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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리

 

 

  대학 3학년의 어느 날 오후, 보도블럭을 깨서 짱돌을 만들던 나는 지랄탄에 이리저리 쫓기다가 어렸을 때부터 한 번도 일등을 놓치지 않으며 단련시켜 온 달리기 실력을 뽐내며 쏜살같이 대학 깊숙이 자리잡은 농과대학 쪽으로 피신을 했다. 나는 이미 최루탄 연기로 매캐해진 화장실로 숨어들어 콧물을 질질 흘리며 따가운 눈시울을 닦아내기에 여념이 없었으면서도 소리는 내지 못했다. 혹시 무자비한 사복경찰, 일명 짭새가 기침 소리나 거친 숨소리를 듣고 문을 박차고 들이닥칠지도 모를 일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주변이 조용해지자 나는 몸을 부르르 떨고는 화장실 밖으로 걸어나왔다. 급하게 뛴 탓인지, 아직도 다리가 후들거렸다. 세면대 앞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은 생쥐보다 더 빙충맞아 보였다. 아직도 얼굴이 따가웠기에 세수를 한 다음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다음 손목을 올리는 순간, 나는 화들짝 놀라 엉덩방아를 찧으며 망연자실하여 주저앉았다. 아침에 분명히 차고 나온 시계가 손목에 매달려 있지 않았다. 정신없이 돌을 깨고 걸음아, 날 살려라.’ 하며 뜀박질하는 사이, 빠져나간 모양이었다. 시위가 있을 때로는 다치거나, 부러지거나, 약간의 피를 보는 일은 다반사요, 옷이라도 적들의 손에 잡힐라치면 벗어던져야 할 판이었기 때문에 아깝기는 해도 머리핀, 귀걸이, 반지 등속의 장신구가 떨어져나가는 일쯤이야, 검센 남자의 손아귀에 끌려가 구타를 당하는 것에 비하면 정말이지 천만다행한 일이라 여기고 액땜한 셈 치고 덤덤하게 받아들이기 일쑤였다. 그러나 나에겐 그 무엇보다 값진 의미가 담긴 물건이었기에 그려려니 치부하고 넘길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허둥지둥 정신없이 인근을 샅샅이 뒤졌으나 시계는 오리무중이었다.

  518 광장까지 가려면 지름길로도 20여 분 남짓 걸어야 했고, 시계를 찾지 못한 데서 오는 허탈감이 너무나 컸기에 이것저것 다 성가시기만 하여 나의 모교인 사대부고 울타리에 난 쪽문, 일명 개구멍으로 빠져나가 대학 후문 쪽에 있는 자취방으로 돌아가 눕고 싶은 생각이 그야말로 굴뚝같았다. 그러나 집회 후에는 반드시 학회별로 모여서 그 날의 성과를 비판, 반성, 다음 투쟁의 대책 등을 논의해야 했기에, 무엇보다 오늘의 불참이 불러 올 파장이 만만치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기에, 나는 걷는 내내 도살장에 끌려가는 황소보다 못한, 비루먹은 똥개 심정이 되어야만 했다. 다행히 비는 차가운 기운만 남기고 사라진 뒤였다.

