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4차 창작콘테스트 수필공모 - <Or You Live Long Enough> 외 3편

by 20jkim2 posted Apr 10,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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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 You Live Long Enough

난 항상 겁이 많았다. 

그래서 하고 싶은 것도 많이 못했고, 욕도 많이 먹었다. 그러나 나는 끝까지 겁이 많았다.

언제나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 무어냐고 물으면 나는 높은 곳이라고 대답했다. 오래 전부터 나는 높은 곳을 무서워했다. 그리하여 유리 계단을 오르지 못하고, 육교를 건널 때면 가운데로만 걸어다녔다. 

그러다 어느 날, 학교에서 "가장 두려운 것"에 대하여 말하라고 하는 시간이 있었다. "가장 두려운 것." 그 말이 그렇게나 추상적이고 어색한 말이었다니.

그래서 생각했다. 

당연히 처음 든 생각은 "죽음" 이었다.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가.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죽는다는 것은 나에게 너무나도 추상적인 개념이었다. 그렇게나 먼 개념은 나에게 현실감이 없었고, 현실감이 없어지는 순간 그것에 대한 공포도 그와 함께 너무나도 멀게 느껴졌다. 

그 다음 생각난 것은 잊혀지는 것. 잊혀지는 것은 조금 더 가까웠다. 하지만 아직도 손에는 잡히지 않는 개념이었다. 손가락 끝에 걸릴락 말락, 하지만 확 잡히는 것은 아니었다. 

내 차례가 오기엔 아직 두명이 남았을 때, 나는 서둘러 마지막으로 생각난 공포를 써내려갔다. "내가 싫어하는 내가 되는 것"이었다. 

"Either you die a hero, or you live long enough to see yourself become the villain." "사람은 영웅으로 죽거나, 자신이 악당이 되는 것을 볼 때까지 산다." 내가 뽑는 최고의 배트맨 (사실상 조커가 주인공이지만) 영화, <다크나이트>에서 나오는 말이다. 배트맨의 집사 알프레드가 배트맨 브루스 웨인에게 하는 조언이자 경고였다. 

나는 한때 빨리 죽고 싶다고 생각했다. 우울해서도, 힘들어서도 아니라, 너무 오래 사는 것이 더 아플까봐. 그럴바엔 원할 때 죽고 싶었다. 그래서 빨리 죽겠다고 했다 (물론 빨리 죽는다는 게 60대나 70대를 의미하긴 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빨리 죽는다니 뭔 말도 안되는 소리를 지껄였던가. 

그 어리석음을 깨닫고도 지금의 난, 내가 정한 순간에 죽고 싶다. 의미 있는 날, 평화롭게, 고통 없이.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란 내가 그토록 혐오했던 존재가, 내가 되는 것이다. 그 공포가 처음 떠오른 이유는 내가 그런 존재가 되간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내가 그토록 싫어했던 양면적인 사람, 속물적인 사람, 늙은 사람, 고통에 찌든 사람, 외로운 사람이 되가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악당이 되는 모습을 볼 때까지 살고 싶지 않다.


별일 없이 산다

나는 오래전부터 <장기하와 얼굴들>이라는 밴드의 팬이었다. 초등학교 때 차 안 라디오에서 <싸구려 커피>라는 노래를 듣자마자 그 음악에 빠져버렸다. 음악이 끝날 때 나오는 가수의 이름을 듣기 위해 귀를 기울였고, 그 순간 진행자가 <장기하와 얼굴들>이라는 이름을 불렀다. 

<장기하와 얼굴들>은 직설적이면서도 유쾌한, 그러면서도 또 무게감 있는 노래를 불렀다. 몇몇 노래는 슬펐고, 또 몇몇은 웃겼다. 

<장기하와 얼굴들>은, 2019년 새해가 밝은 날 해체했다. 2018년 12월 31일, 마지막 콘서트를 보고 난 뒤 해체하였다. 그때 마지막 노래는 <장기하와 얼굴들>의 트레이드마크라고 볼 수 있는, <별일 없이 산다>였다.

그 노래는 전 연인에게 나는 별일 없이 살고 있다, 걱정해줄 필요 없다, 같은 내용이 아니라 내가 별일 없이 사는게 어이없지? 헤어져도 이렇게 살 수 있다는 게 가능한 줄 몰랐지? 즈음 되는 말을 늘어놓는다. 

그 노래를 듣고 나면 후련하다. 마치 실존하지 않는 분노의 대상에게 복수하는 듯한, 폐에 시원한 바람이 휭 부는 듯한 후련함이 든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까지 별일 없이 산다는게 놀라워야 하는 건가, 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만큼 우리가 사는 세상은 별일 없이 살기 힘든 세상이다. 



