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카게 살자

by 적극적방관자 posted Dec 02,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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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카게 살자' 얼굴 등에 칼자국 좀 있고 험상궂게 생긴 사람이 이렇게 문신 새긴 팔뚝 보이며 지하철이나 버스 등에서 볼펜 따위의 잡다한 물건을 다소 비싼 값에 팔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는 적당한 상소리 섞어가며 교도소를 집처럼 들락거린 자신의 이력을 자랑스레(?) 늘어놓은 뒤, "마음잡고 착하게 살려는데 사회가 도움을 안 준다. (취직이 안 된다는 얘기) 그래서 이거라도 팔려고 나왔다"며 앉은 사람 무릎마다 5개들이 한 세트씩 돌려가며 강매를 하고 있다.(거부하는 경우, 인상도 써 가며)

본국에서 중. 고등학생 시절 포함, 성년의 세월을 다소라도 살다 온 사람이면 한두 번쯤 본 듯한 그림일 것이다. 개중에는 '울며 겨자 먹기'로 필요 없는 물건을 바가지까지 써 가며 산 경우도 적지 않을 것이고.

나도 그랬다. 이제 고백이지만 잇 사이로 침 찍 뱉으며 인상 쓰는 바람에 오금이 다 저렸던 적도 있다. 이들이 그 뒤에 정말로 착하게 살았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그들 말마따나 계속 교도소 들락거리며 '차카게' 살지 않았을까? '착하게' '차카게'의 차이가 어디에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착하게 살라고 가르치지, 결코 차카게 살라고 가르치진 않는다. 그러나 그마저도 구체적인 방식이 제시되어 있지 않고 설령, 있다 해도 저마다의 입장 차이가 있어 누군가에게 선이 되는 것이 또 다른 누구에겐 악이 되는 모순도 종종 발생하니 헷갈리지 않을 수 없다. 앞서 무뢰배들의 행위도 공포분위기 속에 필요 없는 물건을 사게 된 사람들에겐 악이겠지만, 무뢰배 자신이나 그 가족들에겐 선으로 작용할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이쯤 써 놓고 보니 내가 보기에도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주절댄 것 같다.)

성경은 함부로 남을 정죄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다. 원죄를 안고 태어난 인간은 스스로 죄인이기 때문에 선악을 논할 자격이 애당초 없다는 것이고, 오직 선한 건 하나님뿐이기에 인간이 누군가를 정죄한다는 것은 지고지순의 권위에 도전하는 있을 수 없는 중죄란 것이다. 그럼에도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인간은 누구나 선악을 논하고 남 정죄하기를 밥 먹듯 한다.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불륜'이라고, 그 기준도 지극히 자의적이어서 자신이나 자신의 패거리에는 관대하고 남의 행위에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다.

설령, 내 새끼가 남에게 피해를 주었더라도 누군가가 내 새끼를 책망하면 눈 뒤집히는 게 부모의 속성이요, 내 형제 맞는데 게거품 물고 달려드는 대신 앞뒤 따지고 있으면 그건 형제도 뭣도 아니고 인간 말종 취급 받는다. 잘잘못이나 사리분별은 차후 문제인 것이다. 쌍으로 맞아 디질 망정 일단은 달려들고 보아야 인간 대접 받는다. 원초적인 패거리문화에 다름 아니다.

우리 18대 국회의원들이 딱 이 수준이다. 금년 초 외교통상위원회의 해머와 소화기 활극으로 국제적 망신을 자초했던 기억이 지워질 만하니, 잊힐세라 또 한 번 난장을 펼쳐놓았다. 의원들만으론 쪽수가 모자라다 싶었는지 보좌관에, 비서진에, 동원할 사람들은 다 동원했다. 그나마 돈 주고 조폭 떨거지들 동원 안 한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여든 야든 각기 나름의 명분은 있을 터다. 갭이 워낙 커서 대화로는 타협이 요원할 수도 있겠다. 그럴수록 머리를 맞대야지 주먹을 맞댄다고 해결이 되는가. 의원들은 물론이고 피고용인인 보좌진 중에서도 지도부와 생각이나 선악의 척도가 다를 수 있을 텐데, 이 다름의 표현자체가 원천적으로 봉쇄돼 있다. 의원들은 차기 공천 등 줄 대기를 위해, 피고용인은 생계유지를 위해 중뿔나게 튀어서는 곤란한 것이다.