  1년 전 광주 시내에서 518 진상규명을 외치며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을 때도 고등학교 졸업 기념으로 받은 비싼 시계를 잃어버렸다. 그 날 오후 나는 사복경찰에게 쫓기다 어딘지 모를 높은 담장을 뛰어넘고, 좁은 골목길을 에돌아 아무 데나 문이 열려 있는 집으로 뛰어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숨을 헐떡이며 누워있었다. 숨이 고르게 쉬어질 즈음, 한 여자가 이불을 들추고는, 씹고 있던 껌을 내 이마에 붙이더니, “, 이년들아, 느그들이 암만 지랄을 떨어도 가진 놈들은 눈썹 하나 까딱 안 헌다. 우리 몸 팔기만 성가신께 작작들 혀라이?” 한다. 나는 프로레타리아적 순수함을 짓밟히는 듯 하여 모멸감을 느꼈지만, 문득, 그 여자는 나의 데모의 목적인 무산계급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죄송하다며 거듭 인사를 하고 나왔다. 거리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한가했다. 시간이 꽤 흐른 모양이라 해가 그 마지막 빛을 발하며 서산에 걸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나는 습관적으로 손목을 올렸으나 시계가 없었다. 우선 창녀촌이 의심스러웠으나 거기 가서 시계의 행방을 물은들, 숨겨 준 은공도 모르는 년이라고 침뱉음을 당할 게 뻔했다. 나는 건성으로 그 자리에 선 채 삼백육십도로 회전을 하며 시멘트 바닥을 훑어보는 것으로 시계 찾기를 끝냈다. 그리고 곧 그 비싼 시계는 깨끗하게 잊혀졌다. 아닌 게 아니라, 학기 초에 운동권 선배들이 마련한, 막걸리 집에서 선배들은 그 시계가 브르주아 계급을 대변하는 양 치부하며 프로레타리아 계급의 덕목인 단순, 소박, 검소 등을 강조했더랬다. 그래서 한동안 안 차고 다녔었는데 차라리 잘 되었다 싶었다.

  나는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그 시대에는 드물게 남녀공학인 국공립 학교를 다녔다. 하여 다른 여학생들과는 달리 남학생과 어울려 노는 일은 해가 뜨고 지는 일 만큼이나 자연스러웠다. 아버지한테 어깃장을 놓느라 시작하였다고는 하여도 어렸을 때부터 오빠, 남동생과 어울려 놀아야 하다 보니 환경적으로도 지극히 당연한 결과여서 나는 남자라면 다 아버지 같이 환멸스러운 족속이려니 생각하게 되어 애초부터 남자에 대한 환상을 가질 생각조차 할 필요가 없었다. 중학교 때 사춘기를 겪는 또래들이 더러 연애 편지랍시고 유치찬란한 짓거리를 벌일 때도 나는 왼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3 , 학생회장이었던 친구가 나에게 연애 편지를 건네려다가 미친 놈소리를 듣고 물러난 이후로는 누구도 나에게 들이대지 않았고, 나도 아쉬워하지 않았다. 사실은 눈먼 홀어머니와 두 여동생을 지극정성으로 보살피며 고학하다시피 생활하면서도 늘 웃고 공부도 잘 했던 오빠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그 오빠는 몸도 약하고,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아 이 년 늦게 학교에 들어가게 되어 나와 같은 학년으로 공부하게 되었다. 좀 이국적인 생김새로 이목구비가 시원시원한데다 키가 훤칠한 데다 입성이 깔끔하여 단정한 인상을 주었다. 당시 쌍꺼풀이 크게 져 있고 눈이 큰 사람은 소눈깔이라고, 튀기라고 놀림을 받았는데, 그 오빠는 화를 내는 법이 없어 바보처럼 씩 웃고 말았더랬다. 그러나 자존심이 강하여 대가없이 공짜로 얻어 먹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였는데 동네 행사 때, 우리들이 음식이 넘쳐난다고 가서 얻어먹자 해도 가지 않았고, 얻어다 주어도 나는 거지가 아니라며 받지 않았다. 물질적으로 가난하지만, 정신적으로 도도한 그 자세가 나는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다.

