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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머니의 시준단지

 

정 석 대

 

지거가 거저 컷는 줄 아는가배

 병실 문을 나서는 나를 향해 어머니는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말했다. 그 독백이 화살이 되어 등에 꽂히자 얼어붙은 듯 한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 어제밤에 했던 그 말이 그렇게도 마음에 걸리셨을까?

  

어제 저녁때 어머니의 병환이 위중하여 선린병원에 입원준비를 하기위해 옷가지를 챙기다가 안방 장롱 위의 깊숙한 곳에 있는 그것을 발견했다. 작은 항아리에 한지로 덮개를 하고 무명실타래를 둘러놓은 시준단지다. 오래전에 없어져 버린 줄 알았는데 아직도 찌들은 먼지를 뒤집어쓴 채 놓여 있었다.

"이까짓 미신 덩어리, 이러니 아직도 이 꼬라지지

나도 모르게 튀어나와 버린 혼잣말에 어머니는 가만히 눈을 감고 계셨다.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해 버린 것이다. 이왕 나온 말끝에 요즘 시대에 이게 무슨 소용이며 그렇게 정성을 들였는데도 후손이 잘된 게 뭐가 있느냐는 말도 뱉어 버렸다. 예전 같았으면 불호령이 떨어질 것이 분명한데 물리적 힘을 잃어버린 어머니는 나의 도발에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

   

형산강변의 너른 들판 위에 깨어진 사금파리처럼 점점이 흩어진 작은 집들이 내 고향 마을이다. 내가 어렸을 때는 모두가 논농사에 의지하고 살았음으로 여러 가지 전통적인 농경 풍습들이 많았다. 이 시준단지 역시 영둥할매나 삼신할매처럼 농가에서 모시던 신 중의 하나였다. 그때 우리 마을에 시준단지가 없었던 집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사릿문이 삐딱이 서 있던 고향 집 안방의 실겅(시렁)위에 그 시준단지가 있었다. 호롱불 그늘에 낮게 깔리던 단지의 그림자를 보면서 잠이 들곤 했던 기억이 난다. 언제 적부터 우리 집에 있어 왔는지는 모른다. 윗대의 그 윗대가 그랬던 것처럼 어머니도 종부라는 이유로 물려받았고 그것을 지키고 또 후대에 물려주어야 할 의무를 자연스레 가지게 되었다.

   

첫 농사를 지은 쌀을 담아 정성을 올림으로써 집안의 풍요와 안녕을 지켜준다고 믿는 시준단지는 안방 실겅 위 늘 그 자리에서 나의 유년기와 함께 지내왔다. 손바닥 만한 한 해 논농사의 흉년은 식구들이 굶어야 하는 절대적 위기였으므로 풍년에 대한 염원은 그렇게 간절했으리라. 햅쌀을 갈아 넣는 시기는 음력 시월의 손 없는 길일을 택하였다. 첫 햅쌀을 넣기 위해서는 나락을 쪄서 찐쌀을 만들어야 했는데 디딜방아 소리가 나면 아이들 마음도 덩달아 설레었다. 말랑말랑하고 고소한 찐쌀을 한 줌 얻어먹을 수 있다는 기대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쌀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 더 즐거웠다. 교체한 쌀로 밥을 해 먹었기 때문이다. 외부로부터 떡이나 음식이 들어와도 반드시 먼저 올려놓았다가 먹어야 했다.

 

앞실산에 묘사를 지내거나 오천 종택에서 기제사를 지내고 봉개가 와도 가장 먼저 올려졌다. 식탐이 많던 우리 형제들은 자기 몫의 떡을 먼저 먹어 치우고는 시렁위에 눈길을 떼지 못하면 할머니는 논에 물 들어가는 것 하고 자식 입에 밥숟가락 들어가는 모양이 가장 보기 좋다 했다하시면서 떡을 내려주시곤 했다. 집안에 아이가 태어나도 세 칠이 지날 때까지 미역국과 밥 한 그릇을 올려놓았다. 까치가 우는 새벽에 눈을 떴을 때 시렁 위에 떡과 과일이 올려져 있으면 간밤에 어느 집에서 기제사 있는 날이라는 것을 알았다. 대소가의 잔치에서 이바지떡 봉숭(잔치에 참석하지 못한 어른들에게 보내는 음식의 경상도 방언)을 보내오거나 심지어 옆집에서 호박전 한 장을 보내와도 시준단지가 가장 먼저였다. 투박한 듯 하면서도 단아하며 근엄하면서도 친근한 시준단지는 그렇게 우리 집의 긴 전설을 고스란히 담아 우리의 삶과 애환을 함께하였다.

