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모전] 회색빛깔의 시간 외 6편

by 거니거니홍건희 posted Feb 0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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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빛깔의 시간


모든 진동이 선명해지는

회색빛깔의 시간이 왔다


무심히 지나던 시곗바늘이

빗소리를 피해

잠깐 나에게 머물렀다


이불이 스치는 것도

발바닥이 붙었다 떨어지는 것도

병 속 물이 찰랑이는 것도

비 빛에 갇혀 더욱 떨려온다


모든 진동이 선명해지는

회색빛깔의 시간이 오면


나를 간지럽히던 고요함을 피해

너에게 귀 기울이고 싶다.

 


모든 존재가 선명해지는

회색빛깔의 시간이 왔다


비에 젖은 구름 위로

햇살이 잠깐 누운 사이

세상은 회색빛을 머금었다


꽃들도 나무들도

길 위에 구르던 모래들도

횡단보도와 신호등도

비 빛에 물들어 더욱 밝아온다


모든 존재가 선명해지는

회색빛깔의 시간이 오면


너를 감추어내는 햇살을 피해

내 눈길 위에 담아내고 싶다.

 

 

적지 못한 말


일기에도 적지 못한 말이

내 마음 안에 있다

1g의 무게조차 없는

잉크의 흔적이

살아서 나를 움직일까 봐

나는 나의 마음에

빛을 주지 않기로 했다.


편지에도 적지 못한 말이

내 마음 안에 있다

나는 오늘 힘들었고

상처받았고

외로웠으나

나는 나의 마음에

빛을 주지 않기로 했다.


두려움에 적지 못한 말이

내 마음 안에 있다

그 빛을 보고 있으면

사실이 될까 봐

진심이 될까 봐

나는 나의 마음에

빛을 주지 않기로 했다.


초속 30만 킬로미터로

쉼 없이 달려오지만

나의 마음에 부딪히지 않는다면

바다에 빨려 들어가듯 사라질 것이니

나는 나의 마음에

빛을 주지 않기로 했다.


설령 그대가

나의 가냘픈 떨림을 매질 삼아

빛의 반사 없어도

내 마음을 보고 있다면

그대의 빛을 내게 보여다오

그 빛을 보기 전까진

나는 나의 마음에

빛을 주지 않기로 했다.


그대의 마음에 빛이 없기를.


나는 어디에도

빛을 적지 못하고 있다.

 

엄마와 남정은씨


엄마와 남정은씨가

나란히 앉아 TV를 본다

배가 고프지 않냐고 물어보니

엄마는 무릎을 딛고 일어서서 부엌으로 가고

남정은씨는 아무 말이 없다.


엄마가 뭐 먹고 싶냐고 물어보길래

나는 남정은씨가 먹고 싶은 거로 먹자고 했다.

내가 좋아하는 샌드위치가 나왔고

남정은씨는 아무 말이 없다.


내가 태어나고

남정은씨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남정은씨는 아무것도 못했기 때문에

엄마는 나를 열심히 키우셨다.


내가 나름 잘 자라니

사람들은 남정은씨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엄마만 칭찬했다.


남정은씨는 아무 말이 없다.


5남매 중 둘째로 태어난 남정은씨는

가족에게 별 관심을 못 받았던 남정은씨는

학교 다닐 적 저축왕 상도 받았던 남정은씨는

바이올린 연주를 하고 싶었던 남정은씨는

아무 말이 없다.


5남매 중 둘째로 태어난 엄마도

가족에게 별 관심을 못 받았던 엄마도

학교 다닐 적 저축왕 상도 받았던 엄마도

바이올린 연주를 하고 싶었던 엄마도

아무 말이 없다.


27년 동안

나는 아직 엄마를 본 적이 없다.


내가 잉태되자마자 남정은씨는 사라졌고

엄마는 내 앞에 나타난 적 없다.


엄마도 남정은씨도 아무 말이 없다.



나무


그대는 한그루의 사과나무이니라.

아무리 좋은 포도나무도

향긋한 술과 기름 머금은 포도나무라 할지라도

작은 사과 한 알 대신 품어내지 못할지니

그대의 인생 누가 대신 살아갈 수 있으랴.

 

 

지우개 가루


얼마나 많은 글과

얼마나 많은 그림과

얼마나 많은 생각이


얼마나 많은 사랑과

얼마나 많은 이별과

얼마나 많은 추억이


얼마나 많은 삶과

얼마나 많은 죽음과

얼마나 많은 인생이


저 지우개 가루에 묻어 있을까?

 

 

운산(雲山)

 

하늘 반 구름 반 하늘에

구름의 꼬리털을 보면

웅장한 산맥이 보인다.


누가 저기까지 올라가

답답한 한숨 쉬이 불면

녹아 없어지겠지만


그곳은 닿을 수 없는 곳

나의 눈 위에서

대지에 신세 지며

하늘에 걸려있는

눈 덮인 저 거대한 산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만 볼 수 있다.

 

꽃다발

 

꽃은 서로 좋아해서

저들끼리 보며 피어난다.

꽃밭처럼

너의 미소처럼




홍건희 

번호 : 010-8007-9295 

(부재시) 박대준 010-6879-1205

E-MAIL :  je297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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