  일찍 돌아가셨으나 야학을 열어서 동네 아이들을 가르칠 정도로 교육열이 대단했던 나의 어머니의 영향력은 실로 컸다. 동생들을 뒷바라지하게 된 억척스런 나의 넷째언니는 어머니의 유지를 받들어 나에게는 물론 그 오빠에게도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그리하여 그 오빠는 인문계고로 진학하였다. 그 당시 백 여 명 남짓한 중학생 중에서 광주에 있는 인문계고에 진학한 학생은 선생 딸, , 그 오빠 셋 뿐이었다. 심지어 그 오빠와 나는 같은 학교에 배정되었다. 그 오빠는 공부를 잘 해 근로장학금을 받으며 학교를 다녔고, 매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비를 충당했다. 방학 때도 시골집에 가지 않고 공부에 전념했다. 나도 죽기 살기로 공부를 하느라, 같은 학교에 다니고는 있었어도 남녀가 유별한 데다 행여나 복도에서 남녀 학생이 만나 수작이라도 부릴라 치면 곧장 학생부로 끌려가 불륜을 저지른 죄인 취급을 받아야 하는 분위기였기에, 남녀합반은 더더욱 아니었기에, 오다가다 만나면 눈인사나 하고 지나치며 소 닭 보듯 2년을 보냈다. 그 오빠와 고3 때 서울대 준비반에서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공부는 뒷전이고 그 오빠가 공부하는 모습만 바라보기 일쑤였다. 그 오빠한테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나는 발로 찍어도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전남대를 가게 되었고 그 오빠는 서울대에 당당하게 합격했다. 대학 시험이 끝나자마자부터, 심지어 졸업식이 있는 날조차도 그 오빠는 학비를 벌 생각으로 공사장에 나가 벽돌을 져 날랐다.

  부모를 대신하여 동생들 기죽지 않게 하려고 입학식, 소풍, 체육대회, 졸업식 등등의 학교 행사는 물론 학교에서 하는 행사에는 어김없이 선생님들 음식을 바리바리 해다 바치면서까지 뒷바라지를 했던 넷째언니는 선교사의 말을 듣고 동생들을 미국으로 입양시켜 줄 수 있다는 사람과 선을 보고 결혼을 했다. 대신 시집가기도 포기한 둘째언니가 나와 남동생 둘의 뒷바라지를 하게 되었다. 고등학교 졸업식 날, 둘째언니는 한 번도 쉬지 않던 식당 주방장 일을 물리치고 졸업식에 참석했다. 비싼 시계를 졸업 선물로 준비하였다. 나는 그것보다도 졸업식에 참석하지 않은 그 오빠가 신경이 쓰였다. 그러나 자존심이 있지, 여자가 먼저 연락할 수는 없는 법. 진눈깨비가 추적거리던 날 밤, 드디어 연락이 왔다.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내가 다니게 될 대학의 연못 앞으로 나갔다. 불쑥 주머니에서 시커먼 전자시계를 꺼내 대학 입학 선물이라며 손에 쥐어주었다. 그때 그 오빠는 이런 말도 했다. 느네 집에서 내가 학교 다닐 수 있게 베풀어준 은혜의 백분의 일도 못 미치지만, 그것은 나중에 내가 잘 돼서 갚기로 하마. 서울 올라가기 전에 시간 되면 다시 만나러 올께. 그러더니 느닷없이 나를 꼭 한 번 끌어안아 주더니 내가 뭐라 얘기할 시간도 주지 않은 채 그 오빠는 눈 깜짝할 새에 사라져버렸다.

  대학 입학식을 두어 날 남겨 놓은 채, 그 오빠는 공사 현장에서 일을 하다가 무너지는 건물 더미에 깔려 숨을 거두었다. 그리하여 내가 받은 전자시계는 한 동안 보아줄 이 없는 책상 서랍 깊숙한 곳에서 숨을 쉬고 있었고, 졸업 선물로 둘째언니한테 받은 고급스러운 시계조차 한동안 나의 손목에 오르지 못했다. 나는 한동안 시간을 잊고 정신을 잃었다. 그러나 살아 숨쉬는 만물의 삶은 오래 계속되는 법이어서 시간의 쳇바퀴 안팎에서 해는 떴다가 지고, 달은 찼다가 기울었다. 나의 마음 속 세상은 때때로 겨울이 남기고 간 찬바람이 들러붙어 동토(凍土)였다가, 염전(鹽田)이었다가를 거듭했으나 시계는 멈춰도 시간은 흘러가는 세상 속에서 조금씩 녹기도 하고 묽어지기도 하여 그럭저럭 괜찮아지는 날들이 늘어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세월의 흐름 속에서 나는 그 오빠의 갑작스런 실종은, 인생무상이라 하였거늘, ‘인연의 덧없음때문이 아니겠냐며, 다소 현학적인 이유를 내세워 나를 위로하기도 하고, 유물론을 공부하며 시계라는 물질과 그 오빠의 죽음과의 연관성은 전혀 없다는 물질적 사고관을 내세워 나 스스로를 합리화시켰다. 그리하여 언니한테 받은 시계를 분실한 후,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아 한 동안 시계 없이 살다가 어느날부터 아무렇지도 않게 전자시계를 차게 되었던 것이다.

