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달린다>
달리지 않으면 그 이름 붙여주지 않기에
바람, 달린다
아직 어둠이 내려앉은 새벽녘
얼어붙은 창문을 흔들어 아침을 깨우고
사람 북적이는 출근길 거닐며 짓궂게 장난친다
햇볕이 늘어지는 점심시간
바람도 낮잠이 오는 듯
살랑살랑 걸을걸이를 늦춘다
해 저문 퇴근길
집 향하는 발걸음들 등 떠밀고 나면
그제야 산언저리 내려앉아 잠시 쉬었다 간다
달리지 않으면 그 이름 붙여주지 않기에
내일도 바람, 또다시 달린다
<빈껍데기다>
태어날 때부터 빈껍데기였다
모진 풍파에 휩쓸려 이리 부딪히고 저리 부딪히고
거센 강물에 휩쓸려 천지를 떠도는 동안
나는 내가 하나의 값진 광석인 줄 알았더랬다
비로소 큰 바다에 다다랐을 때,
나의 단단함이 깨어졌을 때,
그때 비로소 빈껍데기임을 알았더랬다
수만 리 달려온 길을 거슬러 갈 수도
부딪혀 빛 잃은 껍데기를 자랑할 수도 없기에
넓은 바다를 떠돌며 가루가 되어야지
큰 대양의 양분이 되어야지
<날치>
칠흑 같은 어둠이 싫다
콧속을 메우는 이 비릿함도 싫다
바다가 싫은 물고기는 어디로 가야 하나
폴짝폴짝
해수면 너머로 고개 내보지만
찰나의 자유는 오히려 숨통을 조여온다
<별빛>
내 삶의 가장 빛나는 모든 시간은
그 빛이 모두 바랜 후에야 알게 되더라
작열하는 태양 아래선 제 모습을 감춘 별빛이
어둠 속에서 환한 빛 내듯
삶에 어둠이 드리워지고 나서야
아, 그것이 찬란한 빛이었구나 하고 깨닫게 되더라
<밤바다의 온도>
어느 무더운 밤이었나
돈이 없던 우리가 향한 곳은 광안리였다
마땅히 할 것도 없이 그저 걷기만 했었다
무슨 얘기를 하든 어디로 향하든
그것은 아무 상관없었다
그저 맞닿은 손이 이야기를 이어가게 할 뿐이었다
평생 더울 것만 같았던 여름의 밤바다는 머지않아 가을이 되었고
바뀐 것이라곤 고작 바람의 온도와 빈손뿐이었다
작성자 : 이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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