아마도

나는 "모순"이라는 단어를 참 좋아한다. 

어떤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가 분명 있는데, 그 단어가 그러한 내포된 의미를 스스로 거부하는 듯. 그런데도 그 스스로의 의미를 거부하는 그 행위 자체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모순이다. 

내가 바로 그러하다. 

 모두가 그러할 것이다. 모두 어딘가엔 모순적인 검은 구석이 있다. 다이어트를 한다면서 운동은 하기 싫어하는 사람부터, 시험을 못 봤다고 불평하면서 더 열심히 공부할 생각은 안하고 컨디션이 안 좋았다는 둥, 시험이 너무 어려웠다는 둥 핑계를 대는 사람까지, 모두 약간은 모순적이다. 

나의 그러한 모순은 확신과 불신 사이에 있다.

나는 항상 한두개의 신념은 가슴에 품고 살아왔다. 그게 YOLO가 됐든, 후회없이 살자는 것이 됐든, 나는 내가 살아가면서 꼭 지키겠다고 약속한 것들이 있었다. 확신했다. 꼭 그렇게 살아야겠다고. 

그런 나는 항상 애매모호하게 서있다. 너무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게, 미지근하게 살아왔다. 솔직히 무언가에 너무 확신을 가지고 사는 것이 무서웠던 것 같다. 혹시라도 내가 틀렸을 것이라는 일말의 가능성 때문에 나는 절대로 확신을 하지 못했다.  

하는 말끝마다 "아마?" 라는 말을 붙이고 "그렇지 않나?" 라는 말로 내 의견을 표현했다. 내가 틀렸을 것의 대한 두려움이 나를 흔히 말하는, 줏대 없는 사람으로 만든 것이다. 

또 그런 반면 온갖 확신이 선 척은 다하며 살아왔다. 나는 내성적인 사람이야. 나는 집에서 노는 걸 좋아해. 나는 한국에 있기 싫어서 미국 유학 가는 거야. 나는 현실적인 사람이야. 라며. 

근데 이젠 잘 모르겠다. 

내가 내성적이라고 하기엔 사람들과 있는 걸 좋아하고, 집에서 노는 것을 좋아하기엔 밖에서 야구 하는 것을 좋아한다. 한국에 있기 싫어서 미국 대학을 가고자 하는 것도 사실 아니다. 그러기엔 너무 미국에서 공부하는 것에 대한 걱정이 많이 된다. 가끔은 그냥 미국 진학을 내려놓고 한국 대학을 가는 게 더 편하다고 생각할 때도 있다. 현실적이라고 하기에 나는 너무 현실에 무지한 사람이다. 

이러한 애매함 속에 내가 확신이 있는 척하며 살아가는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다. 내가 나를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기엔 아직 좀 무서워서,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한순간에 모두 포기하기엔 무서워서, 나는 확신이 선 체를 하며 살아간다. 그러면 언젠가는 그 확신이 진짜로 설까봐. 

나는, 확신을 세우기 무서워서 확신을 세우지 않는데 그 확신을 세우지 않는다는 것 자체도 무서워서 확신이 선 체하며 살아가는, 

모순적인 사람이다.

나는 "모순"이라는 단어를 참 좋아한다. 

어떤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가 분명 있는데, 그 단어가 그러한 내포된 의미를 스스로 거부하는 듯. 그런데도 그 스스로의 의미를 거부하는 그 행위 자체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모순이다. 

내가 바로 그러하다.

아마도.



글을 쓴다는 것

당연한 말을 당연하지 않은 것처럼 쓰는 것, 그게 바로 글을 쓴다는 것이다. 

물론 놀라운 정보를 주고, 새로운 사실을 알게 하는 글들도 있겠지만, 내가 쓰는 이러한 글들은, 결국 당연한 말을 당연하지 않은 것처럼 말하는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뇌를 쥐어짜고 쥐어짜면 나오는 뇌의 파편들과 핏덩이와 살점들이 종이에 흩뿌려지는, 잔인한 행위이다. 

그러기에 나는 글을 쓴다. 

내 뇌 속에 있는, 그 중에서도 깊고 어둡고 축축하고 더러운 구석에 쳐박혀 있는 검붉은 핏덩이들과 살점들을 내 손으로 직접 도려내기에는 너무 고통스럽기에 나는 펜으로 내 검붉은 살점들을 살포시 도려내어 종이에 덕지덕지 붙인다. 그 살점 중 몇 개는 종이에서 떨어지지만, 몇 개는 달라붙는다. 그 살점들의 피가 종이에 번져 종이가 축축하고 검붉은 뭉텅이가 됐을 때, 나는 비로소 나만의 글이 완성된다고 생각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그냥 속에 있는 생각들을 글로 쓴다는 것이다. 이렇게나 당연한 말을 당연하지 않은 말인 것처럼 써봤다. 

