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 죄형법정주의를 벌한다

by 적극적방관자 posted Dec 01, 2019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
먼저 익히 알고 있는 사실 하나. 작년 대한민국의 대통령선거 때, 무소속으로 대선에 뛰어들어 돌풍을 일으키던 안철수 후보가 선거 막바지에 전격사퇴를 선언했다. 그의 전격사퇴 배경에는 여러 요인이 있었겠지만 정권교체를 바라는 많은 국민들의 압박이 가장 큰 부담이 아니었을까 싶다. 초기의 돌풍이 확산되기는커녕 점점 거품이 꺼져가는 데다 후보 단일화에 대한 국민적 압박은 더 거세진 상황이 그를 내몰았을 것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그의 사퇴는 참 어정쩡했고 국민들의 후보 단일화 기대에 부응하기에는 다소 미흡했다. 그 전,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박원순 후보에게 양보하며 자신에의 지지를 몽땅 박 후보에게 옮겨줄 것을 호소하던 통 큰 양보와는 모양새가 많이 달랐던 것이다. 그것은 이 후 그가 취한 행보에서 스스로 증명해 보인 바이기도 하다. 어쨌든 그의 사퇴는 박근혜 후보를 위시한 여권에 제법 위협으로 작용했을 수 있다. 몇 달 후 권좌에서 물러나야 하는 이명박 대통령에게는 더할 나위 없고.

여기서 단순한 가설 하나를 추론해 보자. 이 가설은 아무 구체적인 증거 내지는 자료랄 게 없는 100% 필자의 생각에만 근거한 것임을 전제한다.
때는 대선 막바지, 안철수 후보가 사퇴한 상황이다. 여차하면 전두환, 노태우 두 전임과 같은 길을 가게 될 수도 있는 이명박 대통령 측에서 박근혜 캠프에 모종의 딜을 제시한다. 이미 5년 전 서로 독화살을 쏘아 대던 사이이기도 하고 현재도 차별화로 등 돌린 관계이기도 하지만, 이대통령으로선 그래도 야당후보보다는 자당후보가 나으리라는 판단 하에 퇴임 후 안위보장과 국가기관의 선거지원을 맞바꾼다. 준비된 대통령의 위상에 적잖은 데미지를 입고 있는 박 후보로서도 나쁠 게 없는 제안이다. 한가지 걱정은 나중에라도 이 추잡한 거래가 발목을 잡는 것이지만 그건 어쨌든 나중 일이다. 그리고 이런 추잡한 거래에 왕초들의 직접 관여는 천부당 만부당한 일일 터이니 그저 상전의 심기를 헤아린 철딱서니 없는 수하들이 도모한 ‘극히 유감스러운 일’ 정도면 되는 것이기도 하겠고.

우리 속담에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 막는다’는 말이 있다. 작은 문제가 생겼는데 바로 적절히 대응해 해결하지 못하고 미적대고 감추려다 더 큰 문제를 만드는 어리석음을 경계하는 말이다. 우리 대통령 상황이 이렇다고 말하는 건 대단한 결례일까?
어제 대통령은 정홍원 국무총리의 입을 빌어 국정원 댓글을 포함한 일련의 의혹에 대해 철저히 조사하겠다는 다짐과 강도 높은 국정원 개혁을 천명했다. 형식은 국무총리의 담화였지만 그건 곧 대통령의 말이었다. 그런데 참 유감스럽게도 진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버티다 버티다 어쩔 수 없어 하면서도 마치 선심이라도 쓰는 듯한 모양새를 취한 것 때문이다.
선거에 개입한 국가기관은 국정원만이 아니다. 대통령이 국정원을 싸고 도는 동안 국방부와 보훈처 두 곳의 개입이 추가로 드러났는데, “국정원으로부터 여하한 도움도 받지 않았다’는 대통령의 눈만 애써 ‘의혹’ 수준으로 보고 있을 뿐, 많은 국민들 앞에는 이미 어느 정도 확인된 사실이다. 게다가 앞으로 또 어떤 국가기관의 선거개입이 튀어 나올지 모르는 상황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국민에게 개혁을 약속하는 대통령의 입에서 국정원만 나와서는 안 되는 것이란 얘기다.


