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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10 11:27

잎새다방 미스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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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새다방 미스 리 이정희

 

배는 무거운데 화장실엔 가고 싶지 않다. 앉아봤자 소식도 없다. 명은 짜증스러운 며칠을 보냈다. 그리고 오늘, 변기 위에 앉아 검은색 스타킹과 팬티를 내렸을 때 명은 잠깐, 아주 잠깐 무슨 병에 걸린 건 아닐까 생각했다. 읍내 피아노 학원에서 자주 듣던 엘리제를 위하여가 문밖에서 쏟아져 들어온다. 예비종이다. 아 씨, 우짜지……. 잠깐 고민하다 점보롤이라 쓰여 있는 까칠하고 얇은 화장지를 길게 뽑는다. 르륵. 르륵. 3교시 수학 아이가? 수학책 빌리러 가야되는데. 바깥에서 손을 씻으며 재잘대는 아이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뜯어낸다. 축축하게 젖은 팬티에 화장지를 대고 꾹 꾹 누른다. ! 수학 쌤 지나갔다. 뛰라! . 발자국 소리가 명이 앉은 칸 앞에서 가장 크게 울리는 순간에, 화장지를 뜯어내던 행동을 잠시 멈췄다. 안에 누가 들었는지, 뭘 하는지 알 수도 없을 텐데 명은 마치 투명한 문 뒤에 앉은 기분이었다. 모든 걸 다 들킨 기분이다. …… 소리가 멀어지고 나서야 다시 화장지를 뜯어낸다.

 

아야, 날도 추운데 니는 맨 다리로 학교 갔다 오나? 마을버스 정류장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가면 동네 사람들끼리 돈을 모아 만든 평상이 자리 잡고 있다. 맞바람이 불기로는 동네 최적의 장소라 간간히 지나가는 버스가 남기는 소음의 흔적은 마루를 만들 애초에 고민거리도 되지 않았다. 마루는 때로 빨간 고추가 뒹굴며 노는 장소가 되기도 하고, 동네에서 제일 어린 윤호와 지혜의 집이 되기도 했다. 지혜는 가까운 논두렁에서 퍼온 진흙으로 윤호에게 아침밥을 만들어 주고, 윤호는 집에서 훔쳐온 형의 부루마블 돈을 가지고 퇴근했다. 윤호는 퇴근할 때마다 지혜에게 오천 원을 주기도 하고, 십만 원을 주기도 했다. 우리 아빠보다 더 많이 버네. 십만 원을 건네는 장면을 목격한 날, 명은 비누칠을 해도 지워지지 않는 아빠의 손톱 때를 떠올렸다.

스타킹 고 나서 학교에 버리고 왔어요. 마루에 둘러앉은 동네 아줌마들 사이에 삶은 밤이 담긴 파란색 바구니가 놓여 있다. 어금니로 반을 딱 쪼개고 커피 스푼으로 한 숟가락 뜨려던 여러 개의 눈이 일제히 명에게 꽂힌다. 그래, 퍼뜩 집에 가서 밥 먹어라. 아까 리아나 들어가드라. 학교 화장실을 빠져나오는 그 순간부터 무뚝뚝한 표정을 칠갑하고 있었던 명은 이 동네엔 어울리지 않는 이름을 듣는 순간, 느슨하게 잡고 있던 가방끈을 꽉 쥐었다가 놓았다. 1초 상간에 일어난 소소한 반응을 신경도 쓰지 않는 아줌마들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선다. 자가 가 맞나, 새엄마 봤다는? 아이고~ 아 들을라, 조용히 해라. 들으라고 하는 게 아니라니. 아줌마들은 참 이상하다. 명이 흘깃 뒤돌아보자 아줌마들은 다시 커피 스푼으로 밤 파먹기에 집중한다. 하나 같이 짧은 머리에 파마를 한 데다 퉁퉁한 옆구리를 하고 있다. 뒷모습만 봐서는 누가 윤호 엄마고 누가 지혜 엄마인지 알아보기 어렵다. 비슷한 것들은 섞여 버리면 구분하기 쉽지 않다. 명이도 이담에 나이 먹고 애 낳고 뼈 빠지게 애 키우느라 옆구리가 퉁퉁해지면 목욕탕의 탕 안에 들어간 아줌마들처럼 한 데 뒤섞이게 될 것이다. 어린 딸이 제 엄마인 줄 알고 등허리에 안겼다가 뒤돌아 본 얼굴이 낯선 아줌마일 사건도 일어날 테지. 아드리아나는 그렇지 않다. 동네 평상에 앉아 있어도, 아줌마 인구밀도가 폭발하는 읍내의 장엘 가도, 하루 종일 커피만 탄다는 잎새다방에서도 아드리아나는 섞이지 못하고 혼자만 볼록 솟아나 있다. 까칠한 화장지의 감촉이 느껴진다. 조급하게 움직일 때마다 통증이 저릿저릿 흘러나온다.

 

. . . 아빠가 TV를 보는 명을 등지고 구부정하게 앉아 손톱을 깎는다. 자른 지 얼마 안 됐으면서……. 한 마디 핀잔을 주려다 합, 입을 다문다. 명은 지금, 아빠와 단언투쟁 중이다. 아빠는 딱 한 번 만났다는 여자의 사진을 곁에 두고 손톱을 깎고 있다. 억지로 지운다고 해도 다시 생겨나게 될 거다, 아빠 손톱의, 때는.

