴근시간이 되어서야 다시 쳐다보니 볼록하게 물집이 잡혔다.


 며칠이 지나도록 가라앉지 않는 물집이 꽤나 불편하다. , 이거 안 되겠는걸. 물집을 톡 터뜨린다. 주륵, 진물이 나온다. 이제 좀 덜 신경 쓰이나 싶었더니, 물집이 나있던 자리의 피부가 벗겨진다. 아야. 물에 닿거나 어디에 스칠 때마다 쓰라리고 아프다.

  반창고를 붙여놔도 손을 움직일 때마다 자꾸만 달랑거리며 떨어진다. 거 참, 딱지가 앉을 때 까지는 별 수 없겠구나. 설거지 할 때면 따끔, 뭐가 닿거나 부딪히면 또 따끔그렇게 며칠을 지내다 보니 동그란 딱지가 앉았다

 그 때부터는 또 얼마나 간지러운지. 참다 참다 딱지를 손톱으로 떼어낸다. 채 아물지 않은 살갗이 또 아린다. 바보같이. 다시 딱지가 앉는다. 그러다가 간지러우면 또 긁다가몇 번을 반복하고 나면 딱지가 생기는 대신 둥그런 모양으로 흉터가 남는다. 하얀 손등 위 적갈색의 흉터를 바라보는 기분이 썩 좋지 않다.


 다치는 건 한 순간인데 상처가 아무는 데에는 한참이 걸리고, 아문 뒤 흉터는 그보다 훨씬 오래도록 내 살갗 위에 자리 잡고 사라져 주지 않는다. 갖가지 흉터로 얼룩덜룩해진 팔을 내려다보며 그제야 생각한다.

  상처가 날 때의 아픔만 참아내면 괜찮은 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구나. 상처가 생기고 나서 신경을 쓰고 공을 들이지 않으면 쉽게 낫지 않을 뿐더러 짙은 흉터가 남는구나. 오랜 시간에 걸쳐 조금씩 옅어지고 옅어지는 흉터로 남아, 그것이 눈에 들어올 때마다 그 곳에 자리했던 상처를 떠오르게 하겠구나.

  그래, 이제부터는 애초에 다치지 않게 조심해야겠다. 조심 또 조심하다가도 만약 다치게 된다면 더 신경을 써주어야겠다. 상처가 빨리 아물 수 있도록, 흉터가 오래 남지 않도록.






최유미 rubato_kki@naver.com 010-4869-4820

  • profile
    korean 2019.04.30 21:45
    수고 많으셨습니다.
    더욱 분발하시면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늘 건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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