믿음을 주지 못한 데는 형식도 일조했다. 대통령은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삼성과 두산의 3차전 경기에 나가 시구를 했다. 대통령이 언제부터 프로야구에 관심이 많았는지, 두 팀 중 어느 한 팀의 열혈 팬인지 등은 모르겠으나 확신하건대 사소한 재미 따위로 그런 행보를 한 건 아닐 것이다. 아마도 거창하든 아니든 국민들과 소통하기를 원한다는 의지 같은 걸 보여주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방향이 틀려도 한참 틀렸다. 사안의 경중(輕重)을 모르는 것인지, 모르는 체 하는 것인지 의아하다. 전체 국민을 상대로 하는 담화에는 총리를 내 보내고 일부 계층을 위한 행보에 직접 행차를 하는 것이 과연 국민통합을 추구해야 할 리더로서 합당한 처신인지를 묻고 싶다. 단언컨대 그건 대통령 스스로 자신을 대한민국 전체가 아닌 일부의 대통령으로 격하시키는 우행(愚行)일 뿐이다.

지금 대통령의 행보는 필자 같은 이들의 다소 억지스런 가설에 개연성을 더해주고 있다. ‘알았든 몰랐든 도움을 받은 건 기정사실이고, 알고 받았었을 경우, 쳐낼 때의 반발이 염려되어 과감하게 환부를 도려내지 못한다’는 가설 말이다.
대통령 취임 전, 시작된 조그만 눈덩이(국정원 여직원의 댓글 의혹)가 근 1년을 굴러오며 엄청나게 몸집이 불어났다(추가로 드러난 국방부와 보훈처의 개입). 이제 국내뿐 아니라 세계의 이목도 한국의 대선부정을 거론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아직까지는 절대 다수가 설령 있었다 해도 그 도움이란 게 결과에 크게 영향을 끼치진 못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생각과 믿음이란 건 시간과 환경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 해서 대통령에게는 더 이상 미적거릴 시간이 없다.
이런 긴급함을 대통령이나 측근 인사들 같은 잘난 이들이 모르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그들에게는 실질적인 힘이 있어 “네 깟것들 떠들어 봐야 변할 건 없다”는 배짱이 부목 구실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다.


이 글은 전임정부 초기 박 전임의 시행착오에 대해 지적했던 것입니다. 5년도 더 된 옛날 일을 새삼스레 꺼내는 건 지금 정부 역시 삐딱한 부목에 기대 국민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있지 않나 싶은 실망 때문입니다. 바로 조국 사태를 말함이지요.
유시민, 공지영 두 작가들이 무엇때문에 그렇게 열심히 그 일가를 옹호하는지는 모르겠으나 가족이 저지른 잘못을 자신의 목숨으로 사죄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진정을 욕보이는 생각 없는 짓이 아닐런지요.
이제 몇 개월 뒤면 민의의 심판이 있을 터인데 깨어있는 시민의식의 엄중함을 대통령과 참모진, 그리고 집권 민주당은 무겁게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죄형법정주의를 벌한다

 

에피소드1.

조선시대 몇몇 유명한 기생 중의 한 사람인 황진이.

빼어난 미모로 사대부들의 애간장을 녹이는가 하면 고승 지족선사의 앞에선 스스로 옷을 벗어 그를 파계시키고 그 위선을 통렬히 꾸짖는 기개를 지녔으며 시문에도 능해 그 자신 송도3절 중 하나로 추앙 받으며 화담 서경덕 등 당대의 명사들과도 거리낌 없이 교류를 했던 여인.

자신의 시조 외에도 후대의 한 문인이 지은 추모 시로 그 격이 더욱 돋보인데다 가끔은 사극의 주연으로 부활해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그리 낯설지 않은 이름 황진이.