명이 일어나기도 전에 도시락을 싸놓고 집을 나서는 아빠는 읍내에 있는 기차역 근처에서 일감을 기다리곤 했다. 어떤 날은 7만 원, 어떤 날은 5만 원, 어떤 날은 빈손으로 명이 학교를 마치고 오기 전에 들어오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아빠는 평상을 피해 빙 돌아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면 사이좋게 둘러앉은 수다쟁이들의 밥상에 오를 일도 없었다. 이른 아침마다 아빠는 조금이라도 더 따뜻한 밥을 먹이려고 반찬만 먼저 싸서 도시락 통에 넣어놓고 밥솥의 버튼을 눌러놓았다. 그러다 가끔 반찬만 실컷 싸놓고 밥 하는 걸 잊은 채 나가기도 했다. 빈 밥솥을 여러 번 목격하고도 볼멘소리 한 번 한 적 없었지만 이번은 달랐다. 딸이 말 안 건다고 같이 단언투쟁을 하고 있는 쉰 살짜리 아빠를 보며 명은 입을 비죽였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사건은 밥솥에서 물에 잠긴 생쌀을 발견하는 것과 비교도 되지 않는 일이다. 지구 반대편에서 사진 속의 여자가 날아오고 있단다. 14년 간 함께 살아 온 딸에게는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아빠가 말 안 했드나? 나는 말 했다꼬. 아빠는 무성의 했다. 취사 버튼 안 눌렀드나? 나는 눌렀다꼬. 여느 때와 비슷한 말투였다.

 

상파울루에서 한 번, LA에서 한 번 비행기를 바꿔 타고 하늘 위에서 다섯 번 쯤의 밥을 먹을 거란다. 비행기에서 밥도 먹을 수 있나. 단언투쟁 중인 명은 생전 처음 와 본 인천, 하고도 공항에서 아빠와 어느 여자를 놓치지 않기 위해 쌍심지를 켜고 따라 가는 중이다. 필리핀 같이 가까운 나라 여자들도 쌔고 쌨구만, 뭐한다고 쌩돈을 주고 그 먼데서 여자를 델꼬 오노? 평상에서 다 들으라고 쑥덕거리던 목소리가 들린다. 사진 속 여자가 태어난 곳은 필리핀이라는 데보다 먼 곳에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이래서 사람들은 정류장 옆 평상에 앉으면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 욕도 하지 말라고 했다. 엄마, 면세점에서 선글라스 사 줘. 집에 놔두고 왔나봐. 4학년 때 전학 온 수진이가 쓰는 서울말이 곳곳에서 들린다. 서울말을 쓰는 그들은 대부분 바퀴 달린 커다란 가방을 끌고 가슴팍이나 머리에, 또는 얼굴에 새카만 안경을 쓰고 있다. 가는 곳은 모두 다르겠지만 모양새는 모두 비슷하다. 안에서 밖으로 나오는 노란 머리의 사람들도,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검은 머리의 사람들도 생김새는 다르지만 모양새는 다르지 않다.

 

거무죽죽한 여자 델꼬 살 바에 돈 좀 더 주고 말지. 이거 봐라, 느그 엄마 닮지 않았나? 이름이 아드리아나, 아드리아나다. 손톱을 깎던 아빠가 눈앞으로 지갑만 한 사진을 가까이 댔다, 멀리 댔다 하며 자랑스레 말했다. 얘기한 적은 없지만 사실, 명은 엄마의 얼굴을 잘 모른다. 아니, 모른다기보다는 잊어 버렸다고 하는 게 맞다. 그래서 명은 엄마의 얼굴도, 손길도, 냄새도 그립지 않다. 나이키나 아디다스 종이가방을 들고 엄마와 맥도날드에 앉아 있는 친구를 부러워한 적은 있을지언정 엄마 자체가 보고 싶다거나 그리운 적은 거의 없었다. 그리움은 기억에서 오는 잔상에 불과하다. 순간, 순간. 한 컷, 한 컷 파노라마 사진처럼 떠오르는 어린 시절의 기억에 아주 잠깐 머물렀던 엄마는 아빠의 말마따나 하늘의 별이 됐다.

 

, 이따가 이거 들고 있어. 중학교에 들어와 배운 영어 단어가 적힌 종이가 불쑥 내밀어진다. 한국에 온 걸 환영합니다? 새엄마 오시는 데 잘 보이게 높이 들고 이렇~게 흔들어줘야 해, 알았지? 돈 받고 결혼을 시켜주는 사무소의 여자다. 파라과이, 들어봤니? 우리나라 반대편에 있는 나라인데, 오는 데 37시간이나 걸린대. 새엄마 네 집이 으부꾸이라는 시골이니까 거기서 출발한 것까지 하면 이틀은 걸리겠다, 그지? 아빠의 가족이 되는 길은 꼬박 이틀이 걸린다. 너무 짧은 거 아닌가.