  길을 걷다 문득 나는 시계와 시간이 불가분의 관계가 아닌 것처럼, 시계와 자신과는 인연이 없는 것은 아닌가, 그 오빠한테 내 마음을 고백이라도 해 볼 걸 하는 아쉬움과 씁쓸함에 마음이 허해져, 518 광장에 가지 않아 선후배들 앞에서 자아비판을 당하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마로니에 숲길을 되돌아 나와 그 오빠와 만났던 봉지(鳳池)를 향했다. 대학의 정문에는 커다란 시계가 쉼 없이 시간을 돌리고 있었기에, 시간도 시계도 일부러 피하고 싶었다. 잠시 그쳤던 비가 다시 내렸다.

  그 오빠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후 어느 비오는 날, 나는 술에 취해 비 내리는 봉지(鳳池)를 꼭 봐야 한다고, 부축해 주는 친구들을 뿌리쳐가며, 연못으로 가서 고래고래 노래를 부르며 울다가 웃다가 밤늦도록 뒹굴며 실성한 사람 행세도 했다. 이후로 나는 무산계급의 벗인 양 술과 담배를 앞세워 억압적인 현실을 깨부수고 새로운 세상, 민주화된 세상, 평등한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외쳤다. 학과 공부는 죽은 지식이니 진정한 지식을 공부하기 위해 사회과학을 공부해야 한다며 독서 토론 동아리에 가입했다. 밤을 세워가며 토론도 하고, 시국을 성토하기도 하고, 지식인의 할 일을 고뇌하였다.

  내리는 비를 바라보다가 불현듯 동아리실에 가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거기에 그 시계를 두고 나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숨가쁘게 뛰어서 동아리실로 들어갔다. 여느 때처럼 그곳은 곧 있을 시위를 준비하기 위한 도구들이 널려 있어 어수선한 가운데 서너 명의 학생들이 탁자에 둘러 앉아 담배를 피우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회장은 누군가와 바둑을 두고 있었다. 모두 익숙한 풍경이었다. 나는 구석구석을 뒤지며 시계를 찾았다. 큰 소리로 혹시 내 전자시계 본 사람 해도 다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나는 회장한테 다가가, , 내 시계 주웠다는 사람 없었어? 하고 물었다. 아니? 하는데 회장 맞은 편에서 바둑을 두던 사람이 나를 바라보고 웃었다. 저 사람이 왜 웃지? 하는데, 인사해. 오늘 새로 우리 동아리에 들어온 복학생 동지야. 본명은 서로 밝혀서는 안된다는 거 알지? 오늘 평가회 겸, 신입 동지 환영식 있어. 나는 소 닭 보듯 가명으로 통성명을 하고 건성으로 악수를 하였다. 언뜻언뜻 보았을 때, 그 선배는 계속 웃는 얼굴이었기에, 나는 속으로 별 싱거운 사람 다 보겠다고, 운동권 학생의 진중함이 없다고,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이따 뵙겠습니다. 인사하고 나오려는데 야, 엉뚱이, 나 모르겠어? 하길래, 뒤돌아 그를 바라보다가 나는 숨이 멎을 뻔 했다. 그 사람이었다. 얼굴이 벌개진 채 나는 집에 일이 있어, 오늘 평가회는 못 가겠다고, 나중에 비판은 따로 받겠다 하고 서둘러 동아리실을 빠져 나왔다.