그녀의 많은 일화 중 하나.

그녀가 10대의 규방처녀로 있을 적에 신분 낮은 이웃집 총각 하나가 그녀를 연모했다네. 아마도 뜨락 안의 진이를 훔쳐보았거나 담 밖으로 솟은 그네 뛰는 정경을 보았거나 중 하나일터. 어쨌거나 그는 신분의 격차를 어쩌지 못하고 얼마 못 가 상사병으로 그만 세상을 뜨고 말았는데, 그의 상여가 나가는 길에 하필 진이 집 앞에서 요지부동 꼼짝을 않더라나. 이 난감지경에 아들이 죽기 전 사연을 들은 그 어미가 염치 불구, 황진이에게 사연을 고하니 이 당찬 소녀 거동 보소. 그 자리에서 입고 있던 치마를 훌렁, 옛다! 상여를 덮으니 그제야 상여가 움직였다는 말씀.

믿거나 말거나 이것이 황진이라는 명기(名妓) 탄생의 계기로 전해진다.

그렇다면 과연 황진이는 이 죽음에 얼마만큼의 책임이 있을까?

요즘 굳이 연인이 아니어도 남녀 간 별 스스럼 없는 어느 정도의 스킨십은커녕 일면식도 없는 동네 총각의 죽음에 그녀가 일생을 희생하는 죗값을 치른 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 그녀의 죄라고 해야 고작 뭇 사내들을 설레게 할 만큼의 미모가 부지불식간에 그 총각에게 노출된 것뿐 일 텐데, 그 노출을 그녀가 의도했을 리 없다는 걸 전제하면 미필적 고의(未必的 故意)조차도 개입될 여지가 없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가 그 엄청난 죗값을 스스로 치른 건 요즘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에피소드2.

불과 60여 년의 짧은 세월에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동시에 이루었대서 세계인의 주목을 받는 내나라 대한민국이 첨단을 달리고 있는 몇 가지 중의 하나가 OECD국가 중 자살률 최고라는 불명예란다.

청소년과 중장노년층을 굳이 특정할 수 없을 만큼 전 계층에 (자살이) 만연한 실상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제 한 몸이라는 좁은 생각이나 남의 일이라는 타인의 무관심, 특히 자살을 미화하고 동조자를 공개적으로 모집하는 SNS의 확산은 어쩌지 못하고 자살예방프로그램 조차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사회분위기가 잠재적 자살자를 양산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건 타인을 살해할 때보다 더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는데.

한 청소년이 학교에서의 왕따를 견디지 못해 꽃다운 목숨을 스스로 끊었다.

한 청년이 계속되는 취업에의 좌절로 작아질 대로 작아진 그 몸을 스스로 응징했다.

중년 또는 장년의 가장이 젊은 시절 몸바쳐 일한 직장에서 명예퇴직을 당하고 전 재산 털어 창업을 했는데 그마저 잘 되지 않아 빚으로 연명하다 보니 거액의 채무를 지게 됐고 그로 인한 압박감과 자괴감이 어우러져 그만 삶의 끈을 놓았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자살의 유형들이다.

차가운 남의 눈으로만 보면 이들은 모두 소심함이나 무능력 등 스스로에게 죽음의 이유가 있었고 저 스스로 제 몸을 죽인 것이다. 그러나 따스한 이웃의 눈으로 본다면 이들의 죽음에 본인 외적인 무엇도 작동하고 있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청소년을 왕따 시킨 친구들이나 한 가정의 가장을 협박한 사채업자, 그리고 앞날이 창창한 청년을 무가치한 인생으로 만들어버린 사회 등의 미필적 고의가 이들을 극단의 선택으로 내몰았을 개연성을 간과해선 안 된다는 말이다.

 

결론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지 2달 가량이 되어 간다.