명이 태어나 여태 살고 있는 마을에서 엄마, 아빠 역시 태어났다. 15년 동안 매일매일 얼굴을 보고 지냈지만 둘은 그렇다고 썩 친한 편도 아니었다. 코찔찔이 시절에 아빠가 엄마의 치마를 들친 적도 없고, 엄마가 전우의 시체를 아무리 넘고 넘어도 고무줄을 자르고 도망치거나 한 적도 없다. 밍밍한 사이였던 두 사람 중 한쪽이 두근두근한 감성에 눈을 뜬 건 중학교 졸업 무렵이었다. 고등학교도 못 가게 생긴, 구멍 찢어지게 가난했던 아빠는 열여섯에 읍내서 일을 시작했다. 공사판 어른들과 같이 다니기 시작하며 도둑 담배와 도둑 술을 배우며 점차 어른의 냄새를 풍겨가는 아빠는 고등학교 교과서를 든 엄마에게 너무 큰 유혹이었다. 3년 내내 짝사랑만 하던 엄마가 고백하겠다, 마음을 먹은 건 스무 살이 되면 서울서 일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다니던 아빠 때문이었다. 아빠는 서울에 가는 대신 조금 살만한 축에 속했던 엄마의 집으로 장가를 갔다. 엄마와 아빠가 가족이 되기까지는 20년이 걸렸는데 이번에는 지나치게 가깝다. 이건 공평한 게 아니다.

명이 종이를 스윽 내려다본다. 웰컴 투 코리아. 파라과이라는 데도 영어 쓰나? 못 알아보는 거 아니가? 그 여자는 영어를 못 할 것이다. 그러면 내가 들고 있는 종이도 못 알아보겠지. 혼자 공항 밖으로 나간 여자는 길을 잃게 될 거다. 길을 찾아 헤매는 여자에게 운명의 남자가 나타나 둘이 함께 으부꾸이라는 시골로 돌아가 농사나 지으며 살아간다. 결국 아빠랑은 만나 보지도 못하고 끝나겠지. 멍하게 8번 게이트를 들여다보는 명의 옆에서 같은 생각이라도 하는지 아빠가 손바닥을 맞대고 비비적거린다. 노동에 길들여진 손바닥 사이에서 건조한 소리가 난다. 저기 나오네요. 아드리아나! 아드리아나! 안에서 밖으로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 사이에서 사진보다 조금 더 나이 들어 보이는 아드리아나가 밀려 나온다. 인파 사이에 무난하게 섞여 있는 아드리아나. 명은 8번에서 시작되는 파도에 마음이 혼미해졌다. 명아, 인사 안 하나. 아담한 키의 아드리아나가 가까이 다가오자 단언투쟁을 언제 했었냐는 듯, 아빠가 잔뜩 친절한 말투로 명의 어깨를 흔든다. 괜히 어색하니까 애 들먹이는 어른들의 습성을 명은 벌써 알고 있었다. 건들지 마, 나는 단언투쟁 중이다. 그 여자는 아빠의 가족이지 내 가족이 아니다. 내 가족이 되는 길은 이래 안 가깝다. 억수로 멀어서 오지도 못할 끼다. 아는 척도 않고 팩 돌아서는 명의 뒤로 처음 듣는 목소리가 말한다. 올라!

 

새로 샀다는 친구의 운동화에 적힌 영어는 나이키도 아디다스도 아니다. 채널? 새널? 발음 나는 대로 알파벳을 요리조리 읽어보지만 읍내에 딱 하나 있는 백화점에서도 본 일 없는 단어다. 엄마가 미국 간다 해 가지고 면세점 가서 사오라고 졸랐다 아이가. 친구가 자랑하려고 하는 것이미국에 갔다운동화를 받았다중에 어떤 것인지는 모호했으나 명은 다만, 엄마라는 단어에 귀를 조금, 아주 조금 씰룩였다. 실제로 움직였는지 모르겠지만 명이 느끼기에는 읍내 책 대여점에 잔뜩 꽂혀 있는 순정만화에서 보던 것처럼 조금쯤 움직였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공항에서 들어봤던 면세점이라는 건 비행기를 다른 나라로 가야만 갈 수 있는 건가. 아드리아나는 알까. 비행기 타봤으니까. 면세점에서 샀다는 새 운동화는 친구의 발에 꼭 맞을까. 어제까지 신던 운동화보다 편할까. 처음 신는 신발은 맨날 뒤꿈치에 물집 잡히던데. I'm sorry, John. That's right, Jane. 제인이 존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해하는 영어 문장이 청록색 칠판을 메웠다. 눈만 칠판에 꽂혀 있지 명의 집중력은 친구의 운동화에 전부 쏠렸다. 제인이 존의 집에 전화를 해 다시 약속을 잡으려 할 때 엘리제를 위하여가 울린다. 체육 시간 옆 반이랑 피구 시합. 영어가 지워지고 서툰 분필글씨가 쓰인다. 반 아이들은 저걸 반장분필체라고 불렀다. 체육복 바지를 갈아입다가 명은 문득, 생활이 묻은 제 운동화를 내려 보았다. 중학교에 입학하기 전, 읍내 시장에서 이만 이천 원인 걸 이만 원에 깎아서 산 신발이다. 신발 가게 아줌마와 실랑이 하던 아빠는 곧 승자의 미소를 지으며 뒤에 붙은 이천 원은 원래 깎아주려고 붙여놓는 거라며 인생의 중요한 한 수를 알려줬다. 복숭아 뼈 아래까지 오는 양말을 신을 따마다 새 운동화는 양말을 끌어내리고 뒤꿈치에 물집을 만들었다. 손톱깎이로 물집 터뜨리길 몇 번 하고나서야 운동화가 편해졌지만 1년이 지나자 운동화는 금방 작아졌다. 명아, 잠깐만 기다려도. 같이 나가자. 친구가 책상 오른쪽에 걸린 신발주머니에서 어제까지 신던 운동화를 꺼낸다. 새 운동화 뒤꿈치를 살살 비벼 오른쪽부터 차곡차곡 벗고는 애지중지하며 사물함에 넣어놓는다. 명은 잠깐 헛. 하는 웃음을 터뜨렸다. 운동화 베릴까봐 겁나서 그라나? 자물쇠까지 걸어 잠그고 나서야 친구가 교실을 나선다. 아이다, 새 거 신고 뛰면 불편하다 아이가. 겁나기는 무슨. 엘리제를 위하여가 또 한 번 울리고 쏟아진 쌀알마냥 여기저기 흩여져 있던 아이들이 한 데 모인다. 모두 어제 신었던 운동화를 신고 있다. 불편한 건 얼마의 시간이 지나야 익숙해지는 걸까.