완전한 공산주의가 허상임을 갈파하고 그 중 낫다 싶은 민주주의를 택했으면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상대편을 존중할 줄도 알아야 하는데, 역사가 일천한 탓에 역량이 부족해서인지 이게 안 된다.

그저 '내 말'만 옳고 '네 말'은 모두 그르다. 아니 글러야 한다. 아무리 다수가 옳다 해도 '네 말'은 조작이요, 거짓일 수밖에 없다. 민주 제도의 다양성과 양면성 중에서 내게 유리한 것만 취한다. 법을 만들고 그 법에 의해 권위를 덧입은 사람들이 스스로 법을 뭉개고 표리부동을 밥 먹듯 해 댄다. 다수결의 원칙은 뒷전에 팽개치고 불리하면 소수의견의 존중 운운해가며 거리로 나가 '땡깡'을 부린다.

물론 소수의견도 존중되어야 한다. 다수가 항상 옳은 것도 아니고 다수의 횡포에 소수가 억울한 피해를 입는 일도 없지 않은 탓이다. 하지만 소수의견이 존중 받는 데는 정도의 한계가 있다. 무한정 존중하다 보면 소수를 배려한다는 명분으로 다수에게 피해를 끼치는 민주제도의 대원칙에 위배되는 일도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주주의에서는 선거라는 제도를 통해 주인 되는 백성들로 하여금 순간의 최선을 택하도록 하고 있다. 견제와 균형을 위한 장치마련과 함께.

문제는 이런 규칙에의 준수의지에 달렸다. 다중의 선택이 나의 이익과 부합되면 제반 규칙이 모두 지극히 당연한 것이 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엔 천하 없는 악법이요, 온통 돼먹지 못한 권위주의의 산물로 매도해 버리는 건 민주주의의 왜곡이요 독선이다.

시종 같은 것을 두고 이렇듯 평가가 다른 것은 네가 아닌 내가 중심에 있기 때문이다.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다 보니 내게 이로운 건 선이요, 나와 등진 건 악이라는 극단적 이분법이 횡행하고 있다. 남을 배려하거나 양보하는 마음이 애저녁에 없으니 조율과 타협이 달가울 리 없다. 눈치에 쫒겨 대충 시늉만 하는 것으로 어찌 큰 타협을 이룰 수 있겠는가? 보다 가관인 건 여당도, 야당도 하나같이 올챙이 시절을 생각 못하는 개구리를 닮았다는 것이다. 그저 네가 전에 이렇게 했으니 나도 같이 할 뿐이라는 것이고 소위 선량이라는 잘나고 많이 배우신 양반들이 하나같이 무뇌충 마냥 지도부에 맹종하고 있는 작금의 모습이다.

18대 국회도 1년을 지나고 있다. 그 기간 동안 18대 국회가 한 일이라곤 쌈박질과 장외투쟁 밖에 없는 것 같다. 하도 들은 말이라 별 무게감을 못 느끼는지 모르지만 국민 무서운 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매번 벼르다가도 도로 그 인물 뽑더라고 "그 국민이 그 국민이지. "해서는 안 된다. 앞으로의 상황은 절대 녹록치도 않겠지만 2012년부터는 200만 가까운 해외동포의 눈이 가세할 것이기 때문에도 그렇다.

분풀이라도 하듯 내키는 대로 쓰다 보니 어느새 누군가를 정죄하는 글이 되고 말았다. 내 꼬라지를 알지 못하는 주제넘음에 다름 아니란 생각에 쓴웃음이 나온다. 얍삽한 잔머리로 우주만물을 창조한 창조주의 섭리에서 '주제넘음'의 변명꼬투리를 찾아본다. 창조주는 식물, 초식동물, 육식동물을 만들고 그들의 속성을 영속화시킴으로써 그들이 땅을 매개로 서로가 서로의 먹거리가 되는 순환구조를 창조했다. 어느 날 토끼가 풀 먹기 싫다고 짐승의 고기를 먹는 일 없으며 날개 있다고 새가 죽어서까지 허공에 떠 있진 못한다. 그 토끼 잡아먹었다고 여우를 정죄하진 않지만 그 여우 죽으면 땅으로 흡수돼 식물 성장의 자양분이 된다.

또 다시 횡설수설이다. 궤변 같지만 이 세상은 애초부터 자기중심일 수밖에 없도록 창조됐음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고로 여당이든 야당이든 그 관점에서 볼 때 선을 행했다. 자알했다. 그들에게 딴죽을 건 나도 나름 선을 행했다. '차카게' 산 조폭도 그 깜량엔 나름 선을 행했을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