 

어느 날 갑자기 좁은 비포장 신작로에 흙과 돌을 실은 지엠씨 트럭들이 분주히 달리기 시작하고 수평선처럼 보이는 포항의 갈대밭위에 공장 꿀뚝들이 올라가고 농사를 짓던 마을 사람들은 포항으로 막일을 하러 다니면서 조용하던 농촌은 격변의 시기를 겪게 되었다.

 사람들은 '종철' 이 세워진다고 했다' 종철'은 포항종합제철를 포항 사람들이 초기에 그렇게 불렀다. 너나없이 종철이 다 지어지면 물에 젖은 솜이불을 덮은 것 같은 무거운 가난도 벗어날 거라는 기대를 가지게 되었다. 형산강 건너 황무지 갈대밭에 자고나면 쑥쑥 올라가는 꿀뚝만큼이나 희망도 부풀어 갔다.

 

댓 마지기의 논농사에 의존하던 우리 집도 예외 일수는 없었다, 그 열풍을 따라 열 명이 넘는 식솔을 거느린 가난한 아버지는 지금의 내 나이보다 훨씬 더 젊은 날에 평생 업으로 하던 논농사를 버리고 포항시내로 이농을 했다.

그 때도 시준단지는 이불보 속에 고이 모셔져 따라 왔으며 실겅 위에서 장롱 위로 장소만 바뀌었다. 도회지로 나온 단지는 이제 풍년을 위한 기원보다는 어려움이나 우환이 있을 때 우리 집을 지키는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큰 형님이 공고를 졸업하고 노란정복에 워카를 신고 종철에 첫 출근을 하는 날 새벽에도 어머니는 그 앞에서 합장을 하셨다. 내가 공무원이 되어서 첫 봉급을 받아왔을 때도 월급봉투를 가장 먼저 바쳤다. 종철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사고가 나서 죽었다는 소문을 들을 때 마다 어머니는 형산강 건너의 제철소 불빛을 바라보면서 시준단지는 아들의 무사고를 간절히 비는 신앙이 되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나는 어머니 곁을 떠나고 마음이 황무지로 변했을 부모님은 객지에 나간 자식의 안녕을 이 단지 앞에서 수 없이 빌고 빌었을 것이다. 부평초처럼 타향을 전전하다 한 번씩 어머니의 집에서 마주치는 그것을 볼 때마다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달가워하지 않았다. 어느 시점부터 한 동안 보이지 않아서 잊어버리고 지냈는데 어제 장롱 위의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던 그 단지를 발견한 것이다. 나 뿐만 아니라 다른 형제들조차 자꾸 눈치를 주니 감춰 놓으신 것 같았다. `지거가 거저 컷는 줄 아는 가배` 라는 오늘 어머니가 나에게 퍼 부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질책으로부터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그 토록 지키고자 했던 그것은 어머니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떨칠 수 없는 업이었을까? 자식들의 대지가 풍년을 이루어 가게 하는 정화수였을까? 좋은 날 보다 슬픈 날이 더 많았었을 어머니에게는 그것은 종교 이상이었으며 모질고 고된 삶을 지탱해 주었던 위안이었을 것이다. ! 오늘 어머니의 그 독백처럼 내가 그저 큰 게 아니로구나.

 

이제 어머니의 날들이 잦은 기침 소리는 시간을 짐작할 수 없게 되었다. 철없는 자식의 오만함에 방어할 기력도 없는 아픔은 어떠셨을까?

 방아깨비처럼 나약해져 버린 어머니의 힘겨운 질책을 생각하면서 서울로 올라오는 동안 여러 가지 생각들로 마음이 복잡해진다.

깨알처럼 많은 우리 가문의 이야기와 조상들의 정성이 담겨있는 그 시준단지는 이제 누가 지켜 갈 것인가? 물려 받아야 할 새 종부는 어림이 없는데.

 

 

 

 

  2.비학산(飛鶴山) 기우제

 

정석대

 

뉴스를 검색 하다가 낯 익은 이름 하나를 발견했다.