 

니 왜 상담 있다고 말을 안 했노. 연필로 사인이라도 할랑 치면 금세 번지고 마는 회색 종이가 아빠의 손에서 하늘거린다. 반 애들은 저걸 똥종이라고 부른다. 왜 똥종이라고 부르는 지는 아무도 모른다. 홍시 맛이 나서 홍시라고 한 건데, 왜냐고 물어보면 아무도 대답을 못한다. 똥종이에 적힌 학부모 진로상담 신청서에는 빈 칸이 가득하다. 거기에는 아빠의 사인도, 아드리아나의 이름도, 지금은 잊힌 진짜 엄마의 흔적도 없다. 느그 쌤이랑 통화했다. 모레까지는 꼭 오라카드라. 모나미 볼펜으로 이름을 쓰는 아빠의 손가락. 손을 씻었는데도 때가 묻어 있다. 왜 비누를 써도 안 지워지지? 아빠는 손끝에 머문 내 시선을 눈치 채고 설핏 웃었다. 그러고는 생활 때, 라고 물음 없는 대답을 했다.

한국식도 아닌 파라과이식도 아닌 이상한 밥상이다. 처음 보는 고기 요리와 색깔은 감자인데 고구마 냄새가 나는 정체불명의 식물, 그 옆에는 된장찌개와 김치가 나란히 누웠다. 빠라과이 소 많아. 길에 돌아다녀. 싸다, 싸다. 한국 소 비싸. 아빠랑 둘이 있을 때는 젓가락으로 밥그릇을 긁는 소리만 나던 밥상에 괄괄한 아드리아나의 목소리가 얹어졌다. 한국에 오기 전부터 한국말을 공부했단다. 나는 아무 것도 모르는 사이에 둘이서 벌써 짝짜꿍, 준비하고 있었단 말이지. 아무 죄 없는 파라과이 산 고기가 얄밉다. 니도 고기 쫌 먹어봐라. 좋아한다 아이가. 내는 돼지고기 좋아한다. 된장찌개에 밥을 팍팍 비벼 순식간에 그릇을 비운 명이 인사도 없이 제 방으로 쏘옥 들어가 버린다. 불평불만을 꿀꺽 삼키고 대신 들으란 듯이 힘 있게 방문을 닫고 들어온다. 쾅 소리에 두런대던 대화 소리가 잠깐 멈추었다가 다시 이어진다. 무슨 말인지 잘 들리지는 않지만 웅얼거리며 오고가는 진동으로 추측해 보건데 명의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다. 방 안에서 가장 새 것 같은 라디오를 켜고 이불 위에 눕는다. 반 친구들 중에는 없는 애들 없다며 바득바득 우겨서 샀더랬다. 돈 없어서 못 사준다는 아빠가 이장님 댁 도와주느라 밭 매러 갈 때도, 도시락 반찬 하겠다고 김치에 참치를 넣어 볶을 때도 따라다니며 아빠를 들들 볶아 얻어냈다. 맛있기는 무슨찔겨서 이빨 뿌라지겠구만. 소가 많다고 싸나. 찔기고 맛없으니까 싸겠지. 라디오에서 느린 노래가 흘러나온다. 어제는 비가 내렸어. 너도 알고 있는지. 돌아선 그 골목에선 난 눈물이 오언제나 힘들어하던 너를 바라보면서 이미 이별을 예감할 수가 있었어 워~ 수진이네 언니가 좋아한다는 노래다.