하지만 글쓰기가 진짜 어려운 이유는, 그 당연한 말을 당연하지 않은 말처럼 썼을 때 이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내 두뇌를 남의 몸에 이식한다고 나의 모든 생각이 그에게 전달되지 않는 것처럼, 글을 쓴다고 해서 그 의미가 정확하게 전달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문장들이 있다. 작가가 하고 싶었던 응고된 핏덩이 하나를 툭. 던져놓은 듯한 그런 문장들이 있다. 하지만 핏덩이를 갖다 던진다고 종이에 달라붙는 것은 아니다. 워낙에 점성이 뛰어난 핏덩이면 종이에 달라붙, 아니 종이가 가서 달라붙다시피 하겠지만, 현실은 그 핏덩이의 무게로 인해 종이가 찢어져, 그 핏덩이는 종이를 통과해버리는 일이 다반수다. 

그런 문장들을 쓰고 나면 작가는 순간 후련하다. 뇌 속에서 커져가던 암세포를 떼어내고 나니 머리 속이 시원한 것이다. 하지만 독자는 이 암세포를 보는 순간 생각이 뒤죽박죽이 되어 뭐가 뭔지 상황 분별을 못하다가 결국엔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하지 못해 책을 놓아도 찝찝한 상태가 된다. 

심지어는 작가에게도 이 암세포는 더 큰 암세포를 키우는 원흉이 된다. 자기 생각을 그대로 적었는데 언젠가 뒤돌아보면 그 문장을 무슨 의미로 적은 건지 도통 이해가 안되는 순간, 거대한 암세포가 뇌 속 혈관을 짓누르고 머리를 아프게 한다. 

당연한 말을 당연하지 않은 말처럼, 그러면서도 그 말하고자 하는 당연한 말이 전달은 되도록 해야하는 것이 글쓰기다. 당연한 말과 당연하지 않은 말 사이에는 거리가 있다. 그 거리는 작가마다 다르다. 어떤 작가는 그 둘 사이의 간격을 최대한 늘어뜨려 한번 읽어서는 이해가 되지 않게, 그런데도 이해가 될락말락하게 하여 다시 그 문장을 읽게 만드는 반면, 또 어떤 작가들은 그 둘 사이의 간격을 없애 극강의 솔직함으로 독자들을 매료시킨다. 

하지만 결국 당연한 말과 당연하지 않은 말 사이의 완벽한 간격은 독자에 따라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쓰는 것이 인간 관계와 가장 유사한 행위라는 결론을 내렸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가장 완벽한 거리를 찾기 위해 나는 여러가지 시도를 하며 살아왔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나의 가장 깊은 속을 보여주며 살았고, 어떤 사람들과는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 배운 것이 있다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가장 완벽한 간격이라는 것은 없다는 사실이었다. 너무 가까이 가면 서로 밀어내게 되고, 너무 멀어지면 다시 가까워지고 싶어하게 되었다. 

그토록 당연시했던 누군가가, 당연하지 않은 존재가 되어버릴 때가 있다. 그때는 그 존재가 이해가 안 될 때가 많다. 그토록 당연했던 것이, 당연하지 않은 것이 되었을 때, 독자인 내가 아닌 작가인 그 누군가를 탓하게 될 때가 있다.

그래도 나는 그 작가의 글이 좋기에 다시 가까워지기 위해,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그땐 이미 너무 늦다. 나는 그 누군가에게 내 응고된 핏덩이를 떼어내 건네주어도 그 핏덩이는 그 누군가를 뚫고 지나가버려 나에게도, 그 누군가에게도 작지만 큰 구멍을 남긴다. 

글쓰기가 진짜 어려운 이유는, 당연한 말을 당연하지 않은 말처럼 썼을 때 이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당연한 말과 당연하지 않은 말 사이의 간격은, 독자가 정하는 것이다. 작가에게 그 말이 어떤 커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독자가 이해하지 못하면, 그 문장이 담긴 책 전체가 몇백 장의 종이 쪼가리로 남는다. 

글을 쓴다는 것은 뇌를 쥐어짜고 쥐어짜면 나오는 뇌의 파편들과 핏덩이와 살점들이 종이에 흩뿌려지는, 잔인한 행위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글을 쓴다. 



이름: 김진현
전화번호: 010-2046-0612
이메일: 20jkim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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