그녀의 대통령 당선에는 평소 입버릇처럼 되 뇌이던 원칙고수 이미지와 경제정의 실천 공약이 크게 한 몫을 했다. 반이 넘는 국민이 그녀의 말을, 또 이미지를 믿었다.

그런데 평가 받기에 너무 짧은 세월이긴 하더라도 벌써 이곳 저곳에서 불만의 목소리들이 터져 나오고 있는 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대표적인 것으로 인사실패가 거론되고 있는데 그녀가 임명하고자 했던 장,차관급 인사 중 10여 명이 낙마했거나 부적격자로 여론의 지탄을 받고 있다.

그들은 하나같이 잘난 사람들인 만큼 재산 역시 남들보다 많았는데 그 많은 재산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딱히 범법이라 하기 애매한 부분과 관행으로 포장된 위법성 행위들이 적잖이 발견된 것이다.

우리 형법은 대부분의 민주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죄형법정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즉 죄와 그에 따른 형벌은 법의 테두리 안에서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누군가가 아무리 도의적으로 큰 비난을 받을만한 행위를 했더라도 그 행위를 법이 죄로 정하지 않았다면 죄가 성립되지 않는 것이고 그에 따른 처벌도 당연히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이다.

앞서의 두 사례는 같으면서 다르다. 두 사례 모두 죽음에 직접적인 행위가 개입되지 않았기 때문에 죄 자체가 성립되지 않고 따라서 처벌도 있을 수 없다. 하지만 각개 사안의 양상은 조금씩 다르다.

황진이는 총각의 죽음에 도의적인 책임을 느끼고 스스로를 중하게 처벌했다.

친구를 자살로 내몬 가해 청소년들은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움을 겪겠지만 법의 처벌은 받지 않는다. 가장을 협박한 사채업자의 경우도 협박의 강도에 따른 처벌은 받겠지만 살인죄를 적용 받지는 않는다. 두 경우 모두 죄형법정주의의 너그러움 덕분이다.

청년을 자살케 한 사회의 경우는 더 고약한 것이 앞서의 혜택(죄형법정주의의 너그러움) 외에 처벌의 대상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점일 것이다.

고위 공직자들의 삶이 보통 사람들의 그것과 같다면 그 사회는 더 이상 볼 것 없는 암담한 사회가 될 것이다. 바라 볼 지향점도 없고 동기 부여도 되지 않는 사회는 발전동력을 상실하는 것이 필연이고 그것은 결국 정체를 거쳐 퇴보를 거듭하면서 사람들로부터 의욕을 뺏어가 죽은 사회가 될 게 뻔하기 때문이다.

공직이란 말엔 사회에 대한 봉사의무가 내포돼있다. 그 의무이행에 방해를 받지 말라고 일반인들은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이런저런 권력까지 함께 부여하는 것이다.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 했던가. 힘을 주어 놓고 엉뚱한 욕심은 부리지 마라 하니 이만한 모순이 또 없다. 그렇지만 그 모순 또한 현실인 걸 어쩌랴.

이미 낙마했거나 낙마가 예상되는 이 정부의 고위 공직자 후보들 역시 앞서의 경우들처럼 법에 의한 처벌을 받을 만큼의 범법행위가 있어 보이진 않는다. 그저 훨씬 많은 못 가진 자들의 시기심과 열등감이 그들의 행위를 정죄하고 있을 뿐.

………. 

바야흐로 훨씬 복잡해진 현대사회는 한계점에 이른듯한 죄형법정주의를 멍석말이라도 해버려야 하지 않을까 싶다.

 

 

3년 전 겨울 이 정부를 출범시킨 많은 소시민들은 이 정부가 희망을 보여주길 바랬을 것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정부는 희망 대신 구태의 답습만을 보여주는 것 같다.

조국, 그는 법에 대해 일반인들 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고 그걸 학생들에게 가르치기까지 하는 사람이다. 감히 나 같은 자가 그를 가르치려 드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겠지만 그가 이 글을 볼 수 있다면 참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