서울 살던 수진이는 4학년 때 명이 다니는 초등학교로 전학 왔다. 전교생이 삼백명도 채 안 되는 학교에서 서울 여자애의 등장이란 엄청난 화제였다. 아빠 사업이 망해서 왔다더라. 못된 사람들한테 돈 빌렸다가 도망 왔다더라. 수진이네 언니가 사고를 쳐서 내려 왔다더라. 서울에서도 잘 사는 동네, 높은 아파트서 살다가 경상도 촌구석으로 전학 온 수진이는 한동안 소문메이커였다. 그 중에서도 노란색 머리를 하고 노는 TV 속의 날라리처럼 밤늦게 읍내를 돌아다니던 수진이의 언니는 소문의 중심에 있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촌구석으로 이사 오면서 남자친구와 헤어지는 바람에 비뚤어져서 읍내 하얀손 미용실에서 샛노랗게 염색을 한 거란다. 수진이의 언니는 한동안 방구석에 처박혀 이별을 예감했다는 저 노래를 들으며 몇 날 며칠을 울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자 스리슬쩍 밥을 먹으러 나왔고, 한 달이 지나자 저 노래를 들으며 화장을 하며 친구와 약속을 잡았고, 한 달이 더 지나자 슬픈 노래는 언니의 MP3에서 지워졌다. 집을 사단이라도 낼 듯이 울더니 이제 언니도 익숙해졌나봐. 남자친구랑 헤어진 걸 인정한 거지. 엄마와 헤어졌을 때도 나는 울었을까. 지금의 나는 엄마가 없는 데 익숙해진 건가, 아니면 정말 모두 잊어버린 것뿐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엄마가 없다는 걸 인정하고 살기 때문일까. 헤어지는 것처럼 만나는 것도 익숙해질 수 있을까.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엎어진 명은 진동하는 세제 냄새에 얼굴을 퍼뜩 뗐다. 원래 쓰던 세제 냄새가 좋은데. 이불에도, 커튼에도, 교복에도 어느 새 새로운 냄새가 베이기 시작한 지 반 년이 지났어도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다.

쌍화차 3000(계란 추가 500)

아이스 커피 2500

따뜻한 커피 2000

우롱차 3000

 

입술을 우물우물 벽에 적힌 메뉴를 읽었다. 다 같은 커핀데 아이스가 더 비싼 이유를 모르겠다. 아무리 얼음이 들어간다 한들, 얼음이 들어가면 들어가는 커피 양은 훨씬 적을 텐데. 명이 왔나? 작은 구슬들이 꿰어진 새빨간 발을 넘기며 잎새다방 주인아줌마가 말을 건넨다. 제대로 닦지 않아 끈적끈적한 테이블 앞에 어깨를 세우고 앉아 메뉴를 읽던 명이 고개를 들었다. 열쇠를 잊어버려서 받으러 왔어요. 발보다 더 새빨간 입술 색을 하고 있는 주인아줌마를 다들 마담이라고 불렀다. 마담의 뜻이 뭔지는 명도 잘 몰랐지만 왠지 중학생이 그렇게 부르는 건 안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스 리! 느그 명이 기다린다, 얼른 타주고 일로 온나. 아드리아나의 이름은 곱슬머리 개구쟁이 내 동생처럼 이름은 하나인데 별명은 여러 개였다. 동네 평상 아줌마들 사이에서는 리아나, 잎새다방에서는 리아나의 앞 글자를 따서 미스 리, 아빠에게는 아드리아나였다. 미시즈라고 부르지 않는 건 다방에 찾아오는 아저씨들 때문인지, 영어를 모르는 주인아줌마 때문인지 모르겠다. 저 쪽 테이블에서 아드리아나가 빨간 봉지와 노란 봉지의 커피 믹스 중에 노란색을 집어 든다. 잎새다방에서는 따뜻한 커피를 탈 때는 좀 더 달콤한 노란 봉지를, 아이스를 주문받으면 좀 더 진한 느낌의 빨간 봉지를 쓴다. 뜨거운 물을 붓고 스푼으로 젓기 전에 알갱이가 뭉치지 않게 잠깐 기다리는 잠깐의 여유에 아드리아나가 손을 흔든다. 올라, ! 신나게 좌우로 손을 흔들다 건드린 통이 엎어졌다. 노란 커피 믹스 봉지가 탁자 위로 쏟아진다. 아이고~ 저 노무 가스나! 하루라도 그냥 지나가면 입에 가시가 박히나! 쯧쯧. 가시? 박혀? 됐다, 고마. 얼른 치우고 커피 내가라! 아드리아나가 딱 달라붙는 옷을 입고 쟁반을 든다. 듬성듬성 앉아 있는 동네 노인네들의 시선이 모두 달려들었다.

아빠의 끈질긴 반대도 아드리아나가 여기서 일하는 걸 막을 수 없었다. 하루 종일 읍내를 돌아다녀 봐도 한국말도 잘 못하는 여자를 선뜻 써주겠다는 가게는 없었다. , 열쇠 없어? 자초지종을 궁금해 하는 물음표가 끝나기도 전에 명은 열쇠를 팩 가로채고 돌아섰다. 발끝이 아픈 운동화로 턱턱 계단을 내려와 건물을 나선다. 문득 뒤를 돌아보자 반장분필체보다 더 촌스러운 글씨로 잎새다방이라 적힌 간판이 보인다. 마을버스를 타고 지날 때마다 이 간판을 보면 언제나 마지막 잎새가 떠올랐다.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면 자신도 죽는다고 생각하는 위층 여자를 위해 비를 맞으며 평생 떨어지지 않을 잎새를 그려주었다는. 하지만 아빠는 저걸 볼 때마다 잎새는 충청도 사투린데 왜 여기서 쓰냐며 불만을 내뿜을 뿐이었다. 그러나 아빠와 명, 둘 모두는 잎새다방에서 커피를 타는 아드리아나를 볼 때마다 아주 조금 울고 싶어질 때가 있었다.