  4월 초에, 며칠 간 총장실 점거 농성을 마치고 나가 보니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다들 우산 없이 뛰어가고 있었다. 나는 후문 쪽으로 천천히 걸었다.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불쑥 검은 우산이 받쳐졌다. 20여 분을 걸으며 우리는 실명으로 통성명을 나누었고, 그 사람이 신방과 복학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봉지(鳳池)에 앉아 한참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 내가 시계를 들여다보며, 이제 집에 가야 할 시간이라고 했더니, 무엇을 하도록 정해진 시간은 없는 거라고, 인간의 주체적 의지에 따라 시간을 만드는 거라며, 그래서 나는 시간을 잊고 사는 남자라며, 맨손목을 들어보이며 씩 웃었고, 비 탓인지 웃음 탓인지 고향 오빠가 느닷없이 생각난 탓인지, 술이나 한 잔 사 달라 했고, 술에 취해 그 오빠 얘기를 횡설수설하다가, 선배님이 그 오빠를 너무 많이 닮아 기분 나쁘다는 얘기를 했던 것까지는 생각나는데 그 뒤로 어찌 집을 갔는지 생각이 안 난다고 친한 친구한테 털어놓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날, 그 사람의 동아리 가입 환영식이 상대 뒤 주점에서 치러졌다. 나는 이불을 뒤집어 쓰고 누웠으나 잠이 올 리 만무하였다. 못 간다고는 했지만, 나중에 자아비판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그 사람이 신경이 쓰여 안 갈 수도 없었다. 미루고 미루다가 나는 끝내 집을 나섰다. 내가 상과대학 뒷골목에 들어섰을 때 어김없이 이 집 저 집에서 젓가락 장단이며 투쟁가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우리 동아리가 가는 단골 아지트가 어디인 줄 알기에 나는 곧장 그리로 향하였다. 내가 들어섰을 때 술자리 끝판이라 선후배들 모두 이미 막걸리며 소주에 많이 취해 몸을 가누기도 힘들어 보였다. 그 사람에게 술 한 잔 따라 주며, 우리 동아리에 들어오신 것 환영합니다. 했더니, 취한 눈으로 나를 보더니, 씩 웃으며, 엉뚱이? , 그날 나랑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 했다. 내가 너 엎고... 나는 얼른 그 사람의 입을 막고 선배님 많이 취하셨습니다, 나가서 술 좀 깨고 오셔야 겠습니다 하며 그를 부축하기 위해 손을 잡았다. 거기, 그 사람의, 왼쪽 손목에, 검은 전자시계, 틀림없이 내가 시위 도중 잃어버린 것과 똑같은 시계가 그 사람의 손목에 둘러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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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선약수(上善若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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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즈음, 세상이 흉흉하다. 물리적 환경도 그러하려니와 정치적 상황도 좋지 않다. 아무도 책임지려 하지 않고,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의 얼굴에서도 여유 있는 웃음을 찾아 보기 힘들다. 나 또한 각박한 도시에서 가뭄 든 얼굴로 살아가기는 마찬가지다. 그래서 잠시나마 내 고향과 내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건조한 마음을 적셔보고 싶다.