 '부장판사 정**씨 대법관으로 임명'

 "우리집안 어른이 서울서 검사라는거 알재, 시방 공천만 받으면 국회의원 자리는 따논 당상인기라"

내가 어렸을 때에 술이 얼큰해진 아버지는 동네 사람들 앞에 당신보다 나이 어린 아저씨뻘 되는 그 할아버지가 유일한 빽이었다. 나 역시 가문이나 고향이야기를 꺼낼 때는 은연중 자랑삼아 내세우던 이름이었다. 오랫동안 잊고 지내던 그 이름을 보자 청년 시절에 집안 기제사를 지내고 음복 후에 들었던 방천 할배의 무용담이 떠올랐다.

 

옛날에는 가뭄이 들면 부정하다고 생각되어 지는 것들을 찾아내어 그 원인을 제거하는 행위를 한다거나 기우제를 지냈다. 지독한 한발로 논밭이 거북등껍질처럼 턱턱 갈라지고 먹을 물조차 없이 어려움이 지속되면 산 너머 영덕바닷가에 홀아비가 천년 묵은 거북이을 잡아서 그렇다 하기도 하고 비를 가장 가까이 접하고 있는 산꼭대기에 산소를 이장해서 하늘의 기를 막아서 그렇다는 등 온갖 소문들로 민심까지 뒤숭숭해진다. 그러면 기우제를 지내야 한다는 여론이 자연이 형성된다. 비를 간절히 비는 마음도 있었지만 뒤숭숭해진 민심을 결집시키는 조상들의 지혜도 숨어 있었다. 이런 기우제 지내는 날은 술이 고픈 사람들에게는 목을 축일 수 있는 구실도 생겨지고 배고픈 아이들에게는 음복떡을 얻어먹는 재미만으로도 일종의 축제의 날이 되기도 하였다.

 

천수답이 거의 대부분인 기북면에 하지가 훨씬 지났는데도 모를 낸 논이 없는 가뭄이 극심하던 그 해였다. 하늘만 쳐다보던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는 판단이 되자 동회가 붙여지고 기우제를 지내기로 의견이 모여졌다. 기우제를 지내기에 앞서 먼저 비학산의 묫자리를 찾아서 파내자는 굳은 결의도 되었다.

 " 몬찾으머 인자 우리는 굴마 죽니데이

있지 아무렴 있고 말고 틀림엄서"

 

덕동 마을 앞을 부채처럼 감싸고 있는 험난한 바위산인 비학산(飛鶴山)은 포항시 신광면과 기북면이 경계를 이루고 있는 명산으로 모양새가 학이 알을 품고 있다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형상 이라 하여 그렇게 불리게 되었으며 정상에는 시신 한 구가 들어갈 만한 석함이 하나 있는데, 이 곳은 옛날부 터 천하명당이라는 설이 있어 왔다. 하지만 이 곳에 묘를 쓰면 삼년 안에 가운이 일어나 천석꾼 부자가 된다는 전설과 함께 반면에 근동 백리 안에는 큰 가뭄으로 흉년이 든다는 소문 때문에 묫자리 쓰는 것이 금기시 되었다. 간혹 타관에 나갔던 사람들이 하는 일이 잘 안 되거나 집안에 우환이 들면 남 몰래 야밤을 이용하여 이장을 헤 놓거나 근처 풀섶에 몰래 숨겨놓고 가는 일이 종종 있었다. 묘를 이장한 집안이 큰 부자가 되었던 안 되었던 밝혀진 바는 없지만 심한 가뭄이 들 때는 비학산에 누군가가 이장하였다고 믿었고 거기에는 틀림없이 유골이 있었다.

 

가뭄의 원인이 자연히 그 쪽으로 여론이 모여지고 동회를 통해 부역이 소집되었다. 부역에 참여할 수 없는 형편을 가진 사람들은 품을 싸서라도 그 부역은 꼭 붙여야만 했다. 부역에 모인 사람들은 호미와 삽을 들고 분노와 설레임을 안고 비학산을 오른다.

   

동회가 붙여지고 기우제 결의가 되면서 부터 방천 할배는 남 모를 속앓이를 하고 있었다. 작년 가을에 방천 할배도 아버님 유골을 모시고 남몰래 혼자 비학산을 올라갔기 때문이다. 야밤을 틈타 해발 육백메타도 넘는 험난한 바위산 꼭대기를 힘들게 올라가서 명당자리의 어느 한 곳에다 고이 안장하고 봉분도 만들지 않은채 흔적을 없애고 내려왔다.