 

동네 구멍가게에서는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아 읍내까지 나왔지만 명은 계속해서 망설이고 있다. 저 모퉁이 반대편에 명이 필요한 것들이 잔뜩 쌓여 있는데, 그곳은 왠지 명에게 금지된 곳인 것만 같았다. 새우깡, 사이다, 초코파이, 라면. 이런 것들과 섞이면 분간하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반대편에 있는 그것은 그 무엇과 섞인다고 해도 튈 게 분명했다. 명은 결국, 쓸데없는 과자를 사느라 한 달 용돈 3만원 중에 반을 써 버렸다. 꼭 필요했던 것은 손에 넣지 못했다.

아드리아나의 서랍에는 어른의 물건이 가득했다. 립스틱, 매니큐어, 봉긋한 속옷. 거기다 어제 촘촘한 계획을 세우고도 명이 사지 못한 것도 들어 있다. 아드리아나가 눈치 채지 못하게 2개만 슬쩍 가지고 나왔다. 이걸로는 하루도 못 버틸 테니 오늘 집에 가는 길에는 꼭 성공해야 한다.

명이 엄마가 외국사람이라매? 외국사람? 그러면 자는 한국 사람이랑 반반 섞인 거가? 그게 아니라 진짜 엄마는 한국 사람인데, 새엄마가 외국인인거지. 2년 동안 숱한 소문에 몸살을 앓던 수진이의 목소리가 명의 처지를 한 줄로 간략하게 설명해준다. 소문의 시선이 자신에게서 명으로 바뀐 것에 만세를 부르고 있을 거다. 변기에 앉아 아드리아나의 서랍에서 가져온 것을 팬티에 붙이려던 명은 얼마 전에 그랬던 것처럼 동작을 멈춘다. 새엄마가 술집 나가서 돈 번다카든데. 학교 컴퓨터실 인터넷에서만 볼 줄 알았던 카더라통신 덕택에 아드리아나는 순식간에 술집에 나가는 외국 사람이 돼 버렸다. 명은 조용히 팬티와 검은색 스타킹을 올린다. 덜컥. 문을 열고 나가니 거울을 보며 깻잎 머리를 정리하던 수진이와 아이들의 눈이 확 커진다. 교실로 돌아오는 복도에서 바라 본 운동장에는 오랜만의 가을비가 내리고 있다.

담임의 종례가 끝나고 똑같은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와아~하고 쏟아져 나간다. ‘오늘은 무엇을 배우고 가는가교훈이 적힌 교문 아래에 수많은 엄마들이 우산을 들고 기다린다. 똑같은 교복의 중학생 사이에서 엄마는 자신의 아이를 정확히 발견해내고는 손을 흔들거나, 소리를 친다. 엄마 여기 있어! 사과를 한 모금, 두 모금 베어 먹듯 교문 아래의 엄마들이 점점 홀쭉해진다. 단 한 명도 남지 않았을 때가 되어서야 명이 신발주머니를 머리에 이고 뛴다. 흙탕물이 찰박 찰박 튀어 종아리에 닿는다. 한 방울씩, 때로는 여러 방울씩 스타킹에 스며드는 느낌이 기분 나쁘다. 빠르게 뛸 때마다 운동장 모래 위로 깔린 타일 사이사이에서 엎드리고 있던 빗방울이 튀어 오른다. 마구잡이 날림 공사로 하루 만에 타일을 깔았으니 간격이 잘 맞춰져 있을 리 없다. 매일 밟고 지나는 아이들의 무게에 균열이 잔뜩 가 있다.

마을버스를 기다리면서 명은, 아주 잠깐, 그러니까 찰나보다는 조금 더 길고 1초보다는 조금 더 짧은 순간 동안 맞은 편 버스 정류장 옆에 서 있는 공중전화 박스를 쳐다보았다. 아드리아나가 파라과이에서 사 온 ‘2500과라니짜리 싸구려 가죽 동전 지갑 안에는 그만큼의 돈이 있다. 파라과이의 돈을 4로 나누면 한국의 돈이라고 했다. 600원 짜리의 지갑 안에는 오늘 다시 읍내 가게에 들르리라는 마음에 가져온 돈이 몇 천 몇 백 원 들었다. 100원이면 연결되는 공중전화. 100원도 들지 않는 거리에 아빠가 혹은 파라과이에서 건너 온 여자가 있었지만 명은 쉽사리 건너갈 마음이 나지 않았다. 갈까, 말까 움칠 움칠 발뒤꿈치가 움직인다. 그때 멀리서 15번 마을버스가 걸어 들어온다. 익숙한 기사 아저씨에게 꾸뻑 인사하고는 우산 없나? 느그 엄마는?’ 이라는 말을 듣기 전에 얼른 뒷자리에 자리 잡는다. 젖어서 밖으로 삐져나올지도 모르는 성장의 흔적에 명은 치마를 접시 모양으로 활짝 편 뒤 의자에 앉는 둥, 마는 둥 엉덩이를 걸친다. 맞은 편 버스정류장을 바라보며 멍청한 전화국의 사람에게 불평했다. 불공평하다. 저쪽에는 있고, 이쪽에는 없는 것이.