  나는 , 무인도를 합해 1004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신안군 중에서도, 10개 남짓 되는 모든 동네의 사방 면적이 30정도에, 인구라고는 2,000명이 조금 넘는, 현무암 지대라 물이 고이지 않아 옛날엔 시루섬이라 불리웠던,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곳에서 태어나 대도시에 위치한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전까지, 그곳을 단 한 번도 떠나지 않고 살았다. 다섯 개의 크고 작은 산봉우리를 거느리고 있다 해서 붙여진 오산이라는 우리 동네에서 한 시간 여를 서쪽으로 걸어나가면 검산을 지나 만들에 송원대의 보물을 싣고 항해하다 풍랑에 가라앉았던 해저유물선 발굴지가 나오기도 한다. 어느 곳이든 바다는 날씨 변화에 따라, 조수간만의 차에 따라 신화 속에 나오는 야누스처럼 두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온 바다가 순한 양처럼 부드러웠는데, 해질녘 석양빛에 금빛, 은빛 물결 위로 통통배가 지나가는 모습을 보면 그야말로 무릉도원이 부럽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바람이 심한 날에는 검푸른 이무기의 분풀이라도 하는 것처럼 파도가 깎아지른 절벽 꼭대기까지 치솟아 오르며 섬을 집어 삼키려 하고, 폭풍이 일면 선착장에 묶어둔 배의 밧줄이 끊겨 배가 뒤집힌 채 파도 속으로 사라지기도 하고, 사리 때에는 해일이 일어 바닷물이 마을 앞 방파제를 넘어와 논밭을 침범하는 바람에 곡식은 물론 농토를 황무지로 바꾸어버리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썰물 때가 되면 뻘밭이나 모래밭에는 붉은 장밋빛 집게발의 농게, 뻘빛 짱뚱어, 세발낙지, 소라, , 고동, 석화, 백합, 모시조개, 바지락, 꼬막, , , 민어, 농어, 송어, 돔 등 온갖 조개를 줍고, 그물도 치고 낚시도 하여 민어, 농어, 송어, 오징어 등 그야말로 온갖 해산물이 제 모습을 드러내는 풍요의 여신이었다.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산으로 들로 바다를 쏘다니며 고사리도 꺾고, 수박 서리도 하고, 산딸기도 따 먹고, 저수지나 바다에서 헤엄치기도 하면서 남자애처럼 왈가닥거리며 거칠게 자랐다. 그러다 보니, 내가 정말 싫어하는 일 중의 하나는 부엌의 물항아리를 가득 채우는 일이었는데, 아침 일찍 고동샘에 가서 두레박으로 맑은 물을 길어 올려 물동이를 이고 십여 분을 걷는 짓거리를 대여섯 번 해야 끝이 났다. 특히 물동이의 물이 넘치지 않게 하려고 얌전하게 걸어야 하는 일은 몸서리가 날 정도였다. 우리집 앞마당, 봉선화를 두른 장독대 옆에는 펌프질만 하면 콸콸 쏟아져 나오는 지하수도 있고, 이십여 걸음만 내려가면 텃밭 가장자리로 흘러들어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미나리를 키워내고는 굽이굽이 고랑을 타고 내려가 바닷물과 합류하는, 어지간한 가뭄에는 물줄기가 마르지 않는, 좀 흐리긴 하지만 옹골찬 물이 샘솟는 우물이 있건만, 어머니는 밥을 짓고 국을 끓이는 데 쓰는 물만큼은 꼭 고동샘물을 썼다. 한때 나는 엄마가 콩쥐팥쥐전에 나오는 콩쥐 엄마는 아닐까, 계모가 아니라면 고약한 심술보를 가진 마귀할멈처럼 나를 부려먹을 요량으로 내가 그토록이나 싫어하는 물긷기를 아침마다 시킬 리가 없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나는 다리 밑에서 주워온 애는 아닐까, 내가 사라지면 슬퍼하기는 할까? 진지하게, 심각하게 고민도 했다. 반대로 내가 진짜 좋아했던 일은 수영이었다. 저수지며 바다에서 활개치며 자유롭게 헤엄칠 때의 상쾌함은 그 어떤 즐거움과도 바꿀 수 없을 정도였다. 과유불급이라! 초등학교 시절 우리가 가장 좋아했던 간식은 봉지라면이었다. 생면에 스프를 발라서 먹는 맛이란 가히 환상적이었다. 6학년 여름방학 때 친구들과 봉지라면을 걸고 선착장 앞에서 수영 대회를 열었다. 따 논 당상이었다. 어지간한 남학생보다 자신 있었다. 선착장 하구에서 물 위에 떠 있는 배들을 피해 수문 앞까지 가면 끝이었다. 1등에 집착한 나머지 배의 부력을 몰랐던 나는 지름길을 따라 배 밑으로 기어들어가게 되었고, 어찌된 영문인지는 모르나 그 블랙홀에서 빠져나왔고, 바닷물을 너무 많이 마신 탓으로 생라면은커녕 물 한 모금 제대로 못 넘기는 상태로 열흘 넘게 병원에 입원해 있어야 했다. 물의 위력을 온몸으로 느낀 덕에 고동샘물을 길어날라야 하는 일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이 유일한 소득이라고나 할까?

