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테스트 응모] 쌀쌀한 날의 다정한 안부 외 4편

by 김아일랜드 posted Feb 06,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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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쌀한 날의 다정한 안부

 

천이 바람에 흩날리는 걸 좋아해요

바람 안에서 천은 율동 같은 것이니까

 

옛 생각이 나요

당신을 잃었던 가을밤의 구름

그 움직임이 천의 바람을 닮았어요

 

천이 감색으로 물드는 걸 좋아해요

감색 안에서 천은 물들어감그것 뿐이에요

 

그만 편지를 멈춰요

지나간 문장은 천이 될 수 없으므로

나의 전부일 수 없으므로

 

입 안에 묵음이 뜨거워

쌀쌀한 날에 창을 닫아요

 

창밖으로 천의 음률을 들리네요

마른 침에 감색 달이 넘어가요

 

/


엔딩 크레딧

 

1.

금으로 익은 보리 술은

여전히 바람을 기억하고 있을까

 

바람에게서 안개 냄새가 난다

 

새벽에는 철새가 울었다

 

2.

나는 꿈을 꾸고 있었다

잠결에 새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꿈으로 안개가 몰려왔다

 

이해할 수 없었으나 흥미로웠던

영화가 다시 보고싶었다

 

3.

귀에서 깃털 하나가 나풀거렸다

 

깃털이 가른 허공의 틈으로

자욱히 안개가 스며들었고

꿈은 기억나지 않았다

 

4. 롱테이크 (새벽, 안개)

새 한 마리가 청보리숲을 지나 날아간다

이르지 못할 남쪽의 북쪽을 향한다

 

5. 클로즈업

청보리 위 금빛 깃털 하나

바람에 날려 안개 속으로

 


/


얼마 후

 

얼마 후

 

슬픔의 울음 소리가 들렸다

 

아무도 듣지 못했지만 나는 들었다

 

어둠이 문을 닫고 들어왔다

 

얼마 후

 

울음 소리가 그쳤다

 

어둠에게도 그림자가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슬픔의 생애를 알았다

 

얼마 후

 

울음이 터져 나왔다

 

슬픔이 서식하는 것들에 대하여

 

어둠은 모든 그림자를 바쳤다

 

얼마 후

 

슬픔이 어둠의 그림자에게 물었다

 

당신에게도 서식처가 있나요


/


농담이, 그렇게

 

한 몇 년쯤 사랑을 하기 위해 숨어 있었다

두 번 다시 사랑을 겪지 않아도 될 만큼 춤을 추고 사랑을 해보려고

이 모든 허사는 증명될 것인가

 

1.

가끔씩 유년의 기억이 떠올랐지만 곧 그믐처럼 감겼다

언젠가 숲처럼 떨며 울었던 시절이 우스워졌다

나는 그 시절로부터 떨어진 잎새 하나를 들었다

 

2.

마야인들은 나뭇잎으로 모래 위에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마야의 마지막 소년은 그 유산을 안고 떠났다

소년은 갈대숲 사이로 들어갔다 청명한 바람이 불었다

 

3.

모래가 일어 마야의 그림은 덮였다

마야인이 유일하게 그릴 수 없는 것은 바람이었다

 

4.

죽음은 완벽했다 늘 생이 모자랐을 뿐

문제는 사랑을 갈구했던 우리가 반 정도만 맞았다는 것이다

아주 틀리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5.

미아는 결코 자신을 길 잃은 타인과 비교하지 않는다

시인은 살아서 한 줄의 시도 되지 못한다

바람을 그릴 수 없듯, 한 줄 바람도 쓰일 수 없다

 

저기, 아무것도 아닌 농담이 싸르륵 웃어 갈대숲을 흔든다


/


너와 나의 아스파라거스

 

아스파라거스의 질감에 대해서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아스파라거스의 소원은 한 그루의 나무가 되는 것이었다

자라고 보니 한 치가 그의 키였다

아스파라거스는 숲을 이루고자 했으나 늪으로 자랐다

나무가 되지 못한 절망감이 덥수룩이 땅에 가 덮였다

 

아스파라거스는 숲을 우러른 발끝이었다

그 단단한 대의 힘은 욕망의 힘줄이었고

미움이 우거질 때마다 한 줄기 아집이 늘었다

 

아집 욕망과 스러진 욕망 사이에 머문다

무릇, 아스파라거스는 아집으로 묶인 채소이다

 

아스파라거스는 그의 단단한 육체가 부끄러웠다

차라리 발끝을 힘껏 오므려 흉측하고 싶었다

그의 육체 전부가 그의 아킬레스건이었던 것이다

 

아스파라거스의 전신으로 사람이 살아가는 것을 아는가

 

볶은 아스파라거스 한 입에 공연히 마음이 너그러워지는 것은

그것의 질감이 곧 우리아집닮아있기 때문이다

일순 지나간 시간들이 치명적으로 약해지는 탓이다

 

아스파라거스는 그의 아킬레스건 전부이기도 한데

이토록 무를 수 있다는 것은 그의 생에 미안한 일이다

꼭 자신을 미워하지 않아도 되었을 일이다

오므린 발끝을 펴서 우아한 육체여도 되었을 일이다

 

얼굴 붉혀지던 순간들에 지금처럼 우리의 아집이 물렀다면,

너와 나로부터 한 발치 물러설 수 있었을 것이다

무성했던 욕망만큼은 다치지 않았을 것이다

아스파라거스의 발끝이 닿은 곳으로 우리는 물러나야 했던 것일까



성명 :김지섭

연락처 : 010-6552-3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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