 

늦은 장마가 계속되는 일요일. 읍내의 역 근처와 잎새다방으로 두 사람이 출근한 덕분에 명은 오랜만에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다. 일어나서 양치질도 하지 않고, 누워서 TV를 보며 과자를 먹었다. TV에서는 저번 주 일요일에 했던 개그 프로가 또 나오고 있다. 아빠, 제 돌 사진은 어디 있어요? 니 방에 있겠지. 저는 못 찾겠으니까 좀 찾아주세요. 돌 사진을 이제 와서 어떻게 찾니. 설마설마 없는 건 아니죠? 니 방만 200갠데 그걸 어디서 찾아~?! 억만장자 흉내를 내는 개그맨을 보며 무대 근처에 앉은 사람들이 박장대소를 한다. 명은 안방 서랍장 어딘가 있을 제 앨범을 기억해내자 그것이 못내 궁금해졌다. 몸을 벌떡 일으키자 여기저기 묻어 있었던 과자 부스러기가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아빠가 여기 어디 놔뒀던 거 같은데. 명은 안방, 아빠가 간간히 적는 일기와 필요할 때 쓰려고 쟁여 놓은 등본과 새 지갑을 샀음에도 버리지 못한 오래된 지갑이 쌓여있는 서랍장 제일 아래에서 앨범을 찾아냈다. 갈색 바탕에 유럽풍의 디자인지 뭔지 금색 곡선이 유연하게 테두리를 치고 있다. . 앨범의 두꺼운 표지를 넘기자 초록색 스웨터에 노란 바지를 입고 있는 명의 돌 사진이 있다. 아들 낳고 싶었다더니 아들 키우듯 키우고 싶었는지 머리를 빡빡 밀어 놨다. 분홍색 원피스는 없나. 중얼거리며 한 장 한 장 넘기자 길지 않은 14년간의 시간이 쏟아졌다. 14년의 시간 중 절반 이전에는 젖을 주고 있는 엄마, 하얀손 미용실에서 수건을 쓰고 파마를 하고 있는 엄마, 평상에서 비슷한 뒷모습의 아줌마들과 밤을 파먹고 있는 엄마가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볼이 발그레한 명이가 항상 붙어있다. 14년의 시간, 절반 이후 어느 순간부터 앨범 속에는 명과 아빠 단 둘 뿐이다. 사진의 수도 급격히 줄었다. 마지막 한 장을 넘기다 손을 멈춘다. 무심하게 손톱을 깎으며 아빠가 보여줬던 아드리아나의 사진이다. 이거를 왜 여기 꽂아놨노? 사진의 귀퉁이를 잡고 쏙 빼냈다. 아빠의 일기와 등본과 오래된 지갑이 쌓여있는 서랍장에 아드리아나의 사진을 턱 던져둔 명이 앨범을 가지고 제 방으로 도망쳤다. 지워지지 않는 생활의 때를 지우려고 손톱을 깎던 아빠. 아빠는 아드리아나가 오기 전 날, 손톱을 아주 짧게 잘라냈다. 그게 지우고 싶다고 그래 지워지나. 생활 때라서 안 지워지는 거라매.

배가 살살 아프다. 그제 집에 오는 길에도 성공하지 못한 작전에 살금살금 다시 안방으로 들어가 어른의 물건이 있을 아드리아나의 서랍을 열었다. 웬일인지 텅 비어있다. 명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통증에 시달렸다.

 

열쇠방서 복사해 준다던 집 열쇠가 감감무소식이라 명은 오늘도 교복을 입고 새빨간 발을 넘긴 뒤 찐득이는 테이블 앞에 앉았다. 푸욱- 오래된 소파가 아래로 꺼진다. 주인아줌마도 피우고 다방에 놀러오는 아저씨들도 피우는 담배 냄새가 올라와 숨을 잠깐 멈춘다. , 열쎄 여기. 열쎄 여기. , 명이라니까. 열쇠가 쥐어진 주먹이 눈앞에서 펼쳐지자마자 잡아채고 퍼뜩 일어난다. 오래된 소파는 불편하니까. , 이거 가꼬 가, 집 가서 먹어. 미적지근하게 구부려진 손가락에 검은 봉지가 강제로 걸린다. 싫다 좋다 뭐라 하기도 전에 주인아줌마 눈칫밥에 아드리아나가 주방으로 후다닥 뛰어 들어간다. 기척이 줄어든 뒤 관심 없는 척 봉지 안을 들여다본다. 노란 봉지 대신 갈색 봉지가 들어 있다. 얼라도 아닌데 무슨 코코아고. 두 주먹은 되어 보이는 갈색 봉지를 들추다 명은 눈을 깜박이며 순간, 숨을 멈췄다. 읍내 가게, 어른의 물건이 쌓인 코너에 섰다가 주인아저씨와 눈이 마주쳤을 때도 이랬다. 갈색 봉지 밑에는 아드리아나의 서랍에 있던 것과 비슷한 물건이 숨어 있었다. 미스 리! 따뜻~한 커피 석 잔. 저쪽에서 빨간 봉지의 머리를 따고 뒤집어 손톱으로 탁. . 치는 아드리아나의 폼새가 편안하다. . . 말은 불편한데 동작은 익숙하다. 이유 없이 솟아오르는 눈물에 다시 한 번 숨을 참고 빨간 발을 넘기며 후다닥 뛰어 나왔다.