  중학교를 졸업할 때쯤, 저 막막한 바다 너머, 꿈과 희망으로 가득 찬 무지갯빛 신세계를 상상하면서부터는 내가 산과 들을 쏘다니며 새알을 줍고, 야호! 소리지르고 메아리를 듣는 일 따위, 저수지며 바다를 헤엄치는 일 따위는 한심하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노릇으로 생각되어 부끄럽고 수치스러워졌다. 더하여 섬사람들은 부모형제를 포함하여 몽땅 원시인, 미개인, 야만인처럼 여겨져 멸시하고 무시하고 경멸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즈음 집집마다 수도가 놓였다. 물론 고동샘물이 우리 마을의 식수원이 되었는데 이유인 즉슨 다섯 봉우리에서 땅속 깊이 모아진 물이 깊이깊이 흘러내리면서 몸에 좋은 미네랄을 함유한 채 뿜어져 나오는 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가족의 건강을 챙기고, 생명을 키우는 물의 소중함을 일깨우고자 한사코 천방지축인 나에게 물을 길어오게 하셨던 것이다.

  내가 태생지를 등진 채 대도시에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한 다음 가장 먼저 한 일은 대중목욕탕에 가는 것이었다. 찬물과 따뜻한 물이 철철 넘쳐 흐르는 별천지였다. 나는 내 몸의 촌티를 빡빡 밀어냄으로써 두뇌부터 발끝까지 원시의 햇빛을 차단하여 백색 문명인이 되고자 했다. 그리하여 날것 그대로를 거부하고 인스턴트식품의 편리함에, 손빨래 대신 세탁기에 익숙해졌다. 지금 도시인들은 물론 시골에 사는 분들조차 생수에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우리 고향에서는 지금도 여전히 수돗물을 식수로 사용한다. 나도 정수기의 물에 익숙해져 있고, 수돗물은 설거지물로만 사용하는데도 고향에 가면 펌프질한 물을 허드렛물로 쓰고 자연스럽게 수돗물을 마신다. 그러면 변함없이 눈비오는 아침에도 한결같이 맑고 투명하게 솟아오르던, 여름에는 시원한 청량감을 주고 겨울에는 따뜻한 온기를 전해주었던 그 물맛을 느낄 수 있다.

내가 더럽다고 외면했던 그 물이야말로 내 영혼의 핏줄기에 덕지덕지 붙어있던 삿된 기운을 맑게 씻어준 생명수였던 것이다. 노자는 상선약수(上善若水), ‘가장 순수한 선은 물과 같다. 물의 선한 작용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툼이 없다. 물은 뭇 사물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머물러 있다. 그러므로 도인에 거의 가깝다.’로 도()를 일컬었다. 바닷물은 바다에서 생명을 키우고, 산꼭대기에서 흘러내려 도랑을 따라 냇물이 되고 저수지에 머물렀다가 들판을 적시고 다시 모이는 강물은 땅에서 푸르른 생명들을 무럭무럭 가꾸어낸다.

  순리대로 운행하는 대자연의 섭리처럼 내가 사는 이 세상의 천지사방이, 우주만물이 서로를 품는 도()로 넘쳐나기를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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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이 환 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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