 

일찍이 조실부모하고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어린 동생 하나를 부모 노릇을 하면서 키워 왔는데 동생이 수재 소리를 들을 정도로 특출한 총기가 있어 자신은 굶어 가면서도 대처에 내보내서 어렵게 어렵게 공부를 시켰다. 그러나 사법고시 준비를 하던 동생이 모두가 쉽게 합격 하리라던 기대를 져 버리고 번번이 낙방을 하였다. 심지어는 공부를 너무 많이 해서 실성해져 버렸다는 소문까지 돌자 답답한 마음에 용하다는 점쟁이를 찾아가니 조상의 산소를 탓하는 점쾌에 처음에는 많이도 망설였으나 자기가 해줄 것이 이것 뿐 이라는 판단으로 비학산에 부모님의 유골을 안장하기로 독한 마음을 먹었던 것이다. 설마 했는데 가뭄이 들고 일이 이 지경까지 되고 보니 당황스럽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몇날며칠을 머리를 싸 메고 누웠다가 묘책 하나를 떠 올렸다. 기우제 전날 밤 방천 할배는 작은 옹기단지에 동물의 뼈를 집어넣고 한지로 싸서 지게에 짊어지고 야밤을 이용해 비학산으로 갔다. 칠흙 같은 그믐밤이라 넘어지고 엎어지면서 새벽녘에 산꼭대기에 다 달아 술 한 잔을 올리고 아버님의 유골함이 있는 자리에 몇 삽의 흙을 걷어내고 유골함 위에다 가져간 가짜 유골함을 얹고 곱게 흙을 덮어 두고 급히 산을 내려오니 거의 날이 새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동네 앞에는 기우제 부역을 나온 사람들이 하나 둘 몰려들고 방천 할배도 그 대열에 모르는 척 합류를 하였다. 그리고는 산으로 같이 올라가서는 동네 사람들의 뒷전에서 산소를 파는 모습을 가슴 조이며 지켜보았다. 분노한 사람들은 산봉우리의 평평한 곳은 죄다 파 헤쳤다. 다행히도 위에 새로 묻었던 가짜 유골함이 발견되자 흥분한 동네 사람들은 그 가짜 유골함만 들어내고 절벽 아래로 마치 분풀이를 하듯 던지며 '물이야' '물이야' 하고 외쳤다.

  그리고는 가져간 음식을 차려놓고 제를 올리고 모두가 흡족한 마음으로 산을 내려 왔다. 우연인지 기우제 덕분인지 산소를 파낸 덕분인지 모르지만 희한하게도 그날 밤에 비가 왔고 가뭄이 해갈되어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그 후 방천 할배의 아우도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긴 세월을 우리가문의 자랑거리가 되었다.

 "검사있는 가문 이 근동에는 없데이

 

이 말은 아직까지도 아버지가 남 앞에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자랑거리이다. 오늘 대법관으로 임명된 친척할아버지가 그 방천할배의 아우이다. 승진뉴스로 새롭게 떠올린 방천 할배의 이 이야기도 하늘의 별들 만큼이나 많은 세상의 이야기중의 하나이지만 지금 내가 여기에 기록하지 않는다면 영원이 묻혀 진다는 아쉬움 때문에 아련한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3. 잊혀져 가는 시금장의 맛

 

정 석 대

 

우리는 지금 산해짐미의 홍수 시대에 살고 있다. 온 천지가 먹을 것 투성이다. 마음만 먹으면 무슨 음식든 다 살 수가 있는 시대이다. 그러나 이제는 구할 래야 구할 수 없는 영원히 그리운 맛이 있다. 맛이라기보다는 추억이고 추억이라기보다는 맛일 수 있는 고향이 그 맛 어릴 때 어머니가 해주시던 '시금장'이다.

바느질을 하던 어머니가 윗목에 앉혀진 콩나물시루에서 물 한 바가지를 떠서 부으면 그 졸졸거리는 소리에 잠을 깨곤 했다. 보리밥 한 공기와 함께 시금장 종지가 얹혀진 개다리 소반이 호롱불의 그림자에 국회의원이 하사한 한 장짜리 달력이 붙어진 벽에 길게 드리워진다.