 

그래서, 누가 더 많이 때렸는데. 명이 니가 이겼제? 소문의 진원지인 평상 앞을 피해 뒷길로 뒷짐을 지고 걸어가다 한 번씩 명을 돌아보던 아빠가 말했다. , 몰라. 등허리에 뭉쳐 있는 아빠의 두 손만 보며 뒤따라간다. 머리카락은 내가 훨씬 더 늦게 놨다고 말할까 말까 잠깐 망설였다. 애초에 시작은 수진이 그 가시나가 했으니까. 그 가시나는 화장실만 오면 왜 그렇게 남의 욕을 해대는지, 하필 명이는 또 제 욕을 할 때 딱 맞춰서 변기에 앉아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이런 걸 요즘에는 타이밍이 제대로인 거라고 하더라. 수진이와 명이는 오늘 싸울 타이밍이었다.

, 명이 엄마 진짜 술집에서 일한대. 우리 동네 아저씨가 봤대. 엄마야, 진짜가? 명은 숨을 죽이고 그 가시나들이 화장실에서 사라질 타이밍을 기다렸다. 더 이상 소문의 주인공이 아닌 수진이의 입은 계속 가벼워지기만 했다. 올챙이 적 생각도 못하는 못된 가시나. 짧은 치마 입고 엉덩이 흔들면서…… 웃음 섞인 서울 말투가 채 끝나기도 전에 변기를 박차고 뛰어나갔다. 그리고 묻고 따지고 할 것도 없이 서울 가시나의 머리채를 잡았다. 가시나야, 이제 니랑 내랑 둘이 같이 소문 속에 들어가는 기다.

일거리가 없어 역 근처를 떠돌던 아빠가 선생님의 전화를 받고 달려왔다. 느그들 오늘은 쌍방과실이다. 또 주 뜯고 싸울까봐 부모님 오시라고 한 거니까 오시면 죄송하다카고 조퇴해라. 쌍방과실이 뭔지는 잘 모르지만 알 것 같기도 하다 싶었을 즈음 문이 열리기 전부터 허리를 구부린 아빠가 들어왔다. 선생님이 쌍방과실이라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아빠는 용서를 구할 무기를 꺼냈다. 쌩님, 죄송합니더. 엄마 없이 혼자 키우느라 제대로 못 갈켜서 그렇심더. 제가 혼꾸녕 낼 테니까 한 번만 봐주이소. 창밖으로 피구를 하는 반 친구들을 보던 명이 아빠의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휙 돌렸다. 거친 두 손 사이에 오른손을 빼앗긴 선생님이 어색하고 웃는다. 엄마 없는 자식으로 키우기 싫어서, 엄마 만들어주려고 파라과이에서 여자를 데리고 왔으면서 왜 이런 순간에는 엄마가 없는 게 방패가 되어야 하나. 아빠의 말은 말이 안 된다. 말이 안 되는 것 투성이다. 명은 허엉,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 왜 울고 그래. 당황한 수진의 서울말이 들려온다.

명아. ……. 명아. ……. 오늘 통닭 시켜 먹으까? ……통닭? 아드리아나 집에 오면 셋이 같이 통닭 시켜 먹자. 하든지 말든지. 명아. 뭐 또. ……. 뭔데. ……미안하다, 아빠가. 아빠의 목소리는 모기가 앵앵 대는 소리보다 작아서 모기를 잡으려 양 손바닥을 펴고 가만히 기다릴 때처럼 조용히 집중해야 들을 수 있었다. 느그 엄마랑 여서 손잡고 맨날 데이트 했다 아이가. 그때가 아빠 인생에서 제일 달달~했다. 아드리아나가 타주는 커피보다 더 달달하드라. 노란 봉지 커피도, 빨간 봉지 커피도 먹어본 적 없는 명은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어색하면 억지로 내뱉는 아빠의 헛기침 소리를 졸졸, 뒤따라 갈 뿐이었다.

 

학교 가는 버스에서 잠을 충전하는 사람들 사이로 흐린 하늘이 나타났다 사라지고, 나타났다 사라진다. 일기예보는 믿지 말라던 아빠 말을 믿고 우산을 놓고 왔는데 그것도 믿을 건 아닌가 보다.

띠잉. 서울 버스도 이럴까. 촌스러운 소리가 울리고 문이 열린다. 똑같은 교복을 입고 시대를 대물려 여전히 유행하는 클레오파트라 앞머리를 한 단발머리들이 펭귄 떼 마냥 우르르 내밀어졌다. 엄마한테 우산 가꼬 오라고 마치고 전화해야겠네. 까만 뿔테로 얼굴을 좀 더 가린 여느 클레오파트라가 말했다. 건널목 앞에 선 명이 좀 전에 지나온 길을 돌아보자 정류장 바로 앞에 공중전화가 서 있다. 저쪽에는 없었는데 이쪽에는 있다. 비가 억수러 많이 오면……. 신호가 바뀌고 한 박자 느리게 흰 선을 밟았다. 쪼금 오면 걸어가고, . 그리고는 나머지 생각을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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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다리 2018.03.11 15:00
    그림을 그리는 솜씨가 숙달된 조교 같네요.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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