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문학 한국인 제 27회 창작 콘테스트> 시 부문 (기만 외 4편)

by 8.우주 posted Feb 10,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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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만

숨막히는 머리통 하나
기만이다

거대하고, 또 옹졸한
외나무 다리에 거니는 나는

달빛에 살이 에이는
반 쪽짜리 유물이다

그리하여
발 아래 포효하는 물살은
제 울고 싶을 적마다
나를 기만한
나의 계절을 베어 문다

베어 물다
반 쪽짜리가 성긴 물방울 되어
하나의 단위로 내려앉지 못하게 되면

끌어안는다
달빛이 타는 소리와 함께
다리 위의 지친 물보라를

속아넘어간다










꺼내다

나는 내 속에 든 나를 꺼낼 수 없었다
그저 겉에 붙은 껍질
박박 긁을 뿐이었는데

그리하여 나는
순간의 외로운 고목이 아니라
죄 많은 삭정이로
심연의 진흙 속에
처박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주 오래
하나의 단위로
피어날 수 없었다

없었고
없을 것이었다








자화상

꿈이 깨운 새벽

그 해 새 눈

나는 바깥으로 나가볼 수 없었다

하얀 방의 벽을 타고

진눈깨비가 흘렀다

창문을 열면

하얀 하늘이 나를 잡아먹을 것 같았다

 

누가 들어왔다

바깥세상이 잔뜩 묻은 얼굴에

웃음 같은 주름을 띠면서

나갈 수 없는 내 위로 헤프게 촉수를 세웠다

 

물이 가득 찬 다리로

버둥버둥 몸서리쳤다

곧 죽을 개처럼

 

찰나의 순간 깨닫는다

바로 나였다고

눈발을 세로로 걸어 들어온

세상의 흔적

나였다고

 

하얀 방

천장을 깨부술 듯하던

눈인지 진눈깨비인지가 멎었다

눈물 섞인 바람이 부는지

녹 슨 냄새가 났다


    


 

허기의 분기점

    

공중에 한번 튀어올랐다가

바닥에 닿기 전에 내려앉아서

예사롭지 않은 허기를 느낀다

 

그리고 생각한다

이 허기는 어디서 왔는지

허기를 느끼기 전에는 어디쯤 와있었는지

과연 정당한 허기인지를 생각한다

 

이틀 전 쯤 편지를 받았다

세상은 봄

꽃망울 터지는 소리에 허기를 느끼고

공중의 계단을 밟았던 것이다

 

세상은 봄

손가락 마디마디 죽음의 계절을 쥐고

오래된 밥 한 술 뜬다

 

그 쯤에서 흐느낀다

침묵처럼 계절이 피고 지는 소리가

어지러이 귓전을 때려서

침전한다


 

오후의 신음소리

      

피가 보라색으로 굳을 것 같은 날

창밖엔

무감한 바람이 불었네

 

시계소리는 모래알 같아

달갑지 않게 날 찔러도

      

나는 아직

초원에 홀로 남은 개처럼

갈 곳을 알고도 한참을 서있었지

 

머리위에서 올려다보는

칼날 같은 천장무늬의 시선

눈 맞추었을 땐

 

어둠 속 시곗바늘은

내 육신을 저당 잡아

박동을 멈춘 후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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