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7회 창작 콘테스트 시 부문 <그릇의 밤>외 4편

by 리미 posted Jan 10,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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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지만, 다른
조혜림


지도 위 가위표를 찾아 헤매기를 오래

적도의 우기가 밀림을 찾아왔다

멈출 줄 모르는 스콜에 강은 범람하고

떠내려간 먹이를 찾아 맹수들이 움직인다

나무들이 매우지 못한 공백을 먹구름이 가득 채워

해와 달을 구분할 수 없다

어둠을 혼자 걷다 우리는 만났다

활엽수 잎 아래 숨어 맞댄 어깨가 눅눅한 숨을 터트린다

심장 소리에 묻혀 반대쪽 어깨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몰랐다

강의 밑바닥 오물에 잠겨 죽어도 행복할 만큼

열락에 취해 젖어 내렸다

 

문득 구름 사이로 하늘이 노을을 토해낼 때

푸르게 떠버린 몸을 본다

병에 걸려 차갑게 식어버린 머리가

사랑인 줄 알았던 모든 것이

습지의 안개가 만들어 낸 거짓임을 깨닫는다

비를 맞으며 잎을 나눌 바엔 도망치는 편이 낫다

그제야 한발자국 몸을 옮겨보지만

머리와 발을 관통해 뿌리내린 축에

제자리를 빙빙 도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우기는 끝날 줄 모르고,

붉은 선 위 너와 벗어나려 하는 나

사이,


    

산다는 건*

조혜림 

산다는 건, 오물이 가득한 구덩이에서

역한 악취에 구역질 하고 그 위를 뒹굴며

자조의 웃음을 짓는거야

 

엎드린 나의 등은

올라가려는 자들을 돕는 발판이 되고

손을 뻗어보지만

올라간 자들은 자리를 지키고자 머리를 짓눌렀지

 

벽을 오르다 손톱이 다 뒤집히고

바닥에 미끄러져 뼈가 살을 뚫고 튀어나와

더 이상 떨어지고 싶지 않아

썩어 냄새나는 지푸라기가 내려온다면

거친 표면에 손 살갗이 다 찢기도록 부여잡아

끊어지지만 않는다면 파고들어도 괜찮아

누군가를 보듬을 손은 필요 없어

 

인간임을 망각한지 오래

그저 위로 가고 싶어

소중한 친구의 잔에 극약을 풀어

앙리 나와 잔을 부딪쳐 단숨에 들어

이 술은 나를 성공으로 그 위로 올려주겠지

앙리 이해해 짐승과 괴물의 우정에 양심이 어디 있나

 

나는 이 바닥이 싫을 뿐

추하고 더러운 비상이라 욕하지 마


괴물의 피를 뒤집어쓴 짐승의 비행이 얼마나 아름다울까


*뮤지컬 <프랑켄슈타인> , 절망적인 삶을 사는 까뜨린느가 자유를 위해 괴물 앙리에게 독약을 먹이기로 다짐하며 부르는 노래.


    


취조실

조혜림 

방 한가운데 길게 늘어진 주백색 전구

오직 그 불빛에 의지해 주변을 둘러본다

 

취조실의 형사에게 온전히 집중하지 못한다

 

벽 틈으로 문 밖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누구의 대화 소리일까?

, 환청인가

무의식의 소리일수도

 

괜히 몸을 꼬다가 벽의 그림자에게 미소 짓고

마디마디 공기방울 터지는 소리에 장단을 타본다

 

형사님 저는 묵비권을 행사 할게요

내가 잘하고 있는지 몰라요

 

그냥 잠시만 밥 먹고 커피 한 잔 할까요?

  


마녀사냥

조혜림 

영웅의 임종을 앞두고 마을 사람들이 모였다

흰 머리의 검버섯이 인상적인 영웅은 사람들 사이에서

마지막 이야기를 한다

 

회색 돌무더기 산 위에 마녀가 살았어

 

커다란 망원경으로 우리를 지켜보다가

햇빛을 민들레 홀씨처럼 부수고

어린 아이를 잡아가서 잡아먹는다는 거야

 

마녀를 잡으러 가자

아이들을 구하고 영웅이 되자

그렇게 다짐하고 우리는 길을 떠났어

 

돌무더기 산을 기어오르다

굴러 떨어지는 바위에 머리가 깨져 친구가 죽고

미끄러져 절벽 아래로 떨어져 아우가 죽었지

 

맹수조차 나오지 않는 산을 헤매고 돌아 도착한 곳엔

꽃이 만발한 정원을 뛰노는 아이들과 가축 몇 마리

그리고 책을 읽는 여자 하나가 눈에 띄었지

 

여자를 잡에 꼬챙이를 끼워 넣고 화덕에 던져 불태운 뒤

산을 내려왔더니 난 영웅이 되어 있더군

 

(사실 마녀는 없었는데 말이야)

 

영웅은 눈을 감았다

마을 사람들은 노망난 영웅을 기리는 동상을 세웠다

아무도 그를 탓하지 않았다


 

그릇의 밤

조혜림 

.

 

밤과 별이 뒤섞여 쏟아진다

하늘 바닥을 가득 채울 때 쯤

물을 머금은 투명한 안개가 흘러온다

 

별과 안개는 밤에 뒤엉켜 깊어진다

몽롱함에 취해

꼴딱, 꼴딱 밤을 지새우다가

기울어진 밤사이로 문득 아침을 본다

 

밤의 미련을 탁 털어

찌꺼기만 남은 그릇을 구겨 버리고 돌아선다

나는 오늘도 밤을 삼키고 아침을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