 죽도시장으로 마른 미역을 짊어지고 가셨던 아버지가 아직 돌아오지 않으신 것이다. 시금털털한 시금장 냄새가 온 방 안을 덮었다. 까마득히 추억속에 묻혀 버린 그 냄새에는 어머니의 사랑과 손길이 있고 그리운 고향 사람들의 얼굴이 이 축축하게 묻어난다.

 

어느 다정한 친구와의 통화에서 시금장을 기억하느냐고 물었다.

 느닷없는 질문에 친절 하게도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그 향수를 아낌없이 꺼내주었다. 생각보다 그는 시금장에 대해서 소소히 아는게 많았다. 그 친구의 조언이 기억 속으로 부터 시금장을 세상 밖으로 꺼내었다. 애련한 기억의 맛은 급기야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의 이름과 함께 곱게 쌓아놓은 장작더미 같은 기억 속에서 그 향수를 파 헤친다.

   

시금장이란? 깨주메기로 만드는 장으로 포항 지방에서 만들어 먹던 겨울반찬이다. 여름에 보릿겨를 물에 개어 대충 주물러 어른 주먹만한하게 만들고 밥을 짓고 남은 잿불이나 모깃불에 구운 것이 깨주메기다.

그렇게 구워진 깨주메기를 아버지는 송곳으로 구멍을 뚫어 몇 개씩 새끼줄에 꿰어 여름날 내내 뒤란의 흙바람 벽에 매달아 시간의 흐름 속에 맡겨 놓는다. 기억컨데 깜부기가 듬성듬성 피어있던 형산강변의 청보리 들판을 가로질러 탱자나무 울타리 있던 장호네 외딴집 뒤란에도 깨주메기가 걸리었다.

이렇게 숙성된 깨주메기는 가마니에 담아 갓방에 두었다가 찬바람이 불면 디딜방아로 가루를 내어 메줏가루와 섞어서 무말랭이와 희아리 고추를 넣어 장을 담구었다. 댓돌위에 검정고무신 한 켤레가 쓸쓸하게도 놓여 있던 고향 집의 흙 담벼락 아래 장독대에 시금장이 곰 삭혀졌다.

 

그렇게 숙성되어 만들어진 것이 밥상 위에 올라오면 맵지도 짜지도 아니하고 시큼털털 오묘한 맛의 시금장이 된다. 아이들이 많은 집은 시금장 속의 오구락지나 콩잎 등을 서로 꺼내어 먹으려 숟가락질이 빨라지기도 했다. 감꽃이 우수수 떨어지던 날 학교에서 돌아와 책보를 던져 놓고 청마루에 앉아 식은 보리밥에 숟가락의 뒤끝으로 찍어 먹던 시금장은 이제는 맛이라기 보다는 애절한 추억이다.

   

잊혀져 가는 것이 아쉽지 않은 것이 무엇이랴 마는 이제는 고향에서도 찾기 힘든 시금장은 떠나버린 첫사랑처럼 안타까운 맛이 되어버렸다. 향수 속에서 그것을 꺼내고 그 꺼낸 것에 기억의 맛을 붙이자 부모형제와 나의 이웃들 그리고 내가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이 한꺼번에 나를 향해 웃고 있다.

고향을 떠난 지도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 갔건만 아직도 이끌려 가듯 또 끌리어 가고야 마는 이 애환은 도대체 나더러 어쩌란 말인가? 빛바랜 어머니의 모시치마 자락과 함께 삐닥한 사립 대문 옆에 서있던 아버지의 빈 지게의 풍경과 시금장의 맛이 겹쳐지면 나는 그 향수에 깊이 깊이 빠져들어간다.

! 사랑했던 이들이여!

 ! 그리운 사람들이여!

 

이제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는 이름들이거나 내가 그들의 얼굴을 완전히 기억하기 전에 고향을 떠나 버렸던 사람들 조차도 나는 그 시금장의 맛을 그리면서 그들을 그려본다.시금장을 버무리던 호미질로 거칠어진 어머니의 손마디는 이제는 영원히 그리워야 할 손이 되어버렸다.

왕왕거리던 탈곡기소리와 정겹게 들리던 콩 터는 소리, 시금장의 맛 그리고 사랑했던 사람들.

어프렷한 흔적들 속에 종국에는 어머니의 그리움이 또 중심이 되어버린다.

 

 정석대(60815) 현 도시철도공사근무

주소: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마두동 강촌마을 2111002